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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5화 (76/141)

75화 - 당신이 원하는 대로

에스티아는 이불을 꼬옥 안고 있었다. 이번에도 결국 새벽 일찍 깨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과거를 꿀 거 같으면 억지로라도 꿈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탓이었다. 에스티아는 협탁에 놓아둔 향초의 냄새를 조용히 들이마셨다. 은은한 냄새가 마음을 달래 주었다.

새벽 5시. 에스티아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전령을 통해 베리아 가에 급보를 보낸 결과, 카로드산에 언제든 가도 된다는 허가를 받았다. 에스티아는 카로드산에 가기 전에 체스넛을 만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데는 그녀의 덕이 컸으니까.

잠시 머릿속에 대공이 스쳐 지나갔지만 에스티아는 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에스티아는 검은 면바지와 하얀 셔츠를 입은 뒤, 그 위에 검은 로브를 걸쳤다. 그런 다음 머리를 위로 틀어 올렸다. 귀족 영애가 이렇게 입는 걸 알면 다른 귀족들은 기함을 할 테지만, 그러든 말든. 에스티아는 이제 타인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베리아 가로 향했다. 상단은 먼저 카로드산 초입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아침 9시에 그들을 만나기로 했고 지금은 겨우 새벽 6시였으니 시간은 넉넉했다.

“이안!”

에스티아가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안을 향해 인사했다.

“정말 가실 겁니까, 아가씨?”

“응, 괜찮아!”

“이러다 쓰러지시면 집 밖으로 못 나갈 줄 아십시오.”

이안이 이를 으득 갈았다. 살벌한 기세에 에스티아는 잠깐 움찔했지만 곧 태연한 기색을 띠었다.

“걱정하지 마. 완전 전문 산악인같이 다녀올 테니까.”

에스티아가 싱긋 웃으며 마차로 향했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에스티아는 역시 대공이 그녀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신했다.

“오셨어요, 영애.”

체스넛이 에스티아와 응접실의 또 다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에스티아는 안색이 너무 창백해서 탈이었고,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은 너무 뻔뻔해서 탈이었다.

“왜…….”

에스티아가 소파에 앉아 있는 이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왜…… 대공 전하가 ‘아직도’ 여기에 계시는 거죠?”

도르륵. 대공의 시선이 에스티아의 집요한 눈빛을 피해 창가 쪽으로 움직였다. 체스넛이 그런 대공을 힐끔 보더니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몸이 너무 안 좋으시다고…… 며칠 머물고 싶다고 하셨어요…….”

후. 에스티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여기서 체스넛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무려 대공작이라는 사람이 아프다고 버티는데 쫓아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역시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그가 그러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저 바보 같은 대공이 이 상황을 예측하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분명 카로드산에 가기 전에 그녀가 체스넛을 만나고 갈 거라는 걸 예상하고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기사단장이라는 분이 저리 약해서야.”

절로 미운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옆에서 체스넛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어 애써 참았다. 에스티아가 미안하다는 마음을 담아 체스넛에게 눈빛을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더니 눈을 데구루루 굴렸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소 백작님으로부터 편지가 왔다고 했는데! 죄송하지만 잠깐 편지만 읽고 와도 될까요?”

정말 둘러대기 위한 거짓말인 게 뻔히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조금도 그녀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게 자신들 때문이니.

“그럼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체스넛은 에스티아에게 진심 어린 감사가 묻어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는 응접실을 나갔다. 나중에 제대로 사과해야겠다고 다짐한 에스티아는 바로 찌릿 대공을 째려보았다. 대공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전하.”

“……예.”

그 와중에 대답은 했다. 에스티아가 성큼성큼 걸어 바로 대공의 앞에 섰다. 그가 살짝 흠칫하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이 관계의 주도권은 저에게 있는 게 아니었나요? 오늘은 딱히 전하와 만날 생각이 없었는데, 근무 태만으로 레이한테 일러바쳐도 될까요?”

“레이?”

아무래도 잠을 못 자 피곤했던 걸까.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레이븐의 애칭을 입에 담았다. 신하의 입장에서 충분히 지적할 만한 부분이다 싶어 무례했다는 말을 하려던 에스티아는 대공의 눈빛을 보고 말을 삼켰다.

저렇게 대놓고 질투하는 눈빛을 보내면 어쩌자는 거지. 에스티아는 순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거 같아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니, 폐하한테 말한다고요. 무려 황실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적은 없습니다.”

대공이 언제 그녀의 눈치를 보았냐는 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티아는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요. 베리아 영애 불편하게 만들지 말고.”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습니다.”

대공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에스티아의 눈앞에 대공의 탄탄한 어깨가 가까이 다가왔다. 덕분에 에스티아는 다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영애 얼굴 보려고 여기 있었던 거니까.”

“정말 뻔뻔하시네요.”

잠시 당황하던 에스티아가 마음을 가다듬고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대공 전하를 보기 싫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저일걸요.”

“……그렇습니까.”

대공의 눈가가 아래로 축 처졌다. 에스티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짜증 나. 짜증 난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그래도.”

그러자 대공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은은하게 간지럽혔다.

“폐하를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에스티아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대공이 상체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질투 납니다.”

“진짜.”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무시할 때는 실컷 무시하다가 버림받을 거 같으니까 다시 매달리고. 거기에는 상대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죠?”

“그건…….”

“이러면 전하께서 그토록 조롱하고 경멸하던 과거의 저와 뭐가 다른가요? 제가 다른 남자와 같이 있으면 혹시 제가 그랬던 것처럼 그럴 생각인 건가요?”

“……! 아닙니다!”

그의 얼굴이 슬픔에 젖은 채 일그러졌다. 그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매혹적으로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압니다. 지금 이 상황이 영애를 불편하게 만들고 부담을 주고 있다는걸요. 그렇게 영애를 힘들게 하고 모욕감을 주다가 이제 와서 이러는 거, 어이없고 화가 나실 거라는 걸 압니다. 근데…….”

대공의 눈가가 발갛게 충혈되었다. 보니 이 남자도 밤새 한숨도 못 잔 거 같았다.

“무서웠습니다. 영애의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거 같았습니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세요, 영애.”

에스티아는 다시 한숨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꼿꼿하던 사람이 이제 와 무너지면 어쩌자고.

“사실 지금 생각을 정리 중이에요. 과거를 잊고 싶으면서도 모르는 게 있으니 불안하고, 전하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지만 난 내 약점을 알고도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요.”

“…….”

“당신이 내 옆에서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다는 가학심도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직 결정을 못 내리겠어요.”

“…….”

“나 봐요. 내가 죄책감 때문에 당신 더 피하는 거 보기 싫으면.”

번쩍. 대공이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떨리는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에스티아가 손을 내밀었다.

“지금 나랑 같이 베리아 가를 나서겠다고 약속해요. 그럼 용서할 테니까.”

대공의 표정이 사르르 풀렸다. 그러고는 마치 수줍은 소년이 처음 하듯 조심히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예, 당신이 원하는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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