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고통
날이 저물었다. 에스티아는 체스넛의 제안으로 겨우 저녁을 먹고 손님방으로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체스넛에게 여러 번 사과를 건넸다. 옷을 얻어 입은 것도 모자라 밥까지 얻어먹었으니 염치가 없었다. 게다가…….
“글레멘드 영애.”
체스넛이 손님방 입구에 서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네…….” 하고 대답했다.
“메르헨에게는 비밀로 할게요. 전하하고도 얘기했지만 메르헨에게는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늦었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하루 묵게 되었다고만 말할 거예요.”
“네, 감사해요, 영애.”
체스넛은 한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쉬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방에서 나갔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방금 벌어졌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전말은 이랬다. 에스티아는 체스넛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곧 출발할 예정이었다. 대공의 마차가 여전히 입구에 있다는 걸 보기 전까지는.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수십 개의 물음표가 떠올랐다. 마차 안에 있나 싶어 마차 문을 열어 봤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머릿속이 하얘져 옆에 우산을 들고 있는 사용인에게 물었다.
“대공 전하는요?”
“그게…… 정원 쪽으로 가신 이후로 소식이 없습니다.”
‘뭐?’
그 사람과 그렇게 신경전을 했던 게 1시간도 전의 일인데 아직도 안 왔다고?
그 사실을 깨닫자 에스티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순간 상단 창고에서 대공을 봤을 때가 생각났다. 기운 없이 쓰러져 있던 대공의 모습이.
비는 점차 많이 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오늘은 집에 못 갈 수도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안 좋은 예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사용인의 우산을 마다하고 정원 쪽으로 달려갔다. 기껏 새로 입은 드레스가 젖고 있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닌 거 같았다.
“전…….”
정원으로 들어간 에스티아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대공은 무릎을 꿇고 거의 기절해 있었다. 에스티아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대공의 몸을 흔들었다.
“전하. 전하!”
“으…….”
다행히 의식이 아예 끊긴 건 아닌지 대공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기야 정말 기절했었다면 이렇게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에스티아가 대공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자신에게로 향하게 했다.
“전하, 전하. 제 목소리 들리세요? 전하!”
“아…… 당신이구나…….”
대공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 와중에 웃나 싶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에스티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공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니…… 아닙니다. 일어날 수…… 윽…….”
대공이 상체를 숙이더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거칠게 숨을 들이마셨다. 헉헉거리는 모양새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닌 거 같았다.
“전하, 전하.”
“흐억…… 헉…… 헉…….”
대공이 결국 두 손을 바닥에 짚고 고통스럽게 숨을 뱉기 시작했다.
‘이건.’
그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간 에스티아는 대공의 몸을 일으키고 그의 뒤로 간 다음, 오른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대공이 에스티아의 손을 치우려고 하자 에스티아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안 돼요! 숨을 천천히 쉬어야 해요. 천천히! 저 따라 하세요.”
후, 하. 후, 하.
에스티아가 대공의 귓가에 대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발버둥 칠 거 같던 대공이 에스티아를 따라 숨을 쉬기 시작했다. 점차 몸의 떨림이 잦아들고 대공의 숨도 일정해졌다.
“괜찮으세요?”
에스티아가 온몸으로 대공의 몸을 받치며 물었다. 그는 에스티아보다 머리 두 개 정도 더 클뿐더러 체격도 건장했기 때문에 그를 받치고 있는 건 보통 힘든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픈 사람을 그냥 내팽개쳐 둘 순 없어서 에스티아는 힘이란 힘은 다 끌어 모으고 있었다.
“기다려요, 사람을 불러올게요.”
대공이 몸을 일으키자 에스티아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뛰어가려는데 대공이 그녀의 손목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아니…… 아니…… 가지 마요. 가지 마요, 제발.”
거의 정신을 잃을 뻔해서 그런지 대공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도대체 이런 식으로 사람 붙잡는 게 어디 있단 말인가. 그만큼 대공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마치 엄마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아이처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차까지…… 부축만 해 주세요.”
“마차까지는 무슨.”
마음속에서 화가 솟구쳤다. 마음대로 버리더니, 마음대로 버리지도 못하게 한다. 에스티아가 대공의 오른팔을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저한테 기대세요. 그리고 오늘은 베리아 저택에서 머무는 걸로 해요. 이렇게 가 버리다가 중간에 기절이라도 하면 날 탓하려고요?”
에스티아가 대공을 부축한 채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살짝 몸을 기댄 채로 걸었다. 그 와중에도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에스티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눈을 돌리면 사라질까, 두려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는 마차 앞에 기다리고 있는 사용인을 불러 건장한 남자 사용인 한 명과 베리아 영애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사용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택으로 뛰어 들어가더니 남자 사용인과 체스넛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영애! 이게 무슨!”
급하게 부르긴 했지만 막상 체스넛을 보니 뭐라 둘러대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에스티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려는데 옆에서 대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래…… 훈련을 무리하게 했더니 제 마나에 문제가 생긴 거 같습니다. 염치없지만 방을 하나 내어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고 보니 대공은 마법을 쓸 줄 아는 기사였다. 체스넛도 그걸 아는지 별 의심 없이 저택으로 그들을 다시 안내했다.
