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피앙세
에스티아는 메르헨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왔을 때의 상태를 기억한다. 누가 보면 막 사고라도 겪었나 싶을 정도로 안색이 창백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혼비백산으로 찾아온 이유는 단지 대공이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사실 에스티아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눈에는 두 사람은 무척 다정해 보였고 바람이라도 피우지 않는 이상 딱히 사이가 안 좋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메르헨이 과잉 반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더더욱 본인의 불안감이 더 커지기 전에 대공을 만나러 갔을 거라고.
‘근데 안 갔나?’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올랐다. 말로는 푹 자고 다음 날 가라고 했지만 아마 글레멘드 저택을 나선 다음 바로 대공의 저택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영애, 누굴 상담했다는 겁니까.”
대공의 다급한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상념을 방해했다. 이상했다. 메르헨하고 어제 만난 게 잘못도 아닌데 왜 속이 뜨끔뜨끔 한 걸까.
‘아마 이 반응 때문 아닐까.’
누가 대공을 본다면 에스티아가 어디 뱀 굴에라도 들어갔다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만큼 대공은 왠지 모르게 절박해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속을 걱정하기에는 에스티아는 대공의 무시와 경멸에 지쳐 있었다. 만약 바일 저택의 하녀나 시녀 정도에 빙의를 했다면 그가 힘들어할 때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연민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훗날 죽이려고 한, 악녀가 아니었다면.
에스티아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메르헨을 위로해 준 게 죄를 지은 건 아니니까.
“전하의 피앙세를 만났습니다.”
“피앙세?”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셰…… 메르헨을 얘기하는 겁니까?”
“네, 설마 그분이 맞는데요.”
에스티아가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반면에 대공의 표정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둘이 왜 만났습니까?”
“친구니까요.”
“친구?”
대공이 헛웃음을 쳤다.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눈치였다.
“당신과 그 사람이 친구가 된다고요?”
“네, 일상 이야기도 하고, 연애 고민도 들어주고.”
“연애 고민……?”
원래도 도자기처럼 하얀 얼굴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하얗게 질려 가는 게 걱정이 되는 수준이었다.
대공은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이마를 짚었다.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고 대공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반응이 이상했다. 단순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게 아니라 무언가를 진지하게 걱정하는 거 같았다.
‘근데 뭐를?’
에스티아는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제가 메르헨과 만나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일단 1차적인 문제가 있죠.”
대공이 에스티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답했다.
“어떤 문제인데요?”
“그만큼…… 당신이…… 그니까 당신에게서 날 떼어놓고 싶다는 거니까.”
“메르헨에게 사과하고 친절히 대하라고 한 건 당신이에요. 이제 와서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요.”
에스티아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대공이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저는 그저…… 시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내게 마음이 있다는 걸 시험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여전히 날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고요.”
대공이 애절하게 눈을 맞춰 왔다. 반면에 에스티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계속 얘기해 보세요.”
어디 한번 해 보라는 투로 에스티아가 말을 내뱉었다. 자존심 상하라고 일부러 아니꼽게 얘기한 건데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난 그 여자 옆에 있어야 해요. 그 여자를 사랑하는 척해야 하고 그걸 그 사람한테 들키면 안 됩니다. 만약 당신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다는 걸 들키면 당신이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에스티아는 일단 그의 얘기를 계속 들어 보았다.
“근데, 당신이 날 버리려고 하고 라 빅터 오스카와 가까워지려고 하니까, 이제는 도저히 아닌 척 못하겠습니다. 당신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대공은 에스티아가 까치발만 들면 바로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
“무슨 소리냐니까요?”
대공은 대답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한번 눈을 질끈 감더니 다시 눈을 천천히 뜨며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먼저…… 이것만 대답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정말 후작의 말대로 과거의 기억이 없는지. 딱 그 정도만…….”
대공은 곧 부서질 거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웬만한 귀족 남성들보다도 어깨도 널찍한데다가 키도 멀끔해서 어디다 내놓아도 질 거 같지 않은 사람이 지금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그녀의 말 한마디에.
