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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62화 (63/141)

62화 - 투명한 본심

“아가씨.”

메리가 경직된 표정으로 에스티아의 방으로 들어왔다. 잠이 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맞을 상태는 아니었던 에스티아는 메리의 표정을 보고 긴장했다.

“무슨 일이야? 누가 왔길래?”

“그게…… 셰린포드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뭐? 메르헨이?”

에스티아는 자신의 책상 위에 있던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시침은 거의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무슨 남주, 여주가 번갈아 가면서 늦은 시간에 찾아와.’

내심 화도 났지만 동시에 궁금하기도 했다. 대공이야 워낙 뻔뻔한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메르헨이 이 시간에 왜 찾아왔을까?

“네…… 근데 표정이 너무 안 좋으세요.”

표정이 안 좋다. 에스티아는 왠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필 스퀘일러 상단의 창고에서 대공과 마주치고 난 뒤 메르헨이 찾아왔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찾아오는 시간대도 아니고 한밤중으로 나아가는 시간대에 그녀가 이 저택으로 왔다.

어차피 찾아온 손님을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에스티아는 상황도 파악할 겸 그녀를 응접실에 안내하라 일러두었다. 메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사이 카린이 들어와 그녀가 옷 입는 걸 도와주었다.

에스티아는 카린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로 향했다. 어째 대공이 왔을 때보다 마음이 불안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안하다기보다는 불편했다.

카린이 노크를 하고 응접실 문을 열었다. 응접실 안은 이상하게 한기가 맴돌고 있었다.

“메르헨.”

에스티아가 손님용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메르헨을 불렀다. 테이블 위에 파란 장미 꽃다발이 올려져 있었다.

“에스티아!”

메르헨이 울먹거리며 에스티아를 향해 뛰어왔다. 그러고는 그녀를 꽉 껴안았다. 메르헨이 에스티아의 어깨의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었다.

“흑…… 흑흑…… 에스티아…….”

메르헨은 마치 아기처럼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 에스티아는 이 상황이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왜, 왜 그래요, 메르헨.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울어요.”

보통 서럽게 우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마음 한편으로 안타깝기도 했지만 왠지 이 상황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정말 힘들다면 자신을 찾아올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가 이렇게 벌써 자신을 의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였다.

어찌 되었든 메르헨과 에스티아는 연적이었다. 그것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경멸하는 사이. 근데 그게 겨우 며칠 사이에 나아질 리는 없었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을 떼어 놓고 싶었지만 애써 그 마음을 억누르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 손짓에 메르헨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에스티아는 메리에게 자신의 손수건을 가져오라고 말한 다음 메르헨을 소파에 앉혔다. 메르헨은 카린이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에스티아는 유리컵을 내려놓은 메르헨의 뺨을 손수건으로 조심히 닦아 주었다. 눈은 벌써 퉁퉁 부어 있었다.

“자, 이제 얘기할 수 있겠어요?”

에스티아가 메르헨의 등에 손을 얹고 계속 토닥토닥 해 주었다. 테이블 위에 있는 장미꽃이 시선에 들어왔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묻기는 어려워 보였다.

“네…… 미안해요, 에스티아……. 너무 속이 상한데 믿고 얘기할 만한 사람이 에스티아밖에 없어서요. 특히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에스티아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그 사람’과 문제가 생겼으면 그 사람에게 가야지 왜 여기에 왔을까? 일단 에스티아는 더 얘기를 들어 보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어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왜 제가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아마 그분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여기에 오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영애라면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 마음을.”

당신도 그를 좋아했으니, 혹은 좋아하니 자신의 심정을 이해할 거라는 말 같았다.

왠지 그런 의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안 좋아졌지만 메르헨에게 헌신하겠다고 대공에게 몇 번이나 떵떵거린 참이었다. 결국 에스티아는 그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그녀에게 증명하고자 메르헨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편하게 얘기해요, 메르헨.”

“고마워요, 에스티아.”

메르헨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에스티아는 따뜻한 차가 들어 있는 찻잔을 메르헨의 손에 조심스레 쥐여 주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아직 장미꽃을 왜 갖고 왔는지 묻기는 어려워 보였다. 보통 늦은 시간에 찾아오면서 사과의 의미로 꽃을 가져오던가?

“마셔 봐요. 마음이 안정될 거예요.”

정작 자신의 마음은 술렁거리고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이를 숨긴 채 말했다. 메르헨은 아기 새처럼 조금씩 차를 들이켰다. 에스티아는 그런 메르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메르헨은 찻잔을 무릎 위로 쥔 채로 조금씩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대공 전하와 자주 만나지 못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한 번은 만났는데 요즘은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어요. 제가 직접 찾아가는 게 아니면.”

