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 궁금증 (2)
사실 에스티아는 진즉 한 가지는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원작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거라는걸. 처음에는 그저 원작에 나오지 않은 이야기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아주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저녁 시간대에 상단을 찾을 정도면 보통 병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이게 소설에 나오지 않았다고? 만약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다른 거라면?
주먹을 쥔 에스티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스퀘일러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에스티아는 한발 물러섰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돼요. 그냥…… 많이 안 좋으신가요?”
걱정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병에 걸렸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게 마음속에서 점점 크게 불어나는 불안감만 아니었다면.
“많이 안 좋으신 건 아닙니다. 그랬다면 제가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셨겠죠.”
즉 아픈 건 맞지만 의원에게 진찰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면…….’
‘아직’ 의원에게 진단받을 수 없는 병인가? 혹시 모를 가정이 에스티아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많이 안 좋으신 것도 아닌데 손님이 찾아올 시간도 아닌 저녁에 가게에 왔다고요?”
방금 봤던 모습은 흡사 유령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안 좋았는데?
“그분이 비밀로 부탁한 거라 아가씨한테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더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
“네…….”
에스티아는 납득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대공 전하가 온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아!”
그러고 보니 대공의 부탁으로 온 거였는데 잠시 잊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민망한 듯 목덜미를 긁적였다.
“라트 약초 창고에서 대공 전하와 만났습니다. 거기에 앉아 계시던데요?”
“예? 라트 창고에요?”
스퀘일러가 예상치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랐다.
“사무실에 계셨는데 왜 거길……. 일단 가시죠, 아가씨.”
그가 보기 드물게 다급한 걸음으로 천막을 빠져나갔다. 에스티아도 괜히 마음이 안 좋아져서 그를 따라갔다.
스퀘일러는 거의 구십이 다 된 노인임에도 걸음이 무척 빨랐다. 에스티아는 거의 뛰다시피 그를 뒤따랐다.
창고 입구에 놓여 있던 랜턴은 빛이 거의 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스퀘일러는 능숙한 걸음으로 선반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열심히 그의 뒤를 따라가던 에스티아는 조금씩 걸음을 늦추었다. 왠지 지금은 대공의 얼굴을 보기가 싫었다.
“스퀘일러.”
대공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스퀘일러를 불렀다.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저렇게 누군가를 자상하고 따뜻하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이었나.
“왜 여기서 이러고 계십니까, 대공 전하.”
“그냥…… 여기에 너무 오고 싶더라고요.”
“아이고, 전하…….”
딱 선반 한 줄 뒤에서 에스티아는 약초 너머로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공은 아까보다도 안색이 더 안 좋았다. 스퀘일러는 조금씩 허리를 굽혀 대공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게, 차라리 솔직해지시라니까요. 이게 뭡니까, 지금.”
“그러네요. 상단주님 말이 맞았어요. 이 세상에서 나만큼 미련한 사람이 없어. 그렇다고 별수 있나요. 지금이라도 할 수 있는 걸 하는 수밖에요.”
대공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자세히 보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요?”
움찔. 에스티아는 갑작스러운 자신의 언급에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뻔했다.
“창고에 전하가 있다고 알려 주고는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요…….”
아무래도 엿듣고 있다고 하면 그것도 이상하니 대충 둘러댄 거 같았다. 대공은 하아 하고 긴 숨을 내뱉었다.
“언제 이렇게 심해지신 겁니까.”
“오늘 가신 회의를 했어요. 메르헨 셰린포드를 얼른 약혼녀로 맞이하라고 성화더군요.”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 대공의 태도를 생각했을 때 전혀 모를 수가 없는 모순점이 들렸다.
“하기야 그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대공비상은 셰린포드 영애이겠군요.”
“하…… 이상적인…….”
대공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스퀘일러가 아닌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를 화나게 만드는 이들을 향한 책망이었다.
“단편적인 면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요. 아마 에스티아의 눈에는 나도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끔찍했던 걸요, 내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씀하시지 괜히 떠보다가 왜 더 무덤을 파십니까.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그 말을 듣자 에스티아는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스퀘일러가 일부러 그녀에게 정보를 주기 위해 그녀를 숨겼다는걸.
그래서 에스티아는 일부러 소리를 죽인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불안해서 제어가 안 돼요. 난 오스카 후작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괜한 자존심이었죠. 에스티아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에스티아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오스카가 분명 그랬다고 했다. 그녀가 그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게 아니라 시간을 되돌렸다고. 대공이 그의 말을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괴롭혔던 건 둘째 치고, 그 ‘시간을 되돌렸다’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만약 시간을 되돌렸다면 어느 시점에서 되돌린 걸까. 게다가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왜 ‘에스티아 글레멘드’에 빙의를 한 걸까.
