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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67화 (68/141)

67화 - 날 여기서 꺼내 줘

에스티아는 스퀘일러에게 특강을 받아 황제와 대신들 앞에서도 능숙하게 설명했다. 그들은 사사건건 에스티아를 헐뜯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이런 상황에 익숙했다.

전생에서는 더 높은 분들이 그래도 견뎠는데 지금은 못 견딜 게 뭐란 말인가. 에스티아는 말 한 번 더듬지 않은 상태로 브리핑을 끝냈고 그들은 결국 상단주 스퀘일러를 궁으로 초청하는 데 동의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전생에서 자신이 이룬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에스티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애. 덕분에 약초 관련 부서를 만드는 게 수월할 거 같군요.”

알현실에서 에스티아와 마주 보고 앉은 레이븐이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폐하께 감사한걸요. 상단주님을 궁으로 부르기로 결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별로 한 것도 없습니다. 대신들이 반대했다면 강행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레이븐이 겸손한 자세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왠지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원작에서는 그가 에스티아 처형에 동의를 했을지라도.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올바른 정책을 펼치는 게 정치이죠. 잘못하고 계신 게 아닙니다.”

그 말에 레이븐의 눈빛에 의아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맴돌았다.

“가끔 영애께서는 모든 걸 다 알고 계시는 거 같습니다.”

뜨끔. 누가 황제 아니랄까 봐. 어떻게 안 거지?

에스티아는 당황하지 않은 척 싱긋 웃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도 앞으로 공부할 게 많은걸요.”

“그럼 제가 영애한테 많이 배워야겠군요.”

넓은 알현실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나저나…….”

레이븐이 부드러운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왠지 분위기가 진지해질 거 같다고 느낀 에스티아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까 응접실에서 대공을 만나셨다지요.”

“네.”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두 분이서 얘기는 잘 나누셨습니까?”

“다행히, 그랬습니다.”

원작에서 나온 것보다 대공과 레이븐의 사이가 좋다는 걸 알게 된 에스티아는 솔직하게 답하는 걸 택했다.

“궁은 참 소식이 빠릅니다. 소문에 무심한 대공이 영애를 바로 찾아갔을 정도면요.”

“그 말씀은, 폐하께서 의도하신 게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무례할 수도 있지만 에스티아는 자신이 궁금한 걸 직접적으로 물어보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레이븐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닙니다. 영애한테는 미안하지만 대공이 부탁했다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저를 통 찾아오질 않아서…….”

레이븐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그 모습이 시무룩해진 레트리버를 보는 느낌이라 에스티아는 마음이 풀어질 뻔했다.

“혹시 몸이 안 좋으셔서 그런 건 아닐까요?”

에스티아는 지난번 창고에서의 밤을 떠올리며 물었다. 천연덕스러웠던 그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몸이 안 좋다는 말씀은?”

“말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기사단장이라고 하셔도 몸이 안 좋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

레이븐이 에스티아의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레이븐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그 사람은 몸이 안 좋아도 와야 할 거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올 사람입니다. 되게 융통성 없는 사람이거든요.”

그건 맞지.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븐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영애께서 이리 걱정하실 정도면 그 사람이 티를 내도 엄청 티를 냈나 보군요. 그렇죠?”

“…….”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시선을 피했다. 그런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는데 그렇게 보였나 싶어 에스티아는 괜히 뻘쭘해졌다.

“그래서 어디가 안 좋으신 건가요?”

결국 에스티아가 참지 못하고 레이븐에게 물었다. 레이븐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건 제가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다만…….”

에스티아가 포기하듯이 시선을 내리깔려는 그때, 레이븐이 다시 말을 이었다.

“죽을병은 아닙니다. 불치병도 아니고요. 대공이 마음만 먹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인데 그러지 못해서 결국 다시 도진 거죠.”

“저 때문인가요?”

에스티아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운 기색을 띠었다. 레이븐이 그녀를 달래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영애 때문이 아닙니다. 영애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라서 그렇게 얘기한 건 아니었어요. 다만 너무 바보 같은 사람이라 답답해서 영애한테 넋두리를 한 거 같습니다.”

후. 에스티아가 답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진짜 바보 같은 남자이긴 하다. 이렇게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걸 보면.

“그럼 전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예, 영애. 살펴 가세요.”

레이븐은 친히 알현실 입구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그에게 다시 인사를 하고 알현실을 나온 에스티아는 그 앞을 기다리고 있는 이안과 만났다.

“오래 기다렸어?”

에스티아가 반갑게 묻자 이안은 다정하지만 왠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부기사단장님한테 한참 붙잡혀 있다가 이제 막 온 참이었습니다. 그…… 대공 전하와 별일은 없었습니까?”

다른 궁인이 들을까 이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괜찮아. 걱정할 거 하나 없어.”

에스티아가 밝게 얘기했지만 이안은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안, 이왕 황궁에 온 김에…….”

에스티아가 궁인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이안에게 말을 건넸다.

