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그녀의 약혼자
에스티아는 베리아 가문의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응접실로 가고 있었다. 베리아 가문에 대공과 함께 올 것이라 미리 일러두었지만 사용인들은 막상 두 사람이 진짜로 함께 오자 놀란 기색이었다. 이제 그런 시선에 익숙해진 에스티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사용인의 뒤를 따랐다.
반면에 대공은 여전히 얼빠진 표정이었다. 에스티아가 보기에 영혼이 어디 먼 데 가 있는 거 같았다. 어차피 메르헨의 뜻을 대신 전해 달라고 부른 거였기 때문에 그 전에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든 말든 에스티아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체스넛 아가씨, 바일 대공 전하와 글레멘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 말과 함께 두 사용인이 양쪽에서 널찍한 문을 열었다.
응접실은 전체적으로 베이지 계열에 편안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체스넛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일어나 치마 양끝을 잡고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바일 대공 전하, 글레멘드 영애.”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리아 영애.”
에스티아도 따라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대공도 인사를 하긴 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설마 아직 마차 안에서의 일을 생각하고 있나 싶어 에스티아는 민망하기도 했고 통쾌하기도 했다.
체스넛은 손님용 소파를 두 손으로 공손하게 가리켰다.
“앉으세요. 두 분 다 먼 길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야말로 감사합니다, 영애.”
에스티아는 왠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양해를 구하긴 해야 했지만 실제로 체스넛 영애를 만나니 더 좋았다.
메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체스넛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녀가 사과한 뒤로 체스넛은 과거 일은 잊은 듯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고 한다.
에스티아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사무적이었지만 공손했고, 딱딱한 듯했지만 가식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에스티아와 안 좋은 일까지 있었으면 충분히 싫은 티를 낼 수 있음에도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사용인에게 겉옷을 내밀기 직전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소소한 종이 포장지로 포장한 선물이었다.
“너무 소박한 선물이지만 그래도 영애에게 주고 싶어 가져왔어요.”
에스티아가 볼을 붉히며 체스넛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어머, 안 그러셔도 되는데…….”
체스넛은 당황한 듯했지만 선물이 싫지는 않은 듯 바로 몸을 일으켜 선물을 건네받았다.
“제가 요즘 많이 사용하는 향초에요. 악몽을 꾸었을 때나 잠이 잘 안 올 때 피우면 좋더라고요.”
실제로 에스티아가 요즘 애용하는 향초였다. 메르헨에게 줬던 향초는 과거에 에스티아가 종종 사용하고 했다던 향초를 준 것이지만, 이번 향초는 진짜로 그녀가 좋아하는 향초였다. 과한 선물은 가식적일 거 같고 그렇다고 너무 소소한 것을 주자니 마음이 안 좋아서, 고심 끝에 고른 선물이었다.
체스넛이 조심스럽게 밀봉하고 있는 리본을 풀고 선물에 살짝 코끝을 갖다 댔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좋아요.”
체스넛이 마음에 들어 하자 에스티아가 기쁜 듯 해사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대공이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낮달맞이 꽃이에요. 향이 은은해서 잘 때 피워도 부담이 되지 않아요. 향이 진한 건 싫어하실 수도 있을 거 같아 제가 좋아하는 향초 중에 은은한 걸로 가져왔어요.”
“감사해요…… 잘 쓸게요, 영애.”
체스넛의 눈빛에 따뜻한 온기가 맺혔다. 에스티아는 사람의 진심은 눈빛으로도 전달되는구나 싶어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원래 체스넛도, 에스티아도 바로 본론부터 얘기할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꿔 소소하고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대공은 그저 옆에서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워낙 두 사람이 잘 통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에스티아의 말을 가로막고 싶지 않았다.
사실 그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볼 기회는 별로 없었다. 다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 그는 그저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약초 공부하시면서 꽃도 공부하셨군요.”
“네, 꽃 중에서도 약초처럼 효능이 좋은 게 많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제대로 한번 해 보려고요.”
“영애라면 잘하실 거 같아요. 무엇보다 애정이 있으시잖아요.”
누가 이 둘이 싸웠었다고 생각할까. 그만큼 둘은 흐름 한번 끊기지 않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래서 카로드산에 가려고 하시는 건가요?”
체스넛은 사교계에 익숙한 영애답게 수려하게 대화 주제를 전환했다. 에스티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단하고 얘기해 보니 카로드산은 다른 산보다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약초로 쓸 만한 꽃이 더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 나왔어요. 그래서 한번 가 보려고 하는데 베리아 가문의 허가가 필요해서요.”
원래 이런 경우에는 가주인 백작이나 차기 가주인 소 백작이 나와야 했지만 체스넛이 자처하여 에스티아를 만나겠다고 했다. 백작과 소 백작은 체스넛의 판단을 믿기에 순순히 승낙했다. 물론 아직 성격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덧붙이긴 했지만.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체스넛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산지대가 험한 편이라 저희 영지인들도 잘 가지 않는 산입니다. 괜찮으신지요?”
체스넛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에스티아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원을 받아서 더 좋은 장비를 마련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저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오스카 후작님의 후원을 받으셨다고요.”
