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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7화 (78/141)

77화 -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는 아무래도 자신이 더 욕심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말 위에 올라탄 에스티아 뒤로 남작이 탔을 때는 속이 뒤집혔으니까. 정말 치졸한 질투라서 그는 스스로가 한심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둘 사이를 아주 오랫동안 질투해 왔다. 에스티아와 남작은 거의 16년째 남매처럼 지내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남작을 언제나 친오빠처럼 생각했고 남작은 에스티아를 주군이자 자신의 여동생으로 생각했다.

둘은 서로를 대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둘이 장난식으로 안고 손잡는 걸 중간에서 떼놓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럴 수라도 있었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베리아 가에서 급하게 말을 빌린 그는 에스티아와 남작의 뒤를 열심히 쫓아가고 있었다. 그가 알고 있는 바로는 에스티아는 말이 처음일 텐데 별로 무서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남작과 이야기를 나누며 종종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미치겠네.’

정말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남작이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그녀가 이름을 불러 줘서 주군도 시기하고 있는 마당에 남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작은 언제나 그녀의 옆에 있었고 그 사실은 항상 그의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에스티아와 남작은 서로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그저 그녀 옆에 자신보다 더욱 가까운 남자가 있다는 게 싫었다. 유치한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2년 전 그 사건 이후, 그 마음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더 강해졌다. 자신은 쓸데없이 자존심이 강했고 동시에 미련했다.

그때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옆에 착 붙어 있을걸.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지독한 초조함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때때로 그녀와 죽어라 싸우더라도 결국에는 그녀의 옆에 있을 수 있었을 것을.

말고삐를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스티아는 기억을 잃은 이후로 오히려 더 행복해 보였다. 마치 새장에 있던 새가 훨훨 나는 것처럼 자신만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그 길을 응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거기에 그가 없다면…….

‘안 돼, 안 돼.’

대공이 이를 꽉 물었다. 그는 말의 속도를 높였다. 혹시라도 시야에서 그녀가 사라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그걸 감지한 남작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남작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피식 웃었다. 그의 속이 다시 한번 뒤집혔다.

하여튼 저 남작은 예전부터 얄미웠다. 만약 결혼이라도 했으면 또 모르겠는데 남작은 에스티아를 보필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전히 결혼을 안 하고 있었다. 키도 훤칠한 데다가 성격도 다정한 편이라 안 그래도 귀족 영애들한테 인기가 많은데 그런 사람이 딱 에스티아의 옆에 붙어 있었다.

게다가 남작은 칼라일 백작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다. 때마침 칼라일 가문의 대가 거의 끊길 지경에 이르면서 백작 작위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다. 근데 그마저도 에스티아 때문에 거절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신분이 낮아야 에스티아가 더 편하게 부릴 수 있을 거라면서.

충심이겠지. 주군이라 그런 거겠지 해도, 에스티아가 남작을 보면서 환하게 웃을 때마다 그는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걸 느꼈다.

-나한테만 웃어 줘, 티아.

이전에는 그럴 때마다 그는 에스티아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칭얼거렸다. 그걸 본 사용인들은 기함을 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에스티아만 자신을 바라봐 준다면 세상이 그를 외면해도 상관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매달린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얇은 줄이라도 잡은 채로 갈급하게 매달린다.

물론 남작이 말에서 에스티아를 내려 주기 위해 그녀의 허리를 잡을 때, 혹시라도 그녀가 넘어질까 손을 꼭 잡고 있을 때 속이 바싹바싹 타는 듯했지만 견딜 만했다. 아, 물론 에스티아가 남작 귀 가까이 입술을 갖다 댈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다정하게 속삭이는지. 그에게 닿았던 에스티아의 따뜻한 온기가 남작에게도 닿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마조마함은 배가 됐다.

그때 남작이 에스티아를 등지고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남작이 다가오건 말건 에스티아를 따라가려고 했지만 그 앞을 남작이 막아섰다.

“저랑 얘기 좀 하시죠.”

