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긴 그림자
에스티아는 밤새 잠을 설쳤다. 기분이 너무 싱숭생숭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대공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에스티아는 억지로 그를 눕히고 방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일어나려던 대공은 에스티아가 ‘다음에’라는 말을 꺼내자 다시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원래는 완전히 끊어 내는 게 옳았다. 그런데 ‘진짜 에스티아’가 남긴 미련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자신의 옆에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인지. 에스티아는 그를 완전히 끊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메르헨이…… 그런 사람이었다니.’
안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데 메르헨마저 그녀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메르헨은 언제든지 질투에 휩싸여 에스티아를 위협할 수도 있었다.
대공은 메르헨을 영원히 끊어 낸 것처럼 말했다. 메르헨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거였다. 더군다나 오스카 후작이 에스티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결국 그 남자를 계속 곁에 둬야 한다는 건가?’
마음이 복잡했다. 이안이 있긴 했지만 만약 그 두 사람이 이안마저 위험하게 만든다면?
그 바보 같은 대공을 어떻게 해야 하지?
에스티아는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에스티아는 그렇게 체스넛이 깰 때까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렸다가 그녀가 7시쯤 응접실로 오자 바로 인사를 건넸다.
체스넛은 ‘너네들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 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별말 없이 에스티아에게 잘 가라 인사했다. 어영부영 대충 인사하고 떠나는 게 무례할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에스티아는 빨리 저택을 벗어나야 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마을로 나가는 작은 마차가 있었고, 에스티아는 베리아 가문의 사용인들과 몸을 욱여넣고 저택을 벗어났다. 창밖 너머로 베리아 저택이 조금씩 멀어졌지만 에스티아는 그래도 조마조마했다.
저택이 엄지만큼 작아졌을 때쯤에야 에스티아는 안심한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근처 마을에 내린 에스티아는 마을로 마중을 나온 이안과 만났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이안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힘든 시간이었어…….”
에스티아의 회한이 가득한 눈빛에 이안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하가 아가씨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그의 눈빛에 순식간에 노기가 어렸다. 에스티아는 그런 이안의 반응에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하긴 했지. 그래서 환장할 노릇이지만.”
“……?”
이안은 도저히 자신의 주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에스티아의 반응은 처음이었다. 전에 한창 대공을 좋아했을 적에도 화를 내면 냈지 이렇게 멍 때리진 않았다. 최근 들어서는 원래 그녀가 가졌던 총기까지 돌아오면서 이런 모습을 더욱 보기 힘들어졌고.
“가자, 이안. 베리아 영애만 괜찮다면 당장 오늘 카로드산에 가게. 그러려면 미리 자 둬야겠어.”
“예? 뭐라고요?”
이안이 에스티아의 말에 펄쩍 뛰었다. 카로드산은 지형이 나름 험한 편에 속했다. 그런데 그녀는 거길 동행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안 됩니다, 아가씨! 위험합니다. 절대 안 됩니다.”
“됐어, 괜찮아. 조금만 자면 돼. 어서 가자. 나 빨리 자야 해.”
에스티아가 비몽사몽인 상태로 말을 다다다 쏟아 냈다. 이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지만 에스티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가 타고 온 마차로 향했다. 이안의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에스티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상태로 다디단 잠에 빠졌다.
* * *
“영애가 집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집사 안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인에게 고했다. 오스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안셀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안 그래도 조용하던 방은 더 깊은 고요함이 찾아왔다.
반면에 오스카의 머릿속은 소란스러웠다.
안셀이 어떤 식으로 에스티아의 정보를 알아 오던 그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에스티아의 행보만 궁금했을 뿐이었다.
-내 시체나 붙잡고 울던지! 이 악마 같은!
그는 처연했던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는 에스티아가 실수하게끔 유도했고, 그의 계획대로 그녀는 에버하르트에게서 버려졌다. 그것이 2년 전의 일이었다.
에스티아는 그 이후 오스카를 버렸다. 그때 이후로 오스카는 그녀의 말대로 꼭 그녀를 ‘산 채’로 가져야 하는 건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어찌 되었던 시든 꽃도 꽃이고, 죽은 꽃도 꽃이지 않은가. 그저 겉모습만 아름답게 보존해 놓으면.