“네.”
에스티아가 바로 대답했다. 담담한 에스티아 옆으로 싸늘하게 식은 대공의 표정이 체스넛의 시야에 들어왔다.
체스넛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메르헨과 있을 때 대공은 저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는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체스넛은 메르헨과 함께 사교계의 중심에 있는 영애였다. 위선과 가식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봐 왔고 그 과정에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법을 배웠다.
동시에 그것이 와장창 깨지는 것도 많이 보았다. 바로 그녀의 ‘친우’로부터. 그래서 지금 대공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도 즉각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군요. 대공 전하께서는 메르헨의 뜻을 대신 전해 주려고 오셨다고요.”
그래서 에스티아에게도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생각한 대로가 맞다면 둘이 있을 때 그녀가 굉장히 곤란해질 테니.
“네, 저한테 부탁하셨거든요. 자신 대신 글레멘드 영애와 함께 가서 영애를 도와 달라고.”
체스넛은 속으로 의문을 표했다. 사실 메르헨이 한마디만 했으면 자신은 바로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이 못 온다고 에스티아 옆에 대공을 함께 보낸 게 이상했다. 그렇다고 따라온 대공은 더더욱 이상했고.
“셰린포드 영애가 베리아 영애한테 모쪼록 글레멘드 영애와 상단이 출입할 수 있도록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대공은 메르헨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이상한 건 에스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전과 같으면 이렇게 그와 눈이 마주치고 있기만 해도 펄쩍 뛸 사람이었다. 물론 마음을 접긴 했어도 에스티아의 태도는 정말 찬바람이 분다고 표현할 정도로 차가웠다. 대공이 말하는 내내 한 번도 그를 보지 않았으니까.
반면에 대공의 눈은 사실 체스넛이 아닌 거의 에스티아에게 향해 있었다. 자신에게 말할 때는 잠시 이쪽을 보긴 했지만 말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에스티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덕분에 체스넛만 뻘쭘했다.
“그래서 두 분이 같이 오셨군요.”
체스넛은 하는 수 없이 말을 건네는 대상을 에스티아로 바꿨다.
“영애만 오셔도 저는 승낙했겠지만 전하께서 이렇게 보증까지 서 주시니 제가 더욱 거절할 수가 없겠네요. 좋습니다. 상단과 상의해서 명확한 기한만 전달해 주세요, 글레멘드 영애.”
“감사합니다! 메르헨에게 다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어요. 저를 위해 그녀의 약혼자인 전하께 도움을 요청해 줬으니까요.”
움찔. 밝게 웃은 에스티아와 달리 체스넛은 재빨리 대공의 눈치를 보았다.
서늘하다 못해 보는 사람을 얼려 죽일 거 같은 분위기였다.
“두 분이서 마저 대화 나누시죠. 실례가 안 된다면 전 저택 주변을 둘러보겠습니다.”
대공이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체스넛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세요.”
탁. 대공이 성큼성큼 나가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체스넛은 손님이 앞에 있다는 것도 까먹고 입을 떡 벌렸다.
“죄송해요, 베리아 영애.”
에스티아가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숙였다. 체스넛은 그제야 에스티아가 그가 분노하게끔 의도했다는 걸 깨달았다.
“절 이용하셨군요, 영애.”
“죄송합니다.”
에스티아는 몸을 움츠렸지만 체스넛은 사실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녀로서도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순히 대공과 둘이서 왔다가는 어떤 소문이 날지 모르니.
“선물을 주셨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체스넛이 담담한 톤으로 말했다. 에스티아가 체스넛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들었다. 체스넛은 그런 에스티아의 표정에 피식 웃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보다 상황이 꽤 복잡한가 보군요.”
요즘 메르헨이 집 안에 콕 박혀서 나오지 않는 것만 해도 알 만했다. 그녀가 그렇게 티를 낼 때는 오직 저 남자하고 뭔 일이 있을 때뿐이니까.
“네. 저도 사실 메르헨과 대공 전하와의 관계가 어떤지 잘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더는 대공 전하와 얽히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저는 이미 오래 상처를 받아 왔고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믿지 못해요. 이제 전하를 정말 떠나보내고 싶어요.”
물론 대공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한 그를 실컷 괴롭힐 생각이었지만 그가 깔끔히 마음을 접는다면 에스티아도 그를 다시 볼 생각이 없었다.
“영애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애가 힘들어 보인다면 제 착각일까요?”
비꼬고자 한 말이 아니라 정말 걱정되어서 한 말이었다. 메르헨만 아니라면 바로 그녀와 친구를 맺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웃었다. 많은 감정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아직 마음이 남아 있을 순 있겠죠. 오랜 사랑이었으니까. 그런데 전 더는 저를 망치면서까지 누굴 사랑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제 자신을 망쳤다면, 망칠 거 같으면 끝내는 게 맞다고 봐요.”
에스티아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체스넛은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만남을 파했다.
에스티아가 나간 뒤, 체스넛은 걱정에 휩싸였다.
왠지 방금 대공의 태도로 보아 하건대,
둘은 쉽게 끝날 거 같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