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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66화 (67/141)

66화 - 지옥을 보여 줄 테니까.

어렸을 적 읽었던 동화에는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이 있었다. 공주님은 왕자님을 사랑하고 왕자님은 공주를 사랑한다. 동화책의 공식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왕자님은 그 사람이었고, 공주님은 자신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동화와는 달리 공주님이 왕자님을 찾으러 간다는 것뿐.

근데 그게 뭐 어때서. 에스티아도 그러는데 왜 그녀는 그러면 안 되겠는가. 어차피 그녀의 시점에서는 에스티아가 사랑을 방해하는 나쁜 용이고 그 사람은 구해야 하는 ‘그녀의’ 왕자님이었다.

왕자님은 모두에게 따뜻하고 친절했지만 공주는 자신을 향하는 눈빛은 더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왕자는 다른 사람보다 공주를 더 자주 만나니까. 더 자주 얘기하니까. 이제 공주가 한쪽 무릎을 꿇고 왕자에게 반지를 바치면 되는 것이다.

-티아!

아버지를 따라 여행을 갔다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나쁜 용을 다정히 부르는 왕자님을.

-에버!

용도 왕자의 애칭을 불렀다.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왕자님을 용이 뭐라고 부른 거지?

-에버하르트…….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그를 향해 뻗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 갔다.

-셰린포드 영애……?

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는 다시 떠올렸다. 에버하르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다는걸. 그 사실이 새삼 끔찍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의원은 여행의 피로가 쌓여서 그런 거 같다고 했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엔 아니었다.

에버는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 훗날 모 귀족의 티 파티에서 만났을 때 괜찮냐고 한마디 물었을 뿐이었다. 다 나았다고 대답을 듣자마자 그의 눈은 바로 그 ‘용’을 쫓았다. 공주가 꼭 물리쳐야 하는 용.

그녀는 용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용은 후원 구석에 있는 연못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듯 손가락으로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지루할 법하지만 오히려 신나 보였던 표정.

설렘이 가득한 표정.

그녀는 그대로 용을 밀어 버렸다. 용은 날 수만 있지 수영은 할 줄 몰랐다. 그리고 연못은 깊었다. 그녀는 누가 볼세라 도망갔다. 그렇게 아무도 못 볼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달리다가 어떤 어깨와 부딪혔을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주저앉은 상태로 고개를 들었다. ‘내’ 왕자님이었다.

하지만 왕자님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와 함께 그는 어딘가로 뛰어갔다. 곧 연못에서 어떤 영애가 빠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영애는 신속한 조치 덕에 무사했다.

왕자가 나쁜 용을 구했다.

메르헨은 그날로 집에 들어가 집 안에 있는 동화책이란 동화책은 다 찢어 버렸다.

바야흐로 동화의 종말이었다.

* * *

시침은 겨우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계속 내려 날씨도 흐린데다가 랜턴까지 다 꺼 놓으니 방 안은 캄캄했다. 메르헨은 의자 위로 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메르헨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5시 10분을 향하고 있었다.

“아가씨.”

러트가 메르헨의 방문을 노크했다. 원래는 러스가 왔어야 했지만 그녀는 얼마 전의 일로 앓아누운 참이었다.

‘나약한 것.’

버러지를 기껏 데리고 왔더니 저 모양이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굶어죽게 놔둘걸. 그녀는 조용히 혀를 찼다.

“들어와.”

러트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요즘 주인 아가씨가 예민한 만큼 러트의 행동거지는 평소보다 조심스러웠다.

“아가씨, 바일 대공 전하가 오셨습니다.”

‘역시 왔네.’

내 왕자님.

메르헨은 여전히 무릎을 안은 채로 말했다.

“이 방으로 안내해 드려.”

“네, 아가씨.”

러트는 메르헨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그의 걸음으로는 현관부터 그녀의 방까지 5분 20초 정도가 걸렸다. 메르헨은 혀로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4분 59초…… 5분 1초…… 5분 9초…… 5분 15초…….

5분 20초.

“아가씨.”

똑똑. 러트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메르헨은 눈을 감은 채 씨익 웃었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약간은 숨에 찬 듯한 음성이었다. 아마 그의 보폭을 따라잡는 게 꽤 벅차서 그럴 것이다.

“들어와.”

메르헨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너른 품으로 가 안겼다.

“에버, 왔어요?”

메르헨이 에버하르트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인사를 건넸다.

“네,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잠시 메르헨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평소와 달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본론부터 얘기한다. 예상대로이긴 했지만 역시 화가 나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나 보고 싶었다고요?”

“예, ‘보고’ 싶어서 왔죠.”

에버하르트가 특정 단어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메르헨이 그를 안던 팔을 풀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에버? 표정이 안 좋아요.”

“왜 안 좋은지는 알지 않습니까, 당신은?”

그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메르헨은 그 눈빛의 의미가 가식은 집어치우고 얘기하자는 뜻이라는 바로 알아챘다.

“최근에 나랑 자주 못 만나서 그런 거잖아요, 나의 에버.”

하지만 그녀는 그를 약 올리고 싶었다. 순순히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주긴 싫었다.

“말 돌리지 마요. 당신은 항상 내가 그날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잖아요. 아마 내가 곧 올 거라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겠죠. 아닙니까? 지난번 에스티아가 타던 마차에 그런 짓을 한 건도 당신 아니면 그 남자겠죠.”

