60화 - 궁금증 (1)
그는 오랜만에 다디단 꿈을 꾸었다. 평소에는 항상 그때의 장면이 반복되고는 했는데 오랜만에 가장 소중한 추억을 꾸었다.
언젠가 정원에 홀로 앉아 있었을 때 그녀가 울면서 다가왔었다. 안 좋은 일은 그녀가 아니라 그에게 일어났는데도 그녀는 자신의 일인 양 서럽게 울었다. 자신 앞에서는 무너져도 된다는 말에 결국 눈물을 흘렸을 때,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표정을 기억한다.
‘미안해, 에버. 내가 이것밖에 못 해 줘서.’
그녀가 꺼이꺼이 울면서 겨우 말을 뱉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방금 말했잖아. 옆에 있어 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내가 대공작 전하 잊지 않을게. 난 그분을 좋은 분으로 기억할게.’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때 그녀가 했던 얘기였다.
아버지가 로셸 글레멘드 공작과 친분이 있었기에 에스티아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에스티아는 하늘이 내려 준 기적 같은 존재였다.
우는 모습이 찬란하고 예쁠 수 있을까.
멍하니 우는 모습에 시선을 뺏긴 순간, 찾아온 달콤한 첫 입맞춤을 기억한다.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잊고 싶지도 않은, 가장 소중한 추억.
그는 다시 한번만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만약 돌아간다면 절대 놔주지 않고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딱 옆에만 잡아 둘 텐데.
행복한 꿈을 꾸는 데도 계속 후회가 밀려왔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지금 감미롭게 맴도는 풀 향이 진짜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 향기는 오직 한 사람만 갖고 있었으니까.
‘에버하르트!’
‘대공 전하.’
두 가지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하나는 마음을 사로잡았던 목소리, 하나는 마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목소리. 어느 쪽이든 그는 그 목소리를 놓을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이름을 담아 주길 바랐다.
“에스티아…….”
하지만 소망은 바로 이루어질 수 없어 대신 그녀의 이름만 읊조렸다.
‘에버하르트.’
‘대공 전하?’
이번에도 두 가지 음성이 들려온다. 물론 전하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더 현실성 있긴 한데…… 잠깐 현실성 있다고?
그 순간 꿈이 흐려지면서 현실의 촉감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조금씩 눈을 떴다.
처음에는 랜턴 빛에 눈을 찌푸렸던 그는 곧 눈앞에 보인 형상에 눈을 커다랗게 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검색 머리카락, 짙은 호수를 담은 듯한 눈동자, 하얀 도화지 위로 살포시 그려진 듯한 입술.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한 사람만 갖고 있는 아름다움이 그의 눈앞에 있었다.
“대공 전하?”
에스티아가 정신이 드느냐는 투로 그를 불렀다. 애간장을 타게 만들던 그 목소리였다.
“괜찮으신 거예요?”
“…….”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는 못하지만 그냥 두고 가기에는 마음에 걸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지금 이렇게 어디 다친 곳 없이, 이곳에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요즘 들어 그를 더 맹렬히 감시하는 누군가의 눈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그가 마음이 들릴수록 에스티아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미련이야 억겁만큼 있다는 걸 눈치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입혀놓은 상처가 있었으니.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얼굴을 보니.
“오길 잘했네.”
“네?”
“약 받으러 왔어요.”
에버하르트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에스티아는 그런 그가 적응이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 무슨 약이요?”
왠지 이렇게 물어야 할 거 같아서 에스티아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다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 때문이다.
“혹시 버지니아 약초요? 그거라면 저한테…….”
“그거 말고.”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간질거릴 만큼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따라 이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을 콕콕 찔렀다. 아무래도 마음이 반응하는 것이 예전에 사이가 좋았을 때는 이렇게 말했었나 보다. 그렇지 않다면 마음이 반응할 이유가 없으니까.
“다른 거요. 꼭 필요한 약이라 직접 오고 싶더라고요.”
약을 얘기하면서 왜 저런 눈빛으로 볼까.
에스티아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저 쳐다보는 것뿐인데 저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담기는 게 이상했다.
“글레멘드 영애.”
피아노 건반 위에 손짓이 내려앉는 것처럼 잔잔한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그저 평소처럼 부르는 건데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전에는 거리를 두기 위해 그렇게 부르는 거 같았다면 지금은 혹시라도 상처를 줄까 조심스러워하는 느낌이었다.
