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1화 (72/141)

71화 - 불편해요

에스티아가 응접실을 나왔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눈앞에 폭풍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대공이 어디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에스티아가 안내해 줬던 사용인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는 어디 계시나요?”

“정원에 계십니다. 입구에서 나가신 다음 왼쪽으로 쭉 걸으면 나옵니다.”

사용인은 눈치를 보며 주섬주섬 말했다. 방향까지 알려주는 걸 보니 처음부터 안내해 줄 생각을 접은 듯했다.

도대체 어떤 분위기로 나간 건가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기야 사신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나갔을 게 뻔했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구로 향했다.

비는 마치 지금 당장 그에게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아 에스티아는 사용인이 건네는 우산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정원으로 가는 오솔길 양옆으로 꽃고비가 활짝 피어 있었다. 하얗게 피어 있는 모양이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그 사람이 하필 곧 만날 사람이라 에스티아는 애써 그 생각을 구석으로 밀어놓았다.

덩굴이 둘러진 아치형 입구를 지나니 꽃고비 이외에 나팔꽃, 장미꽃이 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에스티아가 사람 키만 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여기에 계셨군요.”

“…….”

이제는 저 뒷모습만 봐도 알 거 같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는걸. 하지만 본인이 한 짓이 있으니 바로 화내지는 못하고 있는 걸 것이다. 포커페이스의 대명사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순 아이 같았다.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으니.

“혹시 혼자 있고 싶으시면 전 마차에 먼저 가 있겠습니다.”

에스티아가 그의 분노를 무시하며 등을 돌렸다. 안 붙잡으면 좋고, 붙잡아도 그냥 못 들은 척하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글레멘드 영애.”

역시나 대공의 목소리가 에스티아를 붙잡았다. 에스티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몸을 틀었다.

“할 말이 남아 계신가요?”

“남아 있냐고요?”

에스티아를 향해 몸을 돌리자 그의 눈빛이 드러났다. 에스티아는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했지만 자존심 상하게도 마음이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평범한 사업가였던 자신보다는 오래 전쟁에서 구른 이의 눈빛이 훨씬 더 살벌하리라.

“남아 있기만 하겠습니까. 아주 넘쳐나는데.”

절로 목 너머로 침이 넘어갔다. 괜히 황실 기사단장에 오른 게 아닌 듯했다. 저렇게 사람을 아주 죽일 듯이 쳐다보는데 적이라고 겁을 안 먹고 배기겠는가.

“그런가요, 그럼 간단하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비가 많이 올 듯하여.”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물론 입꼬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네, 그럼 말하겠습니다.”

열받아서 다다다 쏟아 낼 줄 알았는데 대공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더 두려움을 자아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빛 안에 분노 이외에 다른 감정이 깊게 베어 나오는 게 보였지만 그것도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약혼녀로 맞이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게 제 낭만이거든요.”

가끔은 너무 선명하면 오히려 피할 수가 없는 거 같다. 지금 그의 눈에 담긴 감정도 그랬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단호한 대공의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마음속으로 떨어졌다. 작은 돌이 큰 강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아무리 작은 돌이라도 쌓이면 산처럼 보이는 법이었다.

이미 작은 파동을 일으킨 대공의 말은 곧 파도를 불러왔다.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전하……!”

“저는, 메르헨 셰린포드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에스티아가 입을 벌린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각오를 하고 왔는데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에스티아가 애써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떨리는 심장까지 진정시키진 못했다. 이미 들었던 말임에도 그 말이 갖는 힘은 강력했다.

‘괜찮아, 괜찮아.’

에스티아는 속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달랬다. 에스티아가 혀로 입술을 축이고 다시 시선을 들어 대공을 보았다. 그는 다른 곳에 한 번 시선을 주는 법 없이 오직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말씀드렸죠. 그건…… 두 분의 사정이라고요. 두 분이 더는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지시든, 약혼을 깨시든, 그건 두 분의 사정이고 저랑은 상관없죠.”

다행히 말이 막힘없이 술술 나갔다. 그동안 당한 게 많은 게 어떻게 보면 다행인가 싶어 에스티아는 씁쓸해졌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오랜 시간 그녀를 외면해 온 사랑이 갑자기 다시 찾아와서 이제 자신이 너의 것이라 말한다?

에스티아는 그런 낭만을 믿지 않았다. 원작대로라면 그는 그녀를 죽이기까지 했으니까. 에스티아가 탁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니 더더욱 그런 얘기를 저한테 해 주실 필요는 없죠. 그것도 굳이 또다시.”

“아, 그렇습니까?”

나름 날카롭게 말한 건데 생각보다 대공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벌려 놓은 거리를 성큼성큼 줄여 갔다. 그가 바로 그녀의 앞에 섰다.

“압니다. 영애하고는 상관없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한 가지는 아시겠죠. 저를 밀어내려는 용도로 메르헨을 지지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거. 영애에게 한 가지 방법이 사라진 셈일까요.”

대공이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에스티아의 목덜미에 손을 올렸다. 대공의 엄지가 에스티아의 뺨에 닿았다. 그 촉감이 간질거려 에스티아는 몸을 뒤로 뺐지만 대공은 오히려 더 바짝 다가왔다.

