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 간절히 원하던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이 요구했던 걸 명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상단에 후원하는 대신 그의 마력이 봉인된 꽃을 찾아 줄 것. 상단이 꼭 귀족의 후원을 받을 필요는 없었지만 에스티아는 오스카에게 접근할 명목으로 후원을 요구했고, 그는 거래를 승낙했다.
이 편지는 아마 그 거래에 관한 내용일 것이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편지 봉투를 뜯고 편지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글레멘드 영애에게.
요즘 잘 지내시나요.
계속 비가 오는 탓에 날씨가 많이 선선하니 몸을 각별히 챙기셔야겠습니다.
제가 편지를 쓴 이유는 아마 예상하셨다시피, 꽃을 찾아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카로드산에 제가 찾고 있는 꽃이 있는 거 같습니다. 아쉽게 놓쳐서 찾지는 못했습니다만, 전에 영애께서 산에서 발견한 ‘펄 브릴리안트’ 같습니다. 이 꽃은 안 그래도 찾기 힘든데 제 마력까지 깃들면서 종종 거처를 옮기는 거 같습니다. 참 어이없고 신기할 노릇이죠.
영애께서 한 번 같은 종의 꽃을 보았으니 혹시 카로드산에 가시거든 꽃을 찾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혹시 지원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라 빅터 오스카’
카로드산. 만약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베리아 백작 가문의 영지에 있는 산이었다. 그리고 그 가문의 백작 영애인 체스넛 베리아가 메르헨 셰린포드의 친구였다. 귀족 계보를 달달 외운 결과 베리아 가문의 가계도가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펼쳐졌다.
에스티아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 또한 오스카 후작이 의도한 거 같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면 어느 정도는 속아 넘어가 줘야 했다.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며 다음 편지지에 시선을 돌렸다. 에스티아의 손이 다시금 멈칫했다. 방금 편지는 오스카 후작이더니 이번에는 바일 대공의 편지였다.
“이거 언제 온 거야?”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들어 보였다.
“아까 전령이 급하게 주고 간 편지입니다.”
“근데 왜 바로 안 줬어?”
딱히 나무라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이안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저에게 중요한 건 아가씨 건강이 먼저지, 대공 전하의 사정이 아니니까요.”
“이안.”
아무래도 그 오만한 대공 전하가 이안에게 제대로 찍힌 모양이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급하게 인장을 찍은 듯한 편지를 뜯었다. 대공의 편지는 오스카 후작과는 달리 아주 간결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 영애에게. 지금 만나러 가도 되겠습니까? -에버하르트 바일’
에버하르트 바일.
아까 창고에서 에스티아도 그 이름을 간절히 불렀더랬다. 어딘가에 갇힌 채로.
이 시점에서는 ‘아직’은 에스티아가 감옥에 갇힐 만한 일이 없었다. 에스티아가 메르헨을 죽이려다 발각되어 감옥에 갇힌 시기는 초겨울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기억은 뭘까. 만약 에스티아에게 동화되어 그를 사랑하게 되면 그렇게 될 거라고 운명이 경고하고 있는 걸까?
에스티아는 가슴에 손을 올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원래 에스티아가 남기고 간 잔상은 지금 그녀에게 큰 공포감을 심어 주었다. 공포감은 자연스레 ‘진짜’가 갖고 있는 그리움을 불러왔다.
화가 났다. 이게 자신의 진실한 마음이 아닌데 왜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억울했고 스스로가 한심스럽기도 했다.
에스티아가 아래 입술을 깨문 채로 그 편지를 치워 버렸다. 그러고는 편지지를 꺼내 글씨를 휘갈겼다. 그런 에스티아를 이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대충 편지지를 접고는 이안에게 건넸다.
“메르헨에게 전달해 줘. 날 도와주실 게 있거든.”
원래 더 보고 싶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었다.
하물며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 바일을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버하르트 바일은,
에스티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 * *
쓰러졌던 탓에 어제는 푹 쉰 에스티아가 가만히 빗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달달한 차가 그녀의 혀끝을 감쌌다. 아직은 오전 10시인 이른 시간.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올 거라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마차는 그녀의 예상보다 빠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에스티아는 급한 걸음으로 카페로 다가오는 대공을 창밖 너머로 바라보았다.
원래는 대공이 아닌 메르헨을 만나려고 했다. 체스넛 영애를 만나 카로드산에 들어가도 되냐고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메르헨은 체스넛과 친하니 그녀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메르헨과 함께 와서 그녀가 자신을 보증해 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르헨은 몸이 안 좋다며 그 부탁을 거절했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대신 대공 전하께 제가 대신 부탁했어요. 에스티와 같이 가 달라고.’
에스티아는 잠시 그 편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메르헨이 사실 좋은 사람이 아니고 에스티아가 대공과 가까워질까 그녀를 위협했다면, 지금 메르헨의 행동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다만 에스티아는 메르헨이 자신을 시험해 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방식으로 메르헨을 안심시켜 주면 될 일이다. 자신은 대공에게 마음이 없노라, 하는.
