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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63화 (64/141)

63화 - 새로운 시작

“네, 오셨었죠.”

에스티아가 담담히 답했다.

“마찻길이 침수되어서 저희 저택에 잠시 머무셨잖아요.”

“…….”

에스티아는 애매하게 대답하는 방식을 택했다. 메르헨부터가 떠보듯이 물었으니 에스티아도 같은 방식으로 대답했다.

“그렇죠. 제가 괜한 걸 여쭤보았네요.”

메르헨이 싱긋 웃었다. 그제야 분위기가 좀 풀리는 듯했지만 에스티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 다른 곳에서 마주친 적은요? 워낙 그분을 만나기가 힘들어서요.”

메르헨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에스티아는 이번에는 솔직하게 답했다.

“아까 상단에 오셨었더라고요. 저는 상단주님한테 인사만 하고 왔어요.”

“안색은요?”

메르헨이 초조한 낯빛을 한 채 물었다.

“안 좋았어요. 어디가 아픈 거 같았어요. 아무래도 영애께서 한번 가 보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메르헨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시선을 내리니 손도 떨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혹시 자신이 잘못 말했나 싶어 메르헨의 손을 잡았다.

“아마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런저런 일까지 겹치니 정신이 없으셨을 거예요. 나중에 영애가 바일 저택으로…….”

“왜.”

메르헨의 목소리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에스티아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왜 저한테 그런 말씀을 안 하셨을까요. 아프다고, 나 너무 힘들다고, 왜 말을 안 했을까요.”

두 손을 맞잡은 메르헨의 손이 덜덜 떨렸다. 반면에 눈에는 초점이 없어 더 기이한 느낌을 자아냈다.

“에스티아, 나 너무 불안해요. 전 에버가 없으면 안 되는데 그이는 아닐까 봐 무서워요. 에스티아, 나 좀 도와줘요.”

메르헨이 떨리는 손으로 에스티아의 두 손을 맞잡았다. 그저 이 상황이 얼떨떨한 에스티아는 메르헨을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나와 정식으로 거래를 해요.”

“네?”

“에스티아, 당신은 공작 영애이지만 사업가이기도 하잖아요. 나와 정식으로 거래를 해요. 전하와 내가 무사히 약혼, 아니 결혼을 할 수 있도록.”

에스티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꼈다. 메르헨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레이븐이 했던 말과 대공이 보였던 태도가 그녀의 마음에 은밀한 죄책감을 부추겼다.

“소문도 에스티아가 낸 거잖아요. 날 돕기로 했으니까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고 거래를 하자고요.”

“……계약서요?”

‘계약서’라는 말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계약서가 가진 위력을 알고 있었다. 이래 봬도 사업이 본업이었던 사람이었다.

“에스티아.”

메르헨이 에스티아의 손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나와 계약을 해요.”

“무슨 내용으로요? 조건은 뭐죠?”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한층 냉정해졌다. 당황스러웠지만 이런 상황일수록 더 침착해져야 하는 법이었다. 사업가였던 에스티아는 머릿속을 냉정하게 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 메르헨은 에스티아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판단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지금처럼만 여론이 내 손을 들어줄 수 있도록 도와줘요. 혹시라도 에버의 마음이 흔들리면 옆에서 잡아 줘요. 그럼 스퀘일러 상단에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건 다 지원할게요. 그 외에…… 사람이 더 필요하다거나 돈이 필요하다면 다 줄게요.”

메르헨은 거의 빌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박해 보였다. 반면 에스티아는 점점 마음이 침착해졌다.

얼핏 들으면 손해 보는 게 없는 계약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만큼 이득이 잘 보이는 계약이라면 제대로 조건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손해도 만만치 않을 게 분명했다. 에스티아는 바로 그 점을 지적했다.

“그럼 만약 내가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했을 때는요?”

“…….”

우다다 말을 쏟아 내던 메르헨이 그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에스티아는 조심스럽게 메르헨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메르헨, 난 사실 메르헨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본 대공 전하는 언제나 당신에게 다정했어요. 충실했고요. 내가 메르헨을 돕는 이유는 당신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그랬지만, 대공 전하와 이제 인연을 끝내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어요. 굳이 계약서가 필요 없다고요.”

“하지만…….”

“메르헨.”

에스티아는 메르헨의 두 어깨를 붙잡았다.

“당신은 지금 흥분했어요. 오늘은 푹 자고, 내일 대공 전하와 제대로 얘기해요. 원한다면 우리 저택에서 자고 가도 좋아요.”

“고마워요, 에스티아. 하지만 괜찮아요.”

나지막이 말을 내뱉는 메르헨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걱정돼 의원을 불러야 하나 생각하던 에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메르헨의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잠잠히 잠긴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그 사람이 저한테 너무 소중해서 그래요. 조금이라도 변하면 걱정되고 두렵고, 그렇더라고요.”