에스티아는 대공이 쉴 방까지 함께 갔다. 체스넛은 의사를 부를까 물었지만 대공은 쉬면 괜찮다며 거절했다. 그렇게 체스넛과 그를 부축한 남자 사용인이 먼저 방 밖으로 나가고 에스티아가 나가려는데 대공이 그녀의 겉옷 끝을 잡아 왔다.
“에스…… 아니, 영애.”
대공이 아직 의식이 흐릿한 듯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좀 이따 제가 방으로 가도 됩니까. 지난번에…… 얘기하고 싶다고 했었던 거 기억하시죠? 불편하시다면 복도나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도…….”
“9시쯤 올게요.”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대공의 말을 끊었다. 예전 같으면 펄쩍 뛰었을 대공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스티아는 표정을 보이기 싫어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그게 벌써 3시간 전의 일이었다. 에스티아는 침대에 누운 채로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려 있는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안에는 심플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었다. 에스티아는 낯선 복도를 걸어 대공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거리가 멀지 않아 길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몇 분 동안 지긋이 문을 노려보다가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렸다. 노크를 한 지 한 3초 지났을까 문이 벌컥 열렸다.
‘자동문인 줄 알았네.’
그 정도로 노크와 동시에 열려서 에스티아는 당황했지만 더 당황스러운 건 대공의 표정이었다.
대공의 얼굴엔 묘한 기쁨과 안도감이 떠올라 있었다. 그 표정을 보기 싫어 에스티아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피곤하면…….”
“아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그의 눈이 파르르 떨렸지만 시선은 에스티아에게서 떼지 않은 채였다. 대공이 어서 들어오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탁. 문이 닫혔다. 동시에 방 안에 어색한 공기가 맴돌았다. 대공이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지만 에스티아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몇 분이 지난 뒤, 에스티아가 등을 돌렸다. 아직 머리가 촉촉이 젖어 있는 대공이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채로 계속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저와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먼저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되나요?”
“네, 얼마든지.”
말하기가 무섭게 대공이 대답했다. 괜히 머쓱해진 에스티아가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좋아요, 그럼…….”
후. 에스티아가 숨을 내뱉었다.
“먼저 이것부터 인정할게요. 기억이 없는 거 맞아요. 그래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사용인들한테만 들어서 대충 알고 있는 정도에요. 내 기억은 최근 한 달 정도까지밖에 없어요.”
무조건 숨겨야 할 진실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랬군요……. 혹시 원인은 아십니까?”
대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귓가를 간질거렸지만 그녀는 그 느낌을 애써 무시했다.
“아뇨, 저도 갑자기 그래서 당황했어요. 그래도 아예…… 잃은 건 아니라 계속 숨겼고요.”
“아예 잃은 건 아니라는 말씀은…….”
대공이 조심스레 에스티아에게 물어왔다.
“과거를 띄엄띄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이 날 경멸했고, 난 그런 당신을 놓지 못했다는 거.”
“…….”
원작을 읽었으니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물론 그 원작이 진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스카 후작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제가 치기만 부리지 않았어도 상황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대공의 음성에 씁쓸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기억을 잃은 영애가 저를 향한 마음도 잊어버렸을 거라고 했을 때, 믿었어야 했어요. 그걸 부정하고 싶어 영애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왜 절 괴롭히는 게 전하가 그 사실을 부정하는 건가요?”
에스티아가 다시 솟아오르는 화를 누르며 물었다.
“전에도 마음이 변한 척, 접은 척 저를 밀어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연기하는 건가 싶어서 평소보다 더 차갑게 쏘아붙이니 다시 전처럼 매달리시더군요.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경우이길 바랐습니다.”
에스티아가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떤 사건으로 인해 에스티아를 미워하지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스카의 말을 부정하고 싶었고, 선택한 방법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면서 날카로운 말을 쏟아붓는 거였다. 아마 그녀의 마음을 떠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차갑게 일갈하려던 에스티아는 오늘 그의 상태를 떠올리고는 마음을 바꿨다.
“오스카 후작이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모르시고요?”
“네, 그저 영애가 기억을 잃었으니 저에 대한 마음도 사라졌을 거라고 했습니다.”
“메르헨이 날 싫어해서 내가 위험해질 거라는 말씀은요?”
에스티아가 마음에 걸리던 문제를 꺼냈다. 대공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전에 몇 번 영애가 다칠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마다 그 사람이 비유적으로 저한테 경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애가 밉기도 하고, 지키고 싶기도 해서, 그래서…….”
“그게 다인가요? 날 괴롭히면서도 지키는 용도로?”
“……그 외에도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그 여자가 범죄에 연관되어 있는 거 같거든요.”
“네……? 범죄요? 무슨…….”
질문을 쏟아 내려던 에스티아는 말을 멈췄다. 대공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괜히 그가 다시 아까처럼 발작을 일으킬까 염려스러웠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그와 자신과의 사이가 틀어졌는지 당장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손을 잡고 침대로 이끌었다.
“영…… 영애?”
대공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에스티아가 대공의 어깨를 눌러 침대 맡에 앉혔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눈빛이 혼란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