에스티아는 왠지 마음이 뜨끔했다. 그동안 그 남자와 있었던 일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니 작은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고해성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서 그 대공부터 정신 차리게 해야만 했다.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는 괜히 자신만 곤란해질 테니까.

빨리 이 피앙세를 그가 따뜻하게 안아 줘야만 했다.

“처음에는 장마 때문이겠거니, 저택이나 영지 관련 일 하시기도 바쁠 텐데, 기사단 훈련까지 지휘해야 하니 더 그런 거겠거니 싶었어요. 근데 아닌 거 같아요.”

메르헨의 눈이 에스티아를 향했다. 에스티아의 몸이 뻣뻣해졌다.

“그럼요?”

에스티아는 최대한 담담한 톤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메르헨의 연보랏빛 눈이 번뜩였다.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마음이 움직이신 거 같아요.”

“……!”

에스티아는 자칫하면 컵을 떨어트릴 뻔했다. 역시 이 여주인공이 괜히 악녀의 집으로 온 게 아니었다.

“다른 곳이라뇨. 전하께서는 메르헨을 사랑하시잖아요.”

“…….”

이번에는 메르헨이 아무 말이 없었다. 느낌이 에스티아의 반응을 살피는 거 같았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뚝심 있게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여기서 괜히 횡설수설해서 이런저런 말만 더하면 덜미만 잡힐 뿐이었다.

“혹시 뭔가 아는 게 있나요, 에스티아?”

메르헨의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다. 선율이 거의 진혼곡 같다는 걸 빼면. 에스티아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이미 전하와 저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걸요. 그건…… 예전에도 그랬지만.”

생각해 보면 과거에도 딱히 특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약혼녀 후보였을 뿐 엄밀히 말해 정혼자도 아니었다. 친구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얄팍한 우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이미 끝난 사이였다. 끝나야 하는 사이였고.

“전하한테 가서 물어보고 싶었지만 겁이 나서 못 물어보고 있어요. 혹시라도 ‘그렇다’라는 대답을 들을까 봐.”

‘에버하르트는…… 메르헨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순간 레이븐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스티아는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메르헨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에스티아?”

“그럴 리가 없어요. 전 알아요. 전하가 메르헨과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간 저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셨는지. 그런 사랑이 겨우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건, 메르헨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

메르헨은 에스티아의 말을 수긍하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에스티아는 방금보다 다정한 목소리로 메르헨을 위로했다.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일이 되면 이렇게 걱정했다는 게 바보 같다고 하는 것처럼 대공 전하가 메르헨 찾아갈 테니까. 바일 대공 전하가 이 세상에서 메르헨 아니면 누굴 사랑하겠어요.”

누굴 사랑하겠어요. 메르헨의 마음속에 그 말이 깊숙이 다가와 박혔다. 찻잔을 쥔 메르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 왜 왔을까요?”

“네? 누가 어딜…….”

“대공 전하가 왜 에스티아의 집에 왔을까요?”

에버하르트가 왜. 메르헨이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메르헨은 에스티아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 * *

에스티아는 알고 있었다. 그때 마차 안에서 만약 끊어 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널찍했던 마차 안을 가득 채우던 달뜬 신음 소리와 움직임. 애태우며 조그마한 틈만 내보이던 입술 사이를 뚫고 그가 어떻게 그녀의 입 안을 헤집었는지 에스티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손은 그녀의 목덜미와 허리를 잡고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그게 대공의 최후의 이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나마 그곳이 마차여서 자제를 한 거지 아니었으면 대공은 진작 그녀 앞에서 무너졌으리라.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깊이 파고들어 왔다. 그녀의 혀를 끊임없이 옭아매고 위아래로 쉴 새 없이 오가며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거의 입 구석구석을 점령할 기세라 에스티아가 숨이 막혀 와서 그의 어깨를 쳤을 정도였다.

이따금 그녀의 귀를 살짝 깨물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갈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 에스티아…….

그 소리가 너무 색정적이어서 에스티아의 얼굴이 잠시 빨개졌다. 그녀는 그 목소리가 마치 사막을 헤매던 여행자가 오아시스를 만났을 때 내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이후 그녀의 안색은 평소대로 돌아왔고 그는 그녀를 눕히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완벽한 그녀의 승리였다.

하지만 곧 그토록 부정하고 싶은 사실을 알게 되었기도 했다.

어쩌면 그 바보 같은 대공의 마음이 메르헨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는걸.

그러나 에스티아는 믿을 수 없었다. 믿기도 싫었다. 믿기에는 그가 그녀에게 남긴 상처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건 단순히 당신을 용서하겠노라, 단 한마디로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치욕스러운 상처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메르헨?”

그래서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메르헨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말 그대로예요, 에스티아. 대공이 이 집에 왔었어요?”

메르헨의 눈동자는 평소처럼 투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본심만은 투명하게 보였다.

에스티아는 조금씩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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