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한번 노력해 보세요
에스티아는 오랜만에 귀족 영애처럼 빼입었다. 그렇다고 거동이 불편할 만큼 치렁치렁하게 꾸미진 않았다. 허리만 살짝 조인 드레스는 그녀의 머리색처럼 검청색이었으며 드레스 밑으로 내려갈수록 안에 댄 붉은색 천이 조금씩 드러나는 옷이었다. 꽃을 연상케 했지만 언젠가 시들 꽃이 아닌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시키는 옷이었다.
그 위에 얇은 로브를 걸친 에스티아는 이안과 함께 마차를 탔다. 공작 영애가 아니라 전문 상인으로서 방문하는 기분이라 에스티아는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떴다. 전에는 멀다고 느꼈던 황궁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시간은 빠르게 갔다.
에스티아와 이안은 궁인의 안내를 받아 먼저 응접실로 들어갔다. 전에도 왔던 곳이지만 이상하게 다르게 보였다.
“이안, 황궁에 오니까 어때? 황실 기사단에 들어올 뻔했다고 했잖아.”
어느새 이곳 생활에 익숙해진 에스티아는 이안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황실 기사단에 들어갈 뻔했다는 사실과 잠깐 전문 용병단을 도와주었다는 걸 알아냈다.
“영광이긴 합니다만, 역시 전 너무 화려한 거와는 안 맞는 거 같습니다.”
“왜,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그 사람처럼 제복만 입으면…….”
아.
에스티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안도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아, 아니야. 너는 더 멋있…… 아니, 그니까 멋있을 거 같다고!”
아오.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재수 없는 대공을 떠올렸다고 생각하니 화가 났다. 에스티아는 애써 머릿속에서 그 잔상을 지워냈다.
“에스티아!”
그때 좋은 타이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던 에스티아가 상대를 향해 밝게 인사했다.
“부기사단장님!”
“아이비라고 불러요.”
“그래요, 아이비.”
에스티아와 아이비가 반갑게 포옹했다. 겨우 한 번 만났을 뿐이지만 묘한 공통점을 가진 두 사람은 오랜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저 보러 온 거예요?”
“네, 폐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오늘 영애께 자문을 구하기 위해 궁으로 부르셨다고요.”
“와 줘서 고마워요.”
에스티아가 아이비의 손을 꼭 잡았다. 그에 화답하듯 아이비도 에스티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익숙한 얼굴과 같이 오셨군요.”
아이비의 시선이 에스티아의 뒤를 향했다. 이안이 어색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부기사단장님.”
“반갑습니다, 남작.”
아이비가 여유롭게 웃으며 인사에 답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구면이시겠군요.”
에스티아가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이비가 피식 웃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황실 기사단에 영입하려고 했었죠. 물론 영애가 허락하면요. 그런데 그 전에 거절당했습니다.”
“음? 왜요?”
이안이 유능하다는 건 주변 사람들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지라 아이비가 탐을 내는 건 이해했다. 다만 왜 거절했는지 궁금했다.
“처음에는 영애 옆에 있고 싶다고 거절하셨고, 두 번째는 저 남작 분께서 누구와 사이가 안 좋아서 거절했습니다.”
“응? 누구요?”
“그건…….”
아이비가 자신의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굳이 제가 대답 안 해도 될 거 같군요.”
에스티아가 아이비의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리고 곧 에스티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 혼자 온 게 아니거든요.”
“아, 그렇네요.”
에스티아가 담담히 내뱉었다. 그녀의 뒤로 멀끔한 제복 차림의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글레멘드 영애.”
언제 그랬었냐는 듯 차분한 목소리였다. 어제 봤을 때와는 달리 깔끔하게 머리를 넘긴 대공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안은 대놓고 얼굴을 구겼다. 마치 못 볼 거라도 봤다는 표정이었다.
“오늘은 그 수행원이라는 분과 ‘드디어’ 같이 오셨군요.”
빠직. 이안의 눈에서 불이 일렁거렸다. 대공도 지지 않고 이안을 노려보았다. 에스티아는 중간에서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안 들어갔는지 알겠네.’
이안 입장에서도 저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대공 입장에서는 저 사람을 밑에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를 째려보기에 에스티아가 어떻게 진화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이비가 조용히 대공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인사하러 온 거지 싸우려고 온 건 아닌데요, 단장님.”
“그래, 싸우러 온 게 아니잖아, 이안.”
에스티아도 이안의 등을 톡톡 토닥였다. 그사이 대공의 눈에서 뭔가가 일렁이는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는 무시했다.
“자꾸 누가 쓸데없는 간섭을 해서요.”
“아, 저는 자꾸 누가 직무 유기하는 거 같기에.”
이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공도 맞받아쳤다. 에스티아는 해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있다가는 안 끝나겠는데.’
“남작.”
결국 다시 싸움이 일어나려는 걸 막으려는 듯 아이비가 이안을 불렀다.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네? 부기사단장님과 제가 왜…….”
이안이 강렬히 거부하듯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를 아이비가 팔을 잡고 잡아끌었다.
“아! 왜요! 아가씨, 아가씨!”
이안이 질질 끌려가며 애절하게 에스티아를 불렀다.
“잔말 말고 따라와요. 잠시 남작 좀 빌려 가겠습니다, 영애.”
