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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6화 (77/141)

76화 - 현혹

원하는 대로는 무슨. 카로드산을 간다고 말하자마자 대공은 마치 고양이 같은 눈빛을 하고는 에스티아를 쳐다보았다. 마치 모 애니메이션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같았다. 에스티아는 그저 한숨을 내쉬었을 뿐이지만 이안은 거의 물어뜯을 듯이 대공을 보고 있었다.

“아가씨, 산에 가시는 것도 안 되지만 이분을 데려가는 건 더 안 됩니다.”

대공의 시선이 매섭게 이안을 향했다가 다시 에스티아로 돌아왔다. 다시 그녀를 볼 때는 순하디순한 고양이로 돌아와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영애. 대공도 동행했다는 말이 퍼지면 상단에 나쁠 게 없습니다. 그만큼 보증된 상단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반대로 안 좋게 소문이 날 수 있겠죠. 전하와 제가 어떤 추문에 휩싸였는지 모르세요?”

에스티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스퀘일러 상단은 황제 폐하께서도 보증해 준 상단입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대공작이 동행한다는 말까지 들으면 스퀘일러 상단은 앞으로 더 승승장구하겠죠.”

“현혹되지 마세요, 아가씨.”

이안이 두 사람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를 보는 대공의 눈빛이 다시 날카로워졌다.

“지금이야 굽히고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막상 길들여 놓으면 언제 또 물지 모릅니다.”

“지금 남작이 날 개 취급하는 겁니까?”

“누가 전하보고 개라고 했습니까?”

이안이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남자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다.

“난 도대체 남작이 왜 이 대화에 끼어드는지 모르겠군요.”

“저야말로 전하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가씨와 무슨 사이라고요?”

윽. 대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대로 허를 찔린 듯한 기색이었다. 그 표정을 본 이안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가시죠, 아가씨.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요.”

“구질구질…….”

그 말이 꽤 여운이 남았는지 대공이 조용히 읊조렸다. 에스티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자.”

“잠깐만!”

그렇게 등을 돌리려는데 대공이 다급하게 그들을 붙잡았다.

“하라는 거 다 하겠습니다.”

“예?”

이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번에는 무슨 수작이냐고 묻는 거 같았다. 대공은 그런 이안을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티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따라가게 해 주신다면 영애의 소원을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뭐 저런…….”

이안은 저도 모르게 내뱉었다가 상대가 대공이라는 걸 깨닫고 애써 입을 닫았다.

“소원……이요.”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무슨 의도를 갖고 얘기한 건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눈치챈 대공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정말 순수하게.”

대공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영애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럽니다. 다치실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으엉?”

이안의 눈이 저 정도로 커져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동그래졌다. 누가 봐도 ‘저놈이 뭔 말을 한 거야’라는 표정이었다. 이안은 에스티아에게 시선을 건넸다. 이 상황이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그저 저랑 같이 있고 싶어서 제 소원을 하나 들어주시겠다고요?”

에스티아가 앞으로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빙긋 웃었다.

“예.”

대공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다시는 제 앞에 나타나지 말라는 소원이래도요?”

“그건……!”

대공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옆에 이안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갈급한 손짓으로 에스티아의 소매를 붙잡았다. 아무래도 과거에 그가 그녀에게 자주 하던 행동인 듯하여 에스티아는 기분이 묘해졌다.

“부디 그것만은……. 절 얼마든 괴롭혀도 좋으니까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제발. 마지막 말이 거의 속삭임처럼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소매를 잡은 대공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진짜 에스티아에게 동화되기 시작했다면 시시때때로 드는 불안감을 설명할 수 있었다.

그 불안감은 곧 두려움과 관련되어 있을 테고, 그 두려움은 이 멍청이 대공과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좋아요.”

어차피 언제까지 글레멘드 가문의 영애로 있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저택으로 돌아온 로셸 글레멘드가 어떻게 조치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 바일’이라는 카드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가씨!”

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이안이 펄쩍 뛰었다. 에스티아는 진정하라는 듯 그를 바라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이건 어쩌면 자신의 불안감을 달래기 위한 변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형처럼 대공을 옆에 둔다고 그가 저항할 수 있을까. 지금에서야 속죄하듯이 매달리는 이 남자가?

“좋아요.”

에스티아가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면서 손은 냉정하게 대공의 손을 소매에서 떼어 냈다. 그마저도 그녀의 촉감이 잠시 자신의 손에 닿자 그는 그 온기를 단비처럼 받아들였다. 안도감에 대공은 눈을 질끈 감았다.

“대신 너무 가까이 걷지 마세요. 부담스러우니까. 가자, 이안.”

“아니!”

이안이 황망하게 에스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매섭게 대공을 노려보았다. 으득. 하여튼 저 대공은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이안이 몸을 홱 돌려 에스티아의 뒤를 따랐다.

대공은 숨을 훅 하고 내뱉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혹시라도 정말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워서 뛰었다.

대공은 빠른 보폭으로 두 남녀를 따라갔다.

에스티아를 놓칠 순 없었다.

* * *

에스티아는 마차가 아닌 말을 탔다. 태어나고 나서 말을 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마차보다 말이 빠를 거 같다는 이안의 말에 그와 함께 말에 올랐다. 대공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덕분이었다.

에스티아는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이안은 그걸 기민하게 알아채고는 부드럽게 말을 몰았다. 처음에는 덜덜 떨던 에스티아는 점점 말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이안이 그녀에 맞게 천천히 말을 몰았기 때문이었다. 이걸 보는 누구의 마음이 바싹바싹 타들어 갈 거라고 생각하니 더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이안의 말대로 확실히 말을 타고 오니 카로드산 초입에 더 빨리 도착했다. 그들을 따라 말을 타고 온 대공도 말에서 내렸다. 대공이 올 줄 몰랐던 상인들은 기함했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그들을 안심시켰다.