이곳은 전에 레이븐과 잠행할 때 만나는 장소로 정했던 카페였다. 레이븐은 이 카페를 언제든지 그녀가 사용할 수 있도록 제공했고 에스티아는 이 장소를 오늘 대공과의 만남 장소로 정했다. 어차피 대공과 약초 관련 일로 만나야 한다면 다른 사람보다는 황제의 귀에 들어가는 게 낫다는 판단하에 정한 거였다.
딸랑.
문에 달린 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지만 에스티아는 일부러 그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 일은 대공이 안 도와줘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글레멘드…… 영애.”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다른 말로 그녀를 부르고 싶었지만 애써 참은 듯했다. 에스티아가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어요, 대공 전하.”
에스티아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고 짙은 회색 정장을 차려 입은 대공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에 자주 보던 멀끔한 모습이었지만 안색은 지난번 창고에서 봤을 때처럼 창백했다. 그새 또 안색이 안 좋아진 모습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몸이 안 좋으신 거 아닌가요?”
“아뇨, 아닙니다.”
대공이 바로 부정했다. 이런 고분고분한 태도라니. 에스티아는 아직도 대공의 이 태도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습니다, 저는. 근데 영애는 왜…….”
대공의 손이 조금씩 올라오더니 에스티아의 얼굴 근처에 멈추었다. 그러다 자신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했는지 곧 다시 손을 내렸다. 에스티아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했다.
“왜 안색이 안 좋으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에스티아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왠지 대공의 걱정이 가득한 눈을 보기가 싫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대답하려던 에스티아는 마음속에 묘한 심술이 돋아나는 걸 느꼈다. 대공을 더 걱정시키고 더 불안하게 만들고 싶었다.
“쓰러졌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역시나 대공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스티아는 비소가 나오려고 하는 걸 겨우 참았다.
“말 그대로입니다. 요즘 정신적으로 절 몰아붙이는 게 많다 보니 기력이 많이 쇠했나 봅니다. 안 좋은 기억도 막 떠오르고, 그렇더라고요.”
“…….”
생각나는 게 많은지 대공은 그녀의 예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스티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하필 오늘 전하와 만나야 한다는 게 좀 그러네요. 메르헨에게는 잘 말해 두긴 했지만 전하께서 잘 달래 주세요. 혹시나, 전하의 피앙세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피앙세라는 말.”
대공이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옅은 녹색 눈동자에는 어두운 무언가가 넘실거렸다. 에스티아는 그것이 곧 ‘혐오’라는 걸 깨달았다. 다만 누군가를 향한 혐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 말, 안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럼 전하의 연인이라고 말씀드릴까요.”
“에스티아.”
대공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고는 헙 하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잘게 흔들렸다.
“……아니, 글레멘드 영애. 그 사람은 제 약혼녀가 아닙니다.”
‘연인은요?’라고 물으려던 에스티아는 그 말을 삼켰다. 왠지 그렇게 물으면 진짜 그녀의 마음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에스티아가 혼란스러움을 감춘 채로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았다.
“설령 약혼녀가 아닐지라도 약혼녀가 될 사람이잖아요.”
“아니라면요.”
‘하, 정말.’
에스티아는 이 상황이 정말 짜증스러웠다. 틈만 나면 훅훅 치고 오는 대공이나 그런 그에 반응하는 원래 에스티아의 마음이나.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희망이 에스티아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에스티아는 그 희망에 휩쓸리기 싫었다. 보나 마나 자신에게 집착하던 여자가 마음을 접으려고 하니 괜히 저러는 것일 거다. 혹시 아는가. 메르헨과 지독한 사랑싸움을 해서 지금 그녀에게 이러는 걸지.
“그건 제가 상관할 바 아니죠. 전하와 메르헨 영애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지.”
“여기에 그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에스티아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이 말을 몇 번 드리는 건지 모르겠지만 전하의 약혼을 얘기하는데 왜 메르헨이 상관이 없나요. 전 전하가 누구하고 약혼하든 관심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는 관심 있거든요.”
“네? 도대체 뭐에…….”
그 말을 하면서 에스티아는 후회했다. 대공이 무슨 말을 할지 대강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공은 그녀의 예상대로 말을 뱉었다.
“저는 영애가 어떤 영식과 얽히는지, 어떤 가주와 친분이 있는지 굉장히 관심이 많거든요. 오늘은 사실 영애의 도움이나 이야기 때문에 온 건 핑계고, 그저 영애가 후작과 만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 왔습니다.”
이게 뭔. 에스티아는 대공의 지나치게 솔직한 고백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제가 상당히 당혹스럽다는 건 아시죠?”
“예, 압니다.”
대공은 무슨 기계처럼 바로 딱딱 대답을 내뱉었다.
“저는 이기적입니다. 제 불안함을 해소하지 않으면…… 견디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영애가 제 눈앞에 있었으면 하고 계속 바라게 됩니다.”
영애가 오시진 않을 테니, 제가 가야죠.
대공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리는 듯했다.
에스티아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에스티아 글레멘드’가 간절히 원하던 말이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