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3화 (74/141)

73화 - 도대체

“앉아서 말씀하시라고요. 또 쓰러져서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 말고요.”

에스티아 목소리는 냉랭했지만 그는 그마저도 좋았다. 아예 끝나 버리지만 않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는 무릎 위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좋아요, 그럼…… 메르헨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오스카 후작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요. 전하의 말대로라면 후작은 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걸 그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겠네요.”

“네, 그래서 더욱 그를 가까이하지 말라고 얘기했던 겁니다.”

오스카가 에스티아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걸 떠올린 대공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꽁한 마음을 티 내고 싶진 않았지만 치기 어린 마음에 드러내고 말았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에스티아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말을 잘라 냈다. 그는 시무룩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스카 후작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을까요?”

에스티아가 여전히 그한테서 등을 돌린 채로 물었다.

“후작은 마법사 길드에 속해 있는 고위 마법사입니다. 만약 그가 흑마법까지 익혔다면 그걸 통해 알아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보다 흑마법을 이용해 시간을 되돌렸다고 했고요. 그렇다면 영애는 더더욱 위험한 거겠죠.”

최대한 자신과 거리를 두기 위해 그런다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건넸다.

“그것도 제가 알아서 해요.”

이번에도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공은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자신이 다가가지 않으면 그녀는 한없이 멀어질 뿐이었다.

“영애한테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이라는 말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에 어떻게 그런 단어가 담기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무리한 부탁은, 죄송하지만 미리 거절할게요.”

그러고서는 에스티아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는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서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향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건 옳지 못한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은 무조건 굽히고 들어갈 때였다.

“영애가 산행을 나갈 때나 어디 외진 곳으로 가게 될 때 제가 동행하면 안 되겠습니까?”

“네?”

에스티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는 마음이 잔뜩 쪼그라드는 걸 느꼈다.

“전하가 왜요. 어차피 이안하고도 같이 가고 상단 사람들하고도 같이 가기 때문에 문제없어요.”

“에이커가 다쳤던 건 그가 혼자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무인이 노렸기 때문입니다.”

대공이 눈빛에 간절함을 담아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별로 동요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그의 말이 틀리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했다.

“메르헨은 어쩌고요?”

에스티아는 당연한 걸 묻듯이 그 여자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것이 느껴졌다. 대공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상관없습니다.”

대공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 사람은 ‘우리’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우리라뇨.”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메르헨과는 별개로 전하와 제 사이는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물론 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로 날아와 마음에 박혔다. 2년 동안 자신이 했던 짓이었기에 할 말은 없었지만 그는 마음이 한없이 슬픔 속에 잠기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오스카 후작이 정말 흑마법과 관련이 되어 있다면 위험한 건 제가 아니라 전하겠죠. 특히 전하가 저한테 미련을 버리지 못할수록 더 그렇겠죠.”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반면에 대공은 속에서 서서히 불씨가 타올랐다. 그 이름을 들을 때마다 자동 반사였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왜 그런 겁니까? 왜 제가 더 위험하죠?”

초조함을 숨기려고 했지만 결국 겉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위험할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에스티아와 오스카의 관계는 달랐다. 벌써 그녀가 오스카 후작을 그만큼 파악했나 싶어 그는 조급해졌다. 게다가 계속 이어지는 에스티아의 침묵도 그를 더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다.

“그건 전하가 더 잘 아시겠죠.”

곧 냉랭한 음성이 그의 마음을 더욱 바싹바싹 타게 만들었다. 에스티아는 여전히 그를 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결국 불안함을 못 이기고 에스티아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티아가 시선을 들었지만 온기라고는 전혀 없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오스카 후작이 영애를 위협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그러면 전하는 왜 오스카 후작이 절 위험하게 만들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사실 전하는 제가 위험할까 봐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오스카 후작과 제가 만나는 게 싫으신 거 아닌가요?”