에스티아는 이를 악물었다. 울렁거렸다. 울렁거려도 너무 울렁거렸다.

‘제발 에스티아, 이제 그만할 때도 됐잖아.’

난 너처럼 살기 싫다고.

“제가 정말…… 다른 여자하고 이렇게 안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겁니까? 정말로?”

대공의 눈빛은 집요하게 에스티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반대로 목소리는 위태롭게 떨렸고 절박하게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몸이 떨려서 이대로 그를 뿌리치고 가고 싶었다.

“네, 상관없어요.”

하지만 그러면 이 마음을 들킬 테니 에스티아는 참았다. 그러자 대공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설령 도망간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녀를 놔주지 않을 거 같은 눈빛이었다.

“그럼 이거는요.”

대공이 에스티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공의 눈을 다시 마주 보았다.

“관심 없어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에스티아가 속으로 끝도 없이 되뇌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공의 숨이 에스티아의 입술에 닿았다. 그대로 촉촉한 느낌이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쪽.

에스티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대공이 여전히 입술을 맞댄 채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당연하죠.”

에스티아는 보았다. 대공의 이성이 끊기는걸. 그의 눈빛에 짙게 서려 있던 감정이 그를 잠식하는 게 보였다.

대공이 왼쪽 팔로 에스티아의 허리를 껴안고 오른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싹 당겼다. 동시에 대공의 입술이 에스티아의 숨을 삼켰다.

“읍.”

에스티아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지만 그게 먹힐 리는 만무했다. 대공은 도망가려는 그녀를 붙잡듯 모든 숨을 삼키면서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에스티아는 숨을 쉬기 위해 입을 더 크게 벌렸고 그 사이로 대공이 무자비하게 침범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도망갈 듯하면 그가 바로 그 뒤를 쫓은 탓에 두 혀는 시도 때도 없이 얽혔다.

에스티아는 코로 숨을 쉬려고 했지만 조금이라도 숨을 돌리려 하면 대공이 고개를 틀고 그녀의 입술을 삼키는 덕에 결국 입을 더 벌렸다. 대공은 그걸 기회로 삼고 그녀의 혀를 더욱 깊이 옭아맸다. 덕분에 에스티아가 거칠게 숨을 토해 냈다.

“읍…… 응…… 하…….”

에스티아는 자신이 이런 소리를 내는 게 혐오스러웠다. 하지만 더욱 혐오스러운 건 이 상황에 점점 빠져들고 있는 ‘에스티아’의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순순히 말려들 순 없었다. 에스티아가 두 팔을 뻗어 대공의 목에 둘렀다. 대공이 잠시 멈칫한 틈을 타 에스티아는 대공의 윗입술을 머금고 그의 혀를 부드럽게 달래고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하아…….”

대공이 갈급한 숨을 내뱉었다. 두 호흡이 야릇하게 섞이며 젖은 몸이 서로를 향해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그렇게 대공이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머금으려 할 때 에스티아는 대공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대공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가 애써 입꼬리를 양쪽으로 끌어 올렸다.

“여기까지요.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네요.”

최대한 여유롭고, 사무적으로 들리게 말했지만 잘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대공의 눈빛이 크게 흔들리는 걸 보니 효과는 꽤 있는 거 같았다.

“혹시 이 이상을 시험해 보고 싶으시면 오세요. 전하께서는 저한테 매달릴 수 있어 좋고, 저는 무너진 전하를 볼 수 있어 좋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에스티아는 자신을 감싼 대공의 팔을 매정하게 처냈다. 대공의 좌절한 눈빛이, 눈가에 맺힌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방울이 보였지만, 그건 그녀가 알 바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우위에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여유로운 척했지만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도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를 보기 싫지만 괴롭히고 싶었고, 그를 밀어내고 싶지만 어디까지 오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건 다 ‘에스티아’의 마음 때문인 듯했다.

그렇지만 티를 낼 수 없어 에스티아가 태연자약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 물론 그 전에 다른 영애와 약혼이라도 하신다면 더 좋고요.”

“에스티아.”

“이름 부르지 말라는 말은 수십 번은 더 해야 안 하실까요?”

“…….”

“옷이 많이 젖었고 마차는 전하의 마차를 타고 왔으니 먼저 가세요. 오늘은 이렇게 젖은 차림으로는 전하와 마차 타기 싫으니까요.”

“그건!”

“불편해요.”

에스티아의 말이 날카롭게 그의 마음에 박혔다. 날이 벼린 비수는 무자비하게 그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에스티아는 그한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전 베리아 영애에게 옷 좀 빌리고 다른 마차를 타고 가든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세요, 대공 전하.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메르헨에게도 ‘꼭’ 안부 전해 주세요.”

에스티아의 미소는 맑다 못해 빛이 났다. 진정으로 그한테서 벗어난 것처럼.

에스티아가 등을 돌려 다시 베리아 저택 입구로 향했다. 에버하르트는 입을 꾹 다물었다. 숨이…… 다시 숨이 안 쉬어질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는 결국 그대로 주저앉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숨이 차올랐다. 그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다.

이미 기나긴 두려움과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에버하르트는 두 손에 힘을 주어 울음을 틀어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