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 표현
에스티아는 자신의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만큼 대공은 언제 도도하게 굴었냐는 듯이 에스아에게 계속 질문을 쏟아부었다. “예전에 저와 어떤 사이였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부터 시작해서 “국립공원에 저와 갔었던 거 기억이 납니까.” 혹은 “그때 영애가 저한테 뛰어오다가 넘어져서 울었던 거는요?” 등등.
에스티아는 모든 질문에 “글쎄요.”로 일관했지만 대공은 지치지도 않고 계속 이것저것 물어 왔다. 베리아 백작가는 카페에서 멀지 않았지만 이 사람과 같이 가니 가는 길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대공과의 대화(?) 내내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역시 다 기억이 안 나시나 보네요.”
묘하게 신난 투였다. 에스티아는 그 태도가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무슨 자격으로 저렇게 신이 난단 말인가.
“그냥 전하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싫어서 그렇습니다.”
에스티아가 결국 딱딱하게 답변했다. 대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티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적인 대화가 싫다면 공적인 대화를 나눌까요? 그건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하고 공적으로 무슨 할 얘기가 있는데요?”
무슨 참새하고 대화 나누는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대공은 시도 때도 없이 짹짹거렸다.
“드디어 저한테 질문을 하시네요. 공적으로 얘기할 거야 많죠. 후원부터 시작해서.”
윽. 이렇게 또 찔러온다. 에스티아는 무슨 뿅망치 같은 거라도 들고 대공의 머리를 한 대 세게 치고 싶었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답답했다. 차라리 대공이 비꼬던 때는 ‘절 좋아하시냐’, ‘왜 오해하게 만드시냐.’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격할 거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했다가는 휘말리기 십상이었다. 이상했다. 대공이 확실하게 입장을 정리하면 오히려 자신에게 유리해질 줄 알았더니 반대로 궁지에 몰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 혼자 갈까요?”
에스티아가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대공은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냥…… 저 혼자 가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왜요? 저랑 가는 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스티아는 과거의 자신에게 꿀밤 한 대라도 먹여 주고 싶었다. 빨리 오스카 후작에 대해 알아내고 싶기도 했고 동시에 자꾸 대공을 찾는 ‘에스티아’의 마음을 알고 싶었다. 어느 정도로 중증인지 궁금했다.
아니, 사실 이 모든 게 다 핑계고 ‘진짜 그녀’의 마음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한시라도 빨리 보지 않으면 불안하다는 듯 쿵쿵 뛰어 댔기 때문이다. 마치 이 남자를 놓지 말라고 ‘그녀’가 간절히 외치는 것처럼.
“내가 전하하고 가까워질수록 제가 위험해진다고 전하의 입으로 말씀하셨어요. 메르헨이 절 싫어했다고.”
“……그랬죠.”
“근데 그 메르헨이 당신하고 절 동행시켰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떠보려고 한 거겠죠.”
“그런데 왜…….”
이유를 알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는 묻고 싶었다. 어쩌면 ‘진짜 에스티아’가 듣고 싶은 말을 그가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럴 때 아니면 같이 마차 탈 일도 없으니까.”
“하…….”
에스티아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자주 이런 생각을 해요. 전하께서 솔직하셨으면 우리가 조금 더 빨리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생각이요. 그렇다면 저도 과거의 기억을 찾고 싶었을지도 모르죠.”
시선을 내린 대공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 제 오기였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떻게 영애를 제가 함부로 보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인데.”
“제가 왜 무서워요. 저를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셨으면서.”
에스티아의 말끝에 깊은 씁쓸함이 맺혔다. 그걸 눈치챈 대공의 눈빛도 어두워졌다.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했죠.”
“그 두 개가 뭐가 다른가요?”
에스티아가 비웃음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그런 에스티아를 대공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마음이 없는 존재를 미워하진 않죠.”
“……?”
“보통 그런 건 싫어한다고 표현하죠.”
“……?”
에스티아는 대놓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대공이 희미하게 웃었다.
“비가 오는 날씨를 싫다고 표현하지, 미워한다고 표현하진 않잖아요.”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조용히 울렸다. 다닥다닥. 마차가 몇 번 덜커덩거리는 소리 속에서 대공의 목소리는 그 사이로 스며드는 은은한 향기 같았다.
“전 비 오는 걸 싫어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도, 돈 밝히는 사람도 싫어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미워하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었어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말은 혀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대공은 여전히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미워했을 뿐입니다.”
“좀…….”
에스티아 입술 사이로 위태롭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 말 좀 하지 마요. 듣기 싫으니까.”