남작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속에서 울컥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내가 남작하고 할 얘기가 있습니까?”

“저랑은 할 이야기 많으시죠. 설마 전하께서 아가씨와 나눌 이야기가 많으시겠습니까. ‘아무 사이’도 아닌데?”

정말 상황만 된다면 남작이랑 검을 빼 들고 싸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검술 마스터였으니 쉽진 않겠지만 제대로 대련을 해서라도 속을 풀고 싶었다. 그만큼 남작은 적잖이 그를 열 받게 했다.

“‘아무 사이’인지 아닌지는 영애와 내가 정해야 할 일입니다. 남작이 간섭할 건 아니죠.”

“주군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올바른 길을 가시게 하는 것 또한 신하의 도리입니다. 아닙니까?”

으드득. 대공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따라오라고 하셨지 가까이 오라고 하시진 않았습니다. 아가씨를 부담스럽게 하지 마십시오, 대공 전하.”

남작이 그를 타이르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지만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한 짓이야 옆에서 본 남작이 제일 잘 알 테니.

“이번만큼은 상단이랑 같이 온다는 핑계로 오셨을지는 모르지만 다음부터는 아가씨와 같이 있는 건, 가급적으로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가씨도 결혼을 하셔야 하는데 전하 때문에 못하면…….”

“결혼?”

잠자코 듣고 있던 대공의 눈빛에 살기가 맴돌았다.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한다고?

“아가씨도 언젠가 결혼을 하시겠죠. 정략결혼을 하시더라도 본인을 충분히 존중해 주는 사람과, 혹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아가씨께 충분히 사랑을 주실 만한 분과 가족을 이루시겠죠.”

“남작.”

“그러니.”

이안이 비릿한 미소마저 거두고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이 이상 아가씨를 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오. 만약 아가씨가 대공 전하 때문에 위험해진다면 그때는 계급이 문제가 아닐 겁니다.”

당장 그를 베어 버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명백한 경고였다.

그는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아무런 말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그러나 단단한 벽 앞에서 그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안은 옆에서 다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준 치욕과 모욕을. 그때마다 이안이 얼마나 세상 무너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알고 있다.

“이안…….”

그래서 그는 충동적으로 옛 친우의 옛날 호칭을 불렀다. 남작의 표정이 더욱 싸늘하게 얼어붙는 게 보였지만 그는 다시 그 이름을 불렀다.

“이안……. 약속을 못 하겠습니다. 난…… 이렇게라도 에스티아를 보지 않으면 안 돼요. 당신 입장에서 웃기고 어이없고 내가 혐오스럽겠지만, 그게 안 돼요. 난…….”

울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그걸 억지로 삼켜 냈다.

“이기적이라는 거 압니다. 내가 생각해도 나만큼 미친놈이 없는걸.”

“그걸 안다면 이만 아가씨를 놓아주십시오. 그게 두 분을 위한 겁니다.”

그가 절박하게 말하자 이안의 표정이 풀어지긴 했지만 그도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을 다잡은 에스티아가 다시 이 남자 때문에 괴로워하는 걸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는 건 에버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합니다. 난…… 모든 걸 잃더라도 에스티아만은 못 놔요. 알잖아요, 이안.”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다 천천히 뜨면서 말을 이었다.

“정작 2년 동안 미련하게 맴돈 게 누구였는지, 알잖아요.”

“하지만…….”

“당신은 내가, 더는 에스티아와 엮이지 않길 바라겠지만 에스티아와 내 관계는 쉽게 끊어질 수 없어요. 설령 끊어질 운명이라고 해도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바꿀 거고.”

“…….”

이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간절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에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이 미련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안은 잠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공의 눈에도 이안의 머뭇거림이 보였다. 그는 더 얘기하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에스티아를 찾으러 가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그의 시야에 절대 못 보려야 못 볼 수가 없는 실루엣이 걸렸다.

대공은 황급히 이안을 지나쳤다. 이안이 본능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그녀밖에 안 보였다.

바구니에 뭔가를 소중히 넣고 오는 에스티아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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