상인들은 저들끼리 쑥덕쑥덕 거리더니 걸음을 옮겼다.

“얼른 가자, 이안.”

에스티아는 이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매서운 시선이 맞잡은 두 손으로 날아들었다. 에스티아는 힘찬 발걸음으로 산길을 올랐다. 오늘은 약초 이외에도 찾아야 할 게 있었다.

펄 브릴리안트. 오스카 후작은 카로드산에 그 꽃이 있는 거 같다고 했다. 사실 그 꽃을 찾을 수 있을지 긴가민가했지만 어찌 되었든 찾아 주기로 한 대가로 후원을 받았으니 에스티아는 그 몫을 해야 했다. 아마 꽃을 찾게 된다면 더욱 그 후작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이안.”

에스티아가 이안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이안이 불안한 표정으로 에스티아의 키에 맞춰 몸을 숙였다.

“전하의 눈을 다른 데로 돌려 줄 수 있을까?”

“예?”

이안의 미간에 진하게 주름이 잡혔다.

“아니, 별건 아니고 저 사람 계속 보는 게 부담스러워서.”

“…….”

이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수십 개의 잔소리가 함축되어 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게, 왜 따라오라고 하신 겁니까. 부담스러우시면서.”

“소원까지 들어준다는데 그냥 넘기기 아쉽잖아. 걱정하지 마. 아무래도 완전히 연 끊는 건 힘들어서 조금씩 정 떼려고 그래.”

에스티아가 이안의 손등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원체 여동생 같은 주군이라 곧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정말이죠?”

“그러엄!”

에스티아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찝찝함이 들었지만 주군의 명령인지라 이안은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틀었다.

“멀리 가시면 안 됩니다. 위험한 곳 가시지 마시고, 가파른 데 가지 마시고, 또…….”

“아이고! 알았어, 알았어!”

에스티아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이안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대공에게로 향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에스티아는 자신에게 분배된 바구니를 들고 상인 폴에게 다가갔다.

“폴! 나는 저쪽 가서 살펴볼게요.”

“예, 여기는 지형이 그리 험하진 않지만 그래도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혹시 어려운 일 있으시면 바로 부르시고요!”

넉살 좋은 폴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에스티아는 마주 미소 짓고는 자신이 가리켰던 곳으로 향했다. 나무가 무성해서 간간히 가지를 잘라 줘야 했지만 에스티아는 계속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실 처음에 카로드산에 펄 브릴리안트가 있는 거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 산에 도착하고 나니 에스티아는 알 수 없는 예감에 휩싸였다. 왠지, 그 꽃을 찾을 수 있을 거 같다는 짙은 예감이.

에스티아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가져온 얇은 끈을 틈틈이 나무에 달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문 산악인들은 괜찮지만 초보인 에스티아가 걱정된 상인들이 준비해 준 작은 실 뭉치였다. 에스티아는 그걸 손에 소중히 꼭 쥐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이럴 수 있을까. 마력이 없는데. 그때처럼 그 꽃의 기운이 느껴질 수 있는 걸까?

예상대로 에스티아는 한참을 헤맸다. 실 뭉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초조함이 극대화될 때쯤 저 멀리 푸른빛이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에스티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빛을 향해 다가갔다.

그 꽃은 전에 오스카 후작이 줬던 꽃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왠지 말을 건네고 있는 듯했다. 어서 오라고, 네 기억이 여기에 있다고. 내가 네 기억을 찾게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이 소설에 빙의한 것부터가 말이 안 된다. 에스티아가 긴장한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꽃이 속삭이는 대로 정말 기억이 나는 듯했다. 언젠가 푸른색의 꽃을 보며 행복해했던 거 같다. 에스티아는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생소한 느낌이었으나 동시에 그리운 느낌이었다. 꽃의 유혹은 너무 달았다.

어서 와. 꽃은 계속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에스티아.’

펄 브릴리안트는 선명한 파란빛을 띠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꽃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다음 꽃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꽃은 그저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에스티아의 눈에는 정말 꽃이 자아를 갖고 움직이는 거 같았다. 어서, 어서 자신을 데려가라고. 그럼 너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에스티아는 다짐했다. 이제 곧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도 절대 흔들리지 않겠다고. 에스티아의 손이 꽃잎 끝에 살포시 닿았다. 꽃잎이 몸을 낮추며 그녀의 손길을 반겼다.

에스티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고 있었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에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꽃줄기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펄 브릴리안트의 꽃말. ‘당신이 날 사랑해 줘서 기쁩니다.’

언뜻, 오스카 후작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날 사랑해 줘, 에스티아. 그럼 너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테니.’

날 사랑해 줘, 에스티아.

그래, 이 목소리는 분명 후작의 목소리이다.

꽃은 진심으로 그녀의 사랑을 반기는 것처럼 그녀의 손에 부드럽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꽃의 유혹은 열쇠일까, 함정일까. 그 무엇이든 에스티아는 이 꽃에 실마리가 있다는 걸 확신했다. 오스카 후작이 그녀가 이 꽃을 찾게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에스티아는 기꺼이 유혹이자 함정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그가 시간을 되돌렸다면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와도 분명 관계가 있을 테니까.

위험한 꽃이라면 꺾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여린 아름다움을 가장한 꽃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에스티아는 첫 히아신스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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