정곡을 찔렸다. 그녀가 위험해질까 봐 싫은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그자와 단둘이 있는 게 싫기도 했다. 대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예, 싫습니다. 미치도록 싫어요. 영애가 다치거나 안 좋은 상황에 처하는 것도 싫지만 다른 사내와, 그것도 그자와 같이 있는 걸 보는 게 미치도록 싫습니다.”

그 말에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공의 마음에 에스티아는 살짝 당혹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오스카 후작이 미치도록 싫은 이유. 대공이 그를 싫어하는 이유라면 혹시 이런 이유일까.

“오스카 후작도 마찬가지예요.”

에스티아는 그를 떠보고 싶어졌다. 동시에 오스카 후작이 왜 그녀 주변을 맴도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대공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측한 듯했다. 에스티아는 그가 예상했지만, 부정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지독히도 담담하게.

“라 빅터 오스카는 절 사랑하니까요. 맞죠?”

* * *

알고 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같은 사람에게 향하는, 같은 감정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는 그자의 눈빛과 감정을 찢어발기고 싶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그자를 의지할 거 같으면 주변을 맴돌며 그녀가 자신에게 매달리도록 만들었고, 그녀가 자신에게 집착하도록 괴롭혔다.

이렇게 죗값을 치르는구나 싶었다. 그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녀를 전부 용서하겠노라 말하며 끌어안을 것이다. 그러고는 절대 놔주지 않을 것이다. 잠깐만이라도 다른 데 시선을 주지 못하게 할 것이다.

“대답하기 싫습니다.”

그가 대놓고 그녀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녀가 예상하는 답을 들려주기는 싫었다. 어떻게 이 여자한테 라 빅터 오스카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계속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만약 그녀가 그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더라면.

“에버하르트.”

쿵. 심장이 그대로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순간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는 게 믿을 수가 없어 고개를 다시 그녀를 향해 돌렸다.

“제가 당신을 이렇게 불렀던 거 맞죠? 꿈에서 봤어요. 당신과 제가 서로 이렇게 부르는 거.”

에스티아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는 그저 달음박질치는 심장 소리만 듣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그의 눈빛이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에스티아의 소매를 잡았다.

“다시 불러 줘요, 내 이름.”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소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지금 다시 그녀에게 이름을 불릴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거 같았다.

지난 2년 동안 자신은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고 그녀는 그걸 충실히 지켰다. 이름을 부르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노라 그녀에게 선언한 탓이었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목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2년 전에,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그녀를 용서했으면 이렇게 멀어지지도 않았을 텐데.

“내가 다시 이름 불러 주면 뭘 해 주실 건데요?”

에스티아가 바짝 그한테 다가가며 물었다. 그의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뭐든…… 뭐든…….”

그의 음성에 짙은 불안감이 배어 나왔다.

그는 과거 자신의 오만함을 저주했다. 그녀가 자신을 배신한 만큼 고통스럽길 바라기도 했지만, 설령 그렇게 밀어내도 또 밀어내도 그래도 자신을 향한 그녀의 마음이 변치 않을 줄 알았다.

그래, 메르헨도 안심시킬 겸, 그는 철저히 에스티아를 외면하고 모진 말을 쏟아 냈다. 복수이자 보호였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에스티아는 언제든지 그를 완전히 버릴 수 있었고 그는 그 사실이 끔찍이도 두려웠다.

그녀 앞에서는 대공작이라는 지위도, 황실 기사단장이라는 명예도, 셀 수도 없이 많은 돈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래서 가만히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물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에스티아가 머릿속으로 차분히 말을 정리했다.

“사실 나, 과거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근데 나와 내 사람들을 지키려면 아주 일부는 알아야 해요.”

에스티아가 대공의 뺨에 손끝을 갖다 댔다. 옅은 녹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오늘 당신이 아픈 거 같아서 묻지 않으려고 했어요. 근데 묻고 싶어요.”

에스티아가 그의 뺨에 손을 올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도대체 내가 당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