‘말도 안 돼.’
에스티아는 그렇게 느끼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저 방금 자다 일어나서 목소리가 잠긴 것뿐이리라. 에스티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 그럼,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그렇다면 전 이만.”
“잠깐만!”
에스티아가 일어나려고 하자 대공이 다급히 에스티아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에스티아는 당황하며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멈추었다.
“왜 그러시는데요?”
하지만 곧 에스티아는 평정을 되찾았다. 대공은 차가운 목소리에 힘없이 그녀의 옷자락을 놓았다.
“혹시…… 스퀘일러 상단주를 불러 줄 수 있어요? 지금 제가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음? 에스티아는 다시 자리에 앉아 대공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원래도 땡볕에서 훈련하는 기사답지 않게 피부도 하얬는데 지금은 거의 유령 수준이었다. 눈도 방금 운 사람처럼 충혈되어 있었고 입술은 군데군데 터서 피가 작게 맺혀 있었다.
‘뭐야, 그 잠깐 사이에 왜 이렇게 됐지?’
사실 지금도 무슨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닐까 의심이 됐지만 이번에는 정말 순수한 부탁인 듯했다.
“상단주님만 불러 드리면 되는 거예요? 의원은요?”
“의원은 괜찮습니다. 상단주님만 불러 주세요. 가게 뒤에 있는 약초 창고에 있을 거예요. 바깥에서 재배하는 거라.”
“…….”
다시 일어나려던 에스티아는 또 멈칫했다. 만약 정말 순수한 부탁이라면 진짜로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인데, 이 사람이 그렇게 몸이 안 좋았었나?
에스티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리플레이 해 보았지만 대공이 몸에 안 좋은 데가 있다는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몸이 안 좋냐고 캐묻는 건 좀 그래서 에스티아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뒤를 돌아서 가려는데 문득 이 창고, 바로 이곳에서 그와 ‘처음’ 만났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때만 해도 이 남자가 더 여유롭고 그녀가 당황했었는데 지금은 그 반대가 된 거 같았다. 요새 이 남자는 그때의 여유는 어디로 갔는지 시시때때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에스티아는 몸을 틀어 그와 마주했다. 그대로 그녀가 가는 줄 알았던 대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표정도 표정이었지만 하필 지금 머리도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라 대공은 더 어리게 보였다.
“……?”
대공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의원 정말 안 불러 드려도 되는 거예요?”
에스티아가 거짓말하는 거 아니냐고 묻듯이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대공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상단주님만 모셔와 주시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모시고 올게요.”
에스티아는 쭈뼛쭈뼛 걸음을 옮겼다. 대공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가는 모습을 놓칠까 싶어서.
* * *
에스티아는 아직도 얼떨떨했다. 갑자기 창고 안에 대공이 노숙자처럼 뻗어 있는 것도 황당했는데 태도도 전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에스티아는 자신이 들고 온 랜턴을 들고 가게 뒤 약초 재배지로 향했다.
가게 뒤에는 전생의 비닐하우스처럼 얇게 천막을 쳐놓은 재배지가 있었다. 에스티아는 조심스레 천막을 젖었다.
“상단주님?”
“……? 에스티아 아가씨?”
스퀘일러가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저녁은 드셨습니까?”
어느새 가까워진 둘은 아까 전에도 봤는데도 반갑게 포옹했다. 밝게 웃으며 몸을 뗀 에스티아는 그제야 스퀘일러의 차림새를 보았다. 평소보다 위아래로 통이 큰 옷을 입은 걸 보니 한창 약초를 보던 중인 듯했다.
“저야 든든하게 먹었죠. 상단주님은요?”
“전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급하게 할 일이 생겨서요.”
‘할 일’이라는 말에 에스티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스퀘일러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혹시 그 할 일이 대공 전하와 관련된 일인가요?”
“……? 아가씨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정말 그게 꾀병이 아니었다는 건가. 저놈의 대공은 왜 이렇게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지?
에스티아는 괜히 화가 났다. 마음이 편해질라 하면 갑자기 나타나서는 사람의 신경을 긁었다. 오늘도 그냥 오고 싶어서 왔는데 딱 마주칠 게 뭐람.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스퀘일러는 익숙한 듯 그녀가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전하…… 어디 안 좋으신가요?”
결국 에스티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스퀘일러의 눈빛이 슬프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