“해야겠어요. 당신의 마음을 떠올리게 해야겠으니까.”
환장하겠네.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로서는 화를 누르기 위해 한 거였는데 반대로 대공의 마음에 미묘한 불씨를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두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안 보기라도 하면 좀 나을 텐데 그 붉은 곡선에서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한 가지 방법을 택했다. 그녀의 화를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방법을.
“영애 마음대로 하세요.”
“네?”
이번에는 또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에스티아가 노려보자 대공은 황급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제가 영애한테 상처를 준 만큼 영애한테도 그런 기회를 주겠다는 말입니다.”
“기회를 주겠다…….”
그 말이 묘하게 마음에 든 듯 에스티아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대공은 ‘이거다’ 싶어서 의욕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네, 언제든지 저를 부르실 수 있고…… 조금이라도 절 괴롭게 만드실 수 있는 방법이면 뭐든…… 그게 뭐든.”
“그게 무슨…….”
에스티아는 애써 어이없는 척했지만 그간 상처받은 마음은 치유하고 싶었다. 그리고 궁금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갈망하고 있는지.
“그럼 절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지금 표현해 주세요. 제가 전하한테 상처를 꽤 많이 받았거든요.”
과거 그가 에스티아와 무슨 일이 있었든, 현재 그녀가 그한테서 받은 상처도 컸다.
그래서 한 말이었다. 죄송하다고 수백 번을 말하든, 입에 발린 칭찬을 하든 뭐라도 그가 전과 달리 굽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대공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잔디를 담은 녹색 눈동자와 오뚝한 코, 하얀 도화지에 수려하게 그려진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닿을 듯한 매끄러운 턱선까지.
“해도 됩니까?”
순종적인 얼굴에 에스티아는 잠시 당황했다. 역시 이런 모습은 영 낯설었다.
‘만약 당신이 진작 에스티아에게 이랬더라면 미래가 달라졌을까.’
“해 보세요.”
그를 용서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서할 수 없어서 비겁한 수를 쓰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촉감이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대공은 처음에는 사랑에 서툰 소년처럼, 이제 막 사탕을 입에 머금은 아이처럼 조심히 움직였다. 아랫입술을 머금다가도 녹는 아이스크림을 핥는 아이처럼 윗입술을 핥기도 했다. 에스티아는 조용히 대공의 입술을 느끼며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전에 마차에서 입맞춤을 나눌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때는 서로에게 화가 나서 끝까지 몰아붙이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적선하듯 내민 손길에 애절하게 매달리는 느낌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바닷물을 마시는 것처럼 갈증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그녀의 입술에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대공은 에스티아가 틈을 내줄 때까지 계속 그녀의 입술을 핥고 머금었다. 그는 점점 이성의 끈이 팽팽해지는 걸 느꼈지만 그때처럼 자신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그녀가 틈을 주지 않으니.
그래서 그는 모이를 쪼아 먹는 새처럼 그녀의 입술에 연속적으로 입술을 비볐다. 쪽쪽. 간지러운 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자극했다.
“응…….”
자신의 입에서 야릇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그 소리를 삼킬 수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안심이 되는 게 아니라 더 애가 탔다.
잠깐 잠깐 눈을 뜰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여유로운 표정도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차는 흔들렸지만 그는 온몸에 힘을 주고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에스티아는 알 수 있었다. 대공이 지금 조급하다는걸. 혹여라도 완전히 휩쓸릴까 입을 닫고 있던 에스티아는 베리아 저택이 보이자 그제야 입술을 벌렸다. 그 사이로 대공이 다급하게 비집고 들어왔다.
대공의 혀가 에스티아의 붉은 혀를 조심스럽게 감고 쓸고 휘감기를 반복했다. 떨리는 입술로 에스티아의 혀를 머금고는 당기기도 하고 다시 촉감을 잊을까 겁내는 것처럼 다시 에스티아의 윗입술을 핥기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그녀의 입술 안으로 침범했다.
“……티아.”
그가 신음을 내뱉듯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역시 꿈에서 나왔던 것처럼 대공은 그녀를 애칭으로 불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갈망하는 건 무척이나 유혹적이라고. 마음속에 온전히 들이진 않더라도 조금은 그걸 누리고 싶어진다고.
에스티아는 눈을 살며시 떴다. 그녀의 눈에 먼저 대공의 녹색 눈동자가, 그 다음으로는 코앞으로 다가온 베리아 가의 저택이 눈에 보였다.
“……그만.”
에스티아가 헉헉 숨을 고르며 그를 밀어냈다.
대공이 미련 가득한 표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 사이를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