‘그냥 콱 죽여 버릴까.’
오스카는 잠시 고민했더랬다. 몰래 죽이고 인형처럼 어디에다가 갖다 놓으면 아무도 모르지 않을까.
그런데 그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역시 심장이 뛰어야 품에 안았을 때 조금이라도 느낌이 나지 않겠는가.
-후작님! 후작님은 혼자 살아요?
에스티아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그 순간부터 에스티아를 데려오고 싶었다.
이유는 특별한 건 없었다. 그저 보는 순간 매혹되었고 갈망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올래?
오스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면서 물었다.
-아뇨! 에버랑 놀기로 했어요.
천진난만한 얼굴이 해사하게 퍼졌다. 순간 오스카는 에버가 누구이든 간에 그냥 죽일까, 생각했다.
만약 그때 그 어린 꼬마를 죽였으면 에스티아가 그에게로 왔을까?
아마 진작 에버하르트를 죽여 버렸으면 에스티아의 튼튼한 뿌리는 진작 말라비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일찍이, 그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예쁘게 잘 자랐다. 순수했던 열망에 더러운 욕망이 덕지덕지 묻기 시작했다. 오스카는 자신을 견제하는 모든 이를 제거하고 그녀를 기필코 제 아래에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시금 그녀의 청초한 모습을 떠올리니 몸 속 깊은 곳에서부터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오스카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왔다. 안셀이 익숙하다는 듯 뒤로 따라붙었다.
“오늘도 잠시 보러 가십니까?”
“가 봐야지. 요즘 둘이 틈만 나면 붙어 다니던데 나 몰래 물고 빨지는 않는지 확인해 봐야지.”
“그거 굉장히 추잡한 외사랑이군요.”
우뚝. 오스카가 걸음을 멈추었다. 창백한 얼굴에 한기가 맴돌았다.
“내 마음은 그깟 천박한 마음보다 훨씬 숭고해, 안셀. 단순히 외사랑 같은 게 아니야.”
“후작님은 신이 아닙니다. 이렇게 닿지도 못할 것을 억지로 가지려고 하시면 결과는 좋지 못할 겁니다.”
안셀이 조용히 덧붙였다. 오스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너는 평소처럼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해. 산 채로 데려오지 못한다면 죽여서라도 데려올 테니까.”
오스카는 그 말을 남기고 바로 순간 이동 마법을 걸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고위 마법이었지만 오스카는 한 번에 해냈다.
주변이 바뀌고 익숙한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오스카는 시계 종탑 기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이었다.
글레멘드 저택은 워낙 커서 여기서도 충분히 보였다. 무엇보다 딱 에스티아가 머무는 방 창문을 멀리서나마 마주 보는 곳이었다.
그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저곳에서 에스티아가 곤히 자고 있는 걸 상상한다.
여린 몸이 꼼지락거리고 하얀 목덜미 위로 머리카락이 사르륵거린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물론 그걸 대공이 탐한다고 생각하면 대공이든 에스티아든 죽이고 싶어지지만.
-잠을 잘 못 잡니까, 에스티아?
-후작님, 제 말 못 들으셨어요? 다시는 후작님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다시는 후작님과 이야기할 일도 없을 거예요. 이게 다 후작님 때문이라고요!
-에스티아,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당신이었어요.
안 그래도 죽어 가던 얼굴이 더 창백해졌었다. 오스카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지금이라도 단념하고 나한테 와요. 나한테 오면 후작저는 모두 당신 거예요. 내가 에버하르트보다 황홀하게 해 줄 수 있는데.
-이 더러운…….
에스티아의 작은 얼굴이 혐오로 물들었다. 오스카는 그마저도 자신을 향한다면 좋았다.
이왕이면 살아 있는 채로 갖고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녀가 끝까지 대공을 선택한다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살았든, 죽었든 꽃은 꽃이니까.
오스카는 하염없이 에스티아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비로소 대공에게 정을 떼든, 그러지 못해 결국 죽어 버리든. 그한테는 그렇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새드 엔딩은 두 주인공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신만의 해피엔딩을 만들 생각이었다.
에스티아, 좋은 꿈 꿔요.
이제 그마저도 어려워질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