메르헨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티아도 그녀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걱정은 감사하지만 난 이제 괜찮아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하고도 제대로 대화 나눌게요. 화해하면 바로 편지할게요.”

메르헨이 힘들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에스티아는 마음속에 뭔가가 뭉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아는 현관까지 메르헨을 배웅했다. 이대로 보내도 되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붙잡아 둘 순 없어서 에스티아는 결국 인사를 건넸다.

메르헨이 에스티아를 포옹했다. 차가운 감촉이 몸에 와 닿았다. 에스티아는 그녀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었다.

이윽고 메르헨을 실은 마차가 글레멘드 저택을 떠났다. 에스티아는 착잡한 마음으로 그녀가 떠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응접실에는 여전히 메르헨이 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 꽃을 불안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메르헨은 떠났지만 꽃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에스티아가 천천히 꽃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닿기 직전 멈칫했다. 이상하게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하필 파란 장미인 걸까? 에스티아가 얼마 전에 봤던 파란 장미꽃밭을 떠올렸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음산한 느낌을 주었던 꽃밭. 그 꽃밭을 축소해 놓은 게 바로 이 꽃다발 같았다.

에스티아가 꽃다발을 잡았다. 그녀는 그걸 들어 올리며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꽃은 고요히 에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그다음 날 에스티아는 수시로 메리에게 편지가 온 게 없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메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편지라고는 상단에서 온 보고용 편지가 전부였다. 에스티아는 점심을 맛있게 먹으려고 했지만 전처럼 술술 넘어가진 않았다. 왠지 어제 상태로는 메르헨이 바로 대공을 만나러 갔을 거 같은데 왜 아직 연락이 없을까.

결국 에스티아는 옆자리에 메리를 앉혀 놓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메리는 조용히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오히려 일이 잘 풀려서 까먹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만약 일이 안 풀렸으면 바로 편지가 왔을 수도요! 제 경우에도 좋은 일 생기면 그때에 심취해 있다가 안 좋은 일 생기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더라고요. 셰린포드 아가씨도 그러신 걸지도 몰라요.”

즉,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메리의 추측이 맞다고 믿고 싶었다. 대공과 너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깜빡한 거뿐이라고.

‘근데 왜…… 왜 이렇게 심장이 뛰지.’

에스티아는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모르지 않았다. 심장이 불안함으로 뛰고 있다는 건. 어쩌면 ‘원래의’ 그녀가 남기고 간 질투심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안 돼. 난 그 사람 사랑하기 싫어.’

알고 싶지도 않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대공이 지금 흔들리고 있는지.

에스티아는 이마에 손을 올렸다. 메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약이라도 갖다 드릴까요?”

“아니,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메리.”

에스티아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았다. 물론 그걸로는 메리를 안심시키지 못했지만.

에스티아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의 말처럼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믿을 참이었다. 그녀가 편지를 안 보냈다고 자신이 편지로 캐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웠다.

그렇게 에스티아가 디저트를 즐거운 마음으로 먹고 있던 차에 이안이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웬트워스에게 총총 뛰어갔다. 보통 경우라면 사용인들이 체통을 지키라고 했겠지만 그들은 그저 에스티아의 밝은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주방장은 트레이를 끌고 다른 사용인들과 조용히 식당을 나갔다.

“왔어? 응? 손에 든 건…….”

에스티아의 말이 뚝 멈췄다. 편지에 찍혀 있는 인장은 황가의 표시였다. 어느새 빙의한 지 한 달 정도 된 터라 에스티아는 이 문양을 모를 수가 없었다.

“기사 이안 웬트워스, 에스티아 글레멘드 영애에게 황제 폐하의 서신을 드립니다.”

이안은 황제의 사자(使者)를 대신해 에스티아에게 편지를 건넸다. 에스티아는 긴장된 표정으로 편지를 받아 들고는 편지 칼로 조심조심 봉투를 뜯었다.

그곳에는 수려한 필체로 황궁을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황궁 안에 버지니아 약초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부서를 만들려고 하는데 에스티아의 자문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만약 이야기가 잘 진행된다면 그때는 스퀘일러 상단주까지 황궁으로 부를 의사가 있다고 했다.

스퀘일러는 평민이었다. 그리고 황제가 평민을 궁으로 부른다는 건 그만큼 능력을 인정한다는 거였다.

에스티아의 미소가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화사하게 입가에 그려졌다. 그녀는 자신이 인정받았다는 것도 기뻤지만 스퀘일러가 신분의 벽을 넘어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마음이 들떴다.

에스티아는 웬트워스를 껴안았다.

이제야 비로소 진짜 ‘에스티아 글레멘드’의 인생을 시작한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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