“집으로 가는 길에 들를 데가 있어.”

“들를 데요?”

이안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향해 에스티아가 싱긋 웃음을 지었다.

* * *

마차는 허름한 창고 앞에 멈췄다. 에스티아는 이안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비가 아까보다 많이 내리고 있었다.

“아가씨…… 여기는 뭔가요……?”

이안이 잔뜩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그 모습이 잔뜩 날이 서 있는 미어캣을 보는 느낌이라 에스티아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꽃 창고야, 꽃 창고.”

혹시라도 못 들을까 싶어서 에스티아는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자 도리어 이안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꽃 창고라고요? 그냥 창고도 이것보다 깨끗하겠는데요……. 아니, 애초에 이곳은 왜 오신 건가요?”

확실히 창고는 지저분했다. 창고 청소를 한다더니 오히려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가 여기저기에 쌓여 있었고 그를 떼 탄 하얀 천이 무질서하게 덮고 있었다.

“지난번에 대공 전하께서 마력이 깃든 꽃이 내 어깨에 붙어 있다고 하셨잖아. 아무래도 이 창고에서 붙은 거 같아서.”

그제야 이안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에스티아는 뭔가 꺼림칙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뭐라도 알아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오긴 했지만 이번에도 사람이 없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근데 사람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뭐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에스티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조금씩 북을 울리는 것처럼 점점 크게.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에스티아는 자신의 키만큼 쌓아 올려진 상자 더미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하얀 천을 잡아당겼다. 다시 한번 꽃을 자세히 보고 싶었다.

천이 떨어지면서 썩은 꽃송이 몇 개가 툭 떨어졌다. 그걸 주우려던 에스티아가 동작을 뚝 멈췄다. 당연히 꽃이라고 생각했던 물건이 움찔 움직였다.

“으악!”

에스티아는 뒤로 자빠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검은 뭉치도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어디론가 빠르게 도망갔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ㅈ……쥐…….”

에스티아가 몸을 덜덜 떨며 이안의 팔을 붙잡았다.

“쥐…… 쥐가 있어…… 으아!”

에스티아가 벌떡 일어났다. 스스슥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펄쩍 뛰어 이안에게 안겼다. 에스티아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쥐가 있어…….”

에스티아가 울먹거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이안은 에스티아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연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지? 원래 이렇게 쥐를 무서워하셨나?’

이안은 의문에 휩싸였지만 일단 에스티아의 안정이 우선이었기에 그녀를 안아 들었다.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귓가에 자꾸 소리가 파고들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쥐의 소리를. 그건 머릿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튀어나와 에스티아의 현재 의식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찍찍. 찍찍찍.

-오지 마.

찍찍찍.

-오지 말라니까!

그리고 절규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덜덜 떨었다. 쥐들은 온몸이 더러워진 그녀에게 계속 다가왔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붉은 눈을 번뜩이면서.

마음만 같아서는 벽이라도 기어오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럴 힘도 없었고 어차피 두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쥐들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힘만 빠지다면 언제든 먹어 치울 수 있는 먹잇감이라는걸.

-살려 줘…… 날 여기서 꺼내 줘…….

에스티아가 두 무릎을 끌어안고 서럽게 울었다.

-날 꺼내 줘.

쥐들이 다가왔다. 찍찍. 아랫입술을 깨문 입에서 울음과 함께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에버하르트…….

에버하르트. 에스티아의 팔에 힘이 빠졌다. 쥐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고,

에스티아는 이안의 품에서 의식을 잃었다.

* * *

다행히 에스티아는 금방 의식을 차렸다. 다만 다시 한번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에스티아가 벌써 며칠 사이에 의식을 서너 번은 잃은 셈이었다. 메리는 거의 기절할 것처럼 안색이 하얘졌고 카린은 왜 몸을 챙기지 않으시냐고 펄쩍 뛰었다. 이안도 자꾸 이렇게 쓰러지시면 문을 잠가 버릴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덕분에 에스티아는 아주 난감한 상황에 놓여 버렸다. 분명 상단에서 잔뜩 편지가 왔을 텐데 이들이 무리하면 안 된다고 편지들을 숨겨 놓고 보여 주질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스티아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생떼를 부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메리에게 만약 편지들을 보여 주지 않으면 창문으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했다. 메리는 마음이 여렸고 순수했다. 그녀는 이 사실을 곧바로 이안에게 보고했고 이안은 목덜미를 잡으며 그녀를 찾아왔다.

“저희가 다 혈압이 올라서 쓰러져야 아가씨께서 속이 풀리시겠습니까?”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쉬기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면 더 안 나을 거 같아서 그래. 편지만 볼게. 편지만.”

일단은. 에스티아는 빙긋 웃으며 뒷말은 삼켰다.

이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편지 뭉치를 건넸다. 누가 보냈는지 쭉 보던 에스티아는 어떤 편지 앞에 뚝 멈췄다.

‘라 빅터 오스카’

후작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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