아이비는 여전히 평온함을 잃지 않고 그를 여유롭게 끌고 갔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안은 황망한 표정으로 아이비와 응접실을 나갔다.
그렇게 응접실에는 대공과 에스티아, 둘만 남았다.
“…….”
“…….”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던 눈이 어느새 아래로 향해 있었다. 제복을 입은 차림새는 멀끔한 기사단장이었는데, 표정과 눈빛을 보면 짝사랑하는 사람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 같았다. 에스티아는 그 간격을 외면하려 먼저 말을 꺼냈다.
“몸은 어떠세요? 어제 창고에서 뵈었을 때는 너무 안색이 안 좋으셔서요.”
“아…….”
대공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낼 줄 몰랐다는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예, 덕분에 괜찮습니다. 영애께서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그랬던 그가 에스티아에게 곧 시선을 고정했다. 항상 이 사람하고 있으면 다투기만 했었던 터라 에스티아는 이 상황이 낯설었다. 대공과 ‘평온하게’ 바라보며 ‘평범하게’ 인사를 하는 날이 오다니.
“네, 저야 언제나 괜찮죠. 요즘 들어서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는데요.”
다만 그게 그가 원하는 바 같아서 에스티아는 괜히 퉁명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대공이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걸었다.
“예, 영애께서는 좋아지신 거 같습니다. 제가 문제죠. 저는 어느 때보다도 불행하거든요.”
아, 정말. 말을 해도 꼭 저렇게 한 대? 그렇다고 누가 궁금해할 줄 아나. 솔직히 털어놓을 줄 아나.
“그러세요, 그럼 어서 빨리 전하께서 행복해지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대공이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딱 하나가 더 필요한데 몇 년째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
에스티아가 지긋이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기억을 잃었다 인정하고 어서 나에게 과거에 대해 물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굳이 아픈 과거를 힘들게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기억이 나서 마음까지 함께 딸려 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에스티아는 그런 상황은 원치 않았다.
“가끔은…… 스스로를 괴롭히게 하는 건 포기해야 할 때가 있더라고요. 상대를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건 제가 제일 잘 알거든요, 포기하는 거.”
“포기 말입니까?”
대공이 말을 토해 내듯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더니 힘겹게 미소를 그리며 더 가까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미소와는 달리 물기를 머금은 눈빛을 하고서.
“그랬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거면 진작 포기했을 겁니다.”
“…….”
“수십 번, 수천 번 포기해야 한다고 세뇌할 때부터 이미 틀린 거였습니다. 이렇게 미련하게 굴고 있는 이유죠.”
도대체 왜 이렇게 말문이 막히게 만들까. 잘한 것도 없으면서.
“그럼 한번 노력해 보세요. 물론.”
에스티아가 대공의 눈을 딱 쳐다보았다.
“꼭 찾는다는 보장은 없겠지만.”
에스티아의 냉정한 말에 대공의 눈빛이 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마치 정말 그래야 하는 것처럼.
“네, 이제 제대로 노력해 보려고 합니다. 도저히 원래 하던 방식으로는 못해 먹겠어서.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옆에 있고, 지키고, 하려고요.”
에스티아는 숨을 삼켰다. 자꾸 원래 그녀의 감정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마치 자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에스티아는 티 나지 않게 숨을 골랐다.
“그러세요, 그럼. 근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뭘 위해 노력하시든, 이렇게 사적으로는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단호하게 말한 에스티아는 그를 지나쳐 갔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대공이 다시 말을 꺼내기 전까지.
“공적으로는…… 괜찮은 것이지요.”
에스티아의 눈빛이 조용히 떨렸다.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저릿할까.
에스티아가 고개만 튼 채로 대답했다.
“사실 공적으로도 마주치기 싫습니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죠.”
“공과 사…….”
대공이 에스티아가 했던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요, 그걸 구분해야 하는데…….”
대공이 성큼성큼 에스티아에게 걸어왔다. 워낙 긴 다리인지라 단 몇 걸음 만에 바로 그녀의 코앞에 도달했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당황해서 겨우 몸만 틀었을 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공적인 일마저도 기회로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모든 게 기회로 느껴진다면…….”
“그건.”
에스티아가 대공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보 같은 거죠. 잠시 흔들리는 걸 마음이 바뀌었다고, 멍청하게 착각하고 있다거나. 그래서 저는 계속 하던 대로 하려고 해요. 전하께서 말한 그 헌신이요.”
-셰린포드 영애에게 영혼이라도 바치시든지요.
“영혼이라도 바치라면서요.”
에스티아가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대공의 옅은 녹색 눈동자가 괴로움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대로, 그렇게 하려고요.”
“만약 내가 원치 않는다면요.”
“제가 원해요.”
“…….”
에스티아가 올곧은 눈빛으로 대공을 올려다보았다.
“전하한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저한테 물으라고 하지도 말고 제 마음을 들으려고 하지도 마세요. 그러려고 어제 당신 피앙세 상담해 준 거 아니니까.”
에스티아는 숨을 후 뱉었다. 이제 이야기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잠깐만.”
대공이 그녀의 팔을 붙잡기 전까지. 세게 잡지도 않았는데 손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무슨 소리입니까, 상담이라니? 누구를?”
아뿔싸.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불안함과 분노가 동시에 일렁였다. 마치 그녀가 위험한 덫에 걸린 것처럼.
말려들었다. 에스티아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