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당신은 에스티아가 조금이라도 불행하거나 망가지길 바라고, 그건 오스카 후작도 마찬가지니까. 아닙니까? 마차에는 흑마법이 걸려 있었고 당신은 오스카 후작저에 간 적이 있죠. 아닙니까?”

“에버가 나한테 관심이 많네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도 미칠 거 같았는데, 에스티아를 찾아갔어요? 에스티아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내 입술에 입 맞춰 주면 알려 줄게요.”

메르헨이 사근사근 웃으며 그에게 팔을 뻗었다. 에버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장난치지 마요. 난 지금 매우 절박하니까.”

“나도 절박해요. 당신이 나보다 절박할까?”

메르헨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까 대답해 봐요. 응접실에서 뭐 했어요? 둘이 입이라도 맞췄나? 아니면 설마 입에도 담지 못할 상스러운 짓이라도 했나요? 아, 아닌가. 하기야 그건 그 여자 집에 죽치고 있으면서 많이 하셨겠다. 나, 몰래.”

메르헨이 까르르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때요? 에스티아 입술은 여전히 부드럽던가요? 다른 곳은요? 에스티아가 남자 경험이 없어서 괜찮았을지 모르겠네. 아, 아닌가, 그 후작이랑 많이 했겠네!”

“메르헨 셰린포드!”

에버하르트가 분노에 차 소리 쳤다. 그의 눈빛은 바로 그녀를 베어 버릴 것처럼 살기가 가득했다. 메르헨은 아랑곳하지 않고 싱긋 웃었다.

“정말 원래대로 돌아왔네. 에스티아가 오스카 후작하고 같이 있는 것만 해도 발작했잖아요. 왜, 둘이 붙어 있는 걸 보니까 배알이 꼴려요?”

“하…….”

대공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었다.

“들어 보니까 후원받으러 오스카 후작저에 갔었대요. 거기서 둘이 뭘 했을까?”

“제발!”

에버하르트가 결국 참지 못하고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만…… 그만 말해요. 애초에 혼자 갔을 리도 없지만 그 사람 이야기를 당신 입에서 듣고 싶진 않습니다.”

그는 거의 전쟁에서 적을 물리칠 때만큼 필사적이었다. 메르헨이 입가에 있던 미소를 지웠다.

“왜? 2년 동안은 에스티아가 어떤 남자랑 뒹굴든지 상관없다는 식으로 굴었잖아. 아, 아니다. 그런 척했던 건가?”

메르헨이 대공 바로 아래에 서서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경멸과 혐오로 일그러졌다.

“뭐가 문제에요, 에버? 지금껏 잘해 왔잖아요. 왜 갑자기 무너지냐고. 에스티아가 밉다면서. 그래서 내 옆에 있겠다면서. 날 만나 치유되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난 줄곧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당신이 날 인형 취급해서 그렇지. 당신 옆에 있겠다는 말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었다고.”

인형. 그 뒤의 말을 제쳐 둔 메르헨이 ‘인형’이라는 단어를 조용히 곱씹었다.

“그럼 계속 인형으로 살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야. 당신이 인형으로 살아 주는 대신 나도 인형으로 살겠다고 했잖아. 이러면 내가 그냥 못 있지.”

메르헨이 에버하르트의 어깨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그는 그 손을 벌레 보듯 쳐다보았다.

“공주는 왕자를 갖기 위해서는 뭐든지, 해요. 악마에게 영혼을 바치든 목숨을 담보로 흑마법을 부리든, 뭐든지 한다고.”

메르헨이 다시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공주한테 헌신하세요, 나의 왕자님. 멍청한 용한테 현혹되지 말고.”

“당신 말대로라면, 내 인생에 공주는 없나 봅니다. 영혼을 바치고 싶은 용만 있을 뿐.”

“…….”

에버하르트의 말에 메르헨의 표정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앞으로 당신을 보러 오지 않을 겁니다. 연극은 끝났어요. 이 말 하러 온 겁니다.”

“……거의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메르헨의 입가가 덜덜 떨렸다. 어이가 없었다.

“에스티아가…… 정말 날 버리려고 하고 있어요. 도저히 그 엿 같은 연기 못 하겠습니다.”

메르헨의 눈에 여전히 사랑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소년이 보였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에스티아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렇게 당당할까? 전처럼 에스티아가 말에 떨어지거나 어디에서 심하게 넘어져서 다치거나, 그런 걸 바라는 걸까요?”

“미쳤어, 당신……. 그러기만 해 봐. 지옥이 뭔지 보여 줄 테니까.”

메르헨이 풋 하고 웃었다. 그동안 에스티아를 무시하고 경멸하는 척했지만 사실 그 모두가 애정을 기반에 둔 애증이었을 뿐이라는걸. 진짜 혐오는 바로 지금 자신을 향한 이 눈빛이 드러내고 있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메르헨은 그를 짓이겨 놓아서라도 곁에 두고 싶었기에 그 생각을 잠시 미뤄 두었다.

“에버, 진심 아니죠?”

진심이 아니지 않냐니. 그녀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진심입니다. 혹시라도 누가 ‘건들지’ 못하게 내가 곁에 있을 겁니다.”

그의 단호한 음성이 메르헨이 가슴을 후벼 팠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날카로운 날을 품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미쳤네, 미쳤네, 에버하르트.

“그럼, 좋은 저녁 보내세요.”

에버하르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문이 닫혔다.

메르헨은 한동안 그대로 같은 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문으로 향한 채였다.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동화는 어디까지나 동화였고,

왕자는 공주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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