게다가 그녀가 기억이 없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스퀘일러까지 자신이 과거의 기억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그녀를 상단의 사람으로 받아 준 것이었다.
“아가씨와 이야기 좀 나누어 보셨습니까?”
할아버지가 손자를 달래듯 따뜻한 목소리였다. 대공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헛걸음은 아니었습니다. 얼굴 봤으니까, 좀 진정이 됐어요.”
“어휴, 이 바보 같은 사람아…….”
스퀘일러가 대공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스티아는 그 광경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 어떤 광경보다도 그녀에게 큰 공포를 안겨 주었다.
에스티아는 결국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 그들의 대화를 더 이상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혹시나 하는 가정이 그녀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힐 거 같았다.
혹시나, 만약에…….
에스티아는 황급히 가게 밖을 나와 숨을 골랐다. 비가 그녀 위로 하염없이 쏟아졌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로 대공이……
나를 사랑하고 있으면 어떡하지?
에스티아는 그 가정이 너무나도 끔찍하게 느껴졌다.
* * *
메르헨의 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녀가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하고 이런저런 물건을 집어 던진 탓이었다. 하녀 러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채 끅끅거리며 울고 있었다. 실컷 화를 풀 수 있도록 나가려고 하니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렇다고 나가자니 그러지도 못하게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하녀를 배려하면서 물건을 던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러스의 이마에는 무언가가 부딪혀서 상처가 나 있었다.
“아악! 겨우 돌려놓았더니! 왜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건데, 왜!”
대공이 상단으로 갔다. 그리고 현재 그곳에는 에스티아 글레멘드가 있었다. 알고 갔든 모르고 갔든 그가 무엇을 기대하고 갔는지는 확실했다. 그게 그녀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그나마 척이라도 해 주는 줄 알았더니 이제 그것도 집어치우는 건가. 메르헨은 두 주먹을 쥐고 파르르 떨었다. 힘을 준 손에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믿고 싶기도 했다. 자신이 그 여자를 건드리는 게 무서워서 연기하는 걸 수도 있지만 정말 자신을 사랑하게 된 거라고. 입 한 번 맞추지 않고 다정하게 안아 준 적도 없지만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메르헨은 이를 아드득 갈았다.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연인이라 제대로 얘기한 적 없어도 조금씩 마음이 변해 가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이럴 거면 차라리 에스티아 글레멘드가 미친 여자처럼 대공을 쫓아다녔을 때가 나았다. 오히려 그녀가 마음을 접으니 그게 대공의 마음에 더 불을 붙인 듯했다. 거기에 홀라당 넘어간 어리석은 대공에게도 화가 났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분노. 겨우 그런 여자한테 졌다는 것에 대한 분노.
“흑…… 흑흑…….”
하녀는 두려움에 결국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보다도 앞으로 이런 곳에서 일해야 한다는 게 너무 암담했다.
울음소리는 예민한 귀족 아가씨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그녀가 시끄럽다는 듯 하녀를 향해 책을 집어 던졌다. 조그만 수첩 정도로 작은 책이었지만 하녀를 기함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꺄악!”
“입 좀 다물어!”
하녀가 무릎을 꿇은 채로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팔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하녀의 모습에 더 열이 받는 듯 더 소리를 질러댔다.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상황이었다.
“안 되겠어. 그동안 내가 너무 고분고분했어. 러스, 러스!”
이름을 불렀는데도 하녀가 대답이 없자 그녀가 이번에는 큰 책을 집어 들었다. 그걸 본 하녀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네…… 네…… 아가씨…….”
“마차를 갖고 와.”
“네?”
“안 들려? 이 멍청아? 마차 갖고 오라고, 마차!”
하녀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울면서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화를 낼 수 있는 데까지 냈다고 생각했는데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유일하게 이 분노가 사그라들 방법은 그가 찾아와 그녀에게 용서를 빌고 사랑을 고백하는 건데 그럴 가능성은…….
“꽃 하나로는 부족했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장미. 좀 키워 보려고 했더니 기어코 꺾게 만드는구나.
그녀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렸다. 그녀는 하녀를 불러 꽃을 사 오라 지시했다.
* * *
에스티아는 씻고 왔지만 기분이 이상하게 개운하지 않았다. 아까 보았던 대공의 표정, 미소가 생각났다. 씁쓸하고 괴로워 보이던 목소리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경 안 쓸 거야. 네가 알고 싶다고 해도 신경 안 쓸 거야.’
그 사람이 얼마나 아프든, 어디가 아프든 신경 안 쓸 것이다.
‘그러니까 에스티아, 제발 좀, 그만 생각해. 제발.’
에스티아는 침대에 엎드린 채 생각에 빠졌다.
밤이 다 되어서 불청객이 찾아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