에스티아는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게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환청도 들려오는 거 같았다. 어서, 어서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
결국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거로도 충분히 대답이 되었으리라. 똑바로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린 그녀의 괴로운 표정으로부터, 차마 냉정하지 못한 떨리는 목소리로부터.
“그렇군요.”
그를 증명하듯 대공의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훨씬 차분해졌다. 에스티아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이제 알았을 것이다. 후작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전하가 무엇을 눈치채셨든, 제가 전하를 사랑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예요.”
그래서 에스티아도 피하지 않는 길을 택했다. 이미 들킨 이상 백날 아니라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많이 잃었다 해도 최근에 전하께서 저한테 내뱉었던 그 날카로운 말들은 다 기억하고 있지 않겠어요?”
“압니다. 저는 오만했고, 오스카 후작의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저 그자가 절 도발하여 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싶은 것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상처를 줬습니다. 무례했고, 멍청했습니다.”
“……늦었어요.”
“아니, 아니에요.”
대공이 절박하게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매달려 왔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러자 그녀의 팔을 잡은 대공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에스티아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걸 눈치챈 대공이 숨을 고르며 말을 이었다.
“제발, 다음에 다시 나와 얘기해 준다고 약속해 줘요.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나중에 제대로 약속을 잡고 털어놓고 싶어요.”
“하…….”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전하는 항상…… 뭐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세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쓸데없는 기 싸움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에스티아가 표정을 풀고 다시 대공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래서 제가 위험해진다는 건 무슨 소리예요?”
“지금은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메르헨 셰린포드가 당신을 많이 싫어했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다시 저와 대화를 나눠 주실 겁니까?”
대공의 눈빛에는 슬픔과 희망이 기묘한 조화를 이루며 일렁이고 있었다. 곧 황제를 만나러 가야 하는 터라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헨이 그녀를 많이 ‘싫어했다’라는 점에서 에스티아도 유추할 수 있는 스토리가 있었다.
“네, 그래도 착각하지 마세요. 어디까지나 진실을 알고 싶어서이지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니까. 말도 안 되는 오해는 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네요.”
착각하지 마라. 오해하지 마라. 대공이 자주 하던 말이었다. 에스티아는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네.”
대공은 안심하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니 꿈속에서 자신의 애칭을 부르던 그 소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공 전하, 글레멘드 아가씨.”
그때 궁인이 응접실 문에 노크를 했다. 에스티아가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났다.
“폐하께서 영애를 부르십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에스티아는 대공의 손을 떼어 낸 다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대공은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폐하께서 영애를 부르셨습니다. 지금 알현실로 가시지요.”
“네, 아, 잠깐만.”
궁인을 따라가려던 에스티아가 걸음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대공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전하한테 자세히 얘기를 듣고 나면 저도 마음이 무뎌질까 겁이 나긴 해요.”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는 저와의 관계를 다시 개선하고 싶어 털어놓고 싶다고 하셨죠. 그걸 아니까 더더욱 제가 들어도 될까 고민이 되기도 해요.”
대공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니 제가 준비가 되고, 전하께서도 조금 정리가 되면 그때 제대로 얘기하도록 해요.”
에스티아는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대공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요구를 승낙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희망과 불안함을 동시에 쥔 이를 안에 두고 에스티아는 걸음을 옮겼다.
* * *
메르헨은 자신의 사비를 ‘귀’에 투자했다. 온 사방에 그녀의 귀를 심어 두고 상황을 조용히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상 천문학적인 비용이었다. 아주 고심하고 고심해서 황궁에도 자신의 귀를 심어 두었으니까. 그 결과 그녀는 오늘 그 남자가 자신이 아닌 그 여자를 보러 갔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예상이 맞다면 그 여자는 일단 그를 거절할 테고, 어쩌면 거기에 더 불이 붙은 어리석은 남자가 곧 자신의 저택으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놈의 증명. 말 같지도 않은, 우스운 증명. 정작 누구의 마음이 증명된 걸까?
메르헨은 조용히 자신의 저택의 초인종이 울리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