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사랑하는 척하면서
에스티아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나뭇가지에 달아 놓았던 실들을 수거했다.
그럴 때마다 시선이 꽃을 넣어 둔 상자로 향했다.
얼마큼 걸었을까. 드디어 이안과 상인들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약초를 캐 오신 겁니까?”
흰 사모예드가 외출했다가 돌아온 주인을 반기는 것처럼 대공은 한달음에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네…… 그렇죠.”
에스티아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그를 지나치려는데 대공이 불안한 얼굴을 한 채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왜 그러세요?”
이제는 별로 놀랍지도 않아서 에스티아가 평온한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닙니다만…… 약초가 아니라 무슨 꽃 같던데…….”
“…….”
그건 또 언제 봤지. 에스티아가 어쩌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그게 꽃에서 나오는 듯하여……. 혹시 제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대공은 몹시 공손한 투로 물었지만 에스티아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요’였다. 다만 그가 미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혹시나 정말 이 꽃이 위험한 꽃이어서 대공에게 피해가 갈까 봐 염려되기도 해서였다. 어찌 되었든 오스카 후작과 그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녀가 알아내야 할 일이었으니까.
“아뇨, 그냥 약초에요. 버지니아 약초는 아니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찾고 있던 거예요. 뭔가 착각하신 거 같네요.”
“아니, 아닌 거 같습니다.”
물러설 줄 알았던 대공이 그녀의 말에 바로 반박했다. 역시 마법을 다룰 줄 아는 기사구나 싶어 에스티아는 내심 감탄했다.
“분명 그 꽃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에요. 제가 제대로 느낀 게 맞다면 좋은 기운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래서요?”
에스티아가 담담히 그의 말에 반문했다.
“이게 뭐든 제가 찾던 약초에요. 좋은 기운이든, 안 좋은 기운이든 전하께서 상관하실 바가 아니에요. 잊지 마세요. 여기 따라오게 한 조건은 제 일에 간섭하지 않는 거였다는걸.”
“압니다, 아는데. 왠지 이 꽃이…… 제가 떠올리는 사람과 연관이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윽. 누가 소설의 남주 아니랄까 봐.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에스티아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무슨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하느냐’라는 의미로 웃은 거지만 심장은 긴장감으로 바싹 조였다.
“혹시…… 영애께서 방금 가져온 ‘약초’가 오스카 후작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에스티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 나오는 걱정과 다정함이 에스티아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제가 뭘 하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오스카 후작과 연관 지으시는 건가요?”
에스티아가 부러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아직 그런 뻔뻔함은 없는 거 같았다. 그래서 대신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전이었으면 냉정하게 답했을 대공이 지금은 펄쩍 뛰었다.
“그럴…… 리가요! 제 말은, 영애가 이 약초를 캐 온 시기가 딱 오스카 후작의 후원을 받고 난 다음 아닙니까. 시기가 그래서 혹시나 하고 여쭌 겁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전하의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하면 다 오스카 후작 때문이겠군요?”
“그럴 리가요……. 제발 그렇게 받아들이지 말아 주세요. 전 그저 영애가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걱정되면 한 가지 여쭐게요. 전하께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오스카 후작 때문에 전하와 제 사이가 틀어진 건가요?”
대공은 대답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답은 하진 않았지만 그게 곧 긍정임을 에스티아는 눈치챘다.
“정확한 이유는요?”
이렇게 묻긴 했지만 사실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다만 당당하게 답할 자신 없으면 앞을 가로막지도 말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털어놓으시기에는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럼 말씀하시지 말든지요.”
시니컬하게 말한 에스티아가 그의 옆을 지나쳐갔다. 그렇게 그를 뒤로하고 가려던 에스티아는 걸음을 뚝 멈췄다. 또다시, 마음속에서 잔학한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끊임없이 그를 불안하게 하고, 초조하게 만들고 싶다는 기학한 욕망이 고개를 들었다.
“아, 하지만 어쩌면 아주 일부는 맞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안 그래도 오늘 오스카 후작을 만나러 가려고 했거든요.”
“뭐라고요……?”
역시나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 대공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성큼성큼 에스티아에게로 다가왔다. 딱 봐도 불안함과 질투심이 넘실거리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왜 가시는 겁니까? 남작과 같이 가시는 거겠죠?”
“아뇨, 저 혼자 가는데요.”
“영애!”
겨우 평정심을 찾은 거 같던 대공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에스티아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이 사람은 화가 나면 얼굴이 빨개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얘지는구나. 화가 나면 곧 달려들 것처럼 말을 뱉는 게 아니라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구나.
“부디…… 부탁이니 제발 남작하고 같이 가 주십시오. 솔직하게 말하면 영애가 미혼인 남성 집에 홀로 가는 것도 미칠 거 같지만 오스카 후작은 위험하다고요.”
“그건 전하의 추측이고요.”
“아, 제발.”
대공이 떨리는 두 손을 뻗었다. 에스티아는 그저 대공이 무너지는 걸 지켜보며 그의 손이 자신의 어깨에 닿는 걸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것이 허락의 의미라는 걸 눈치챈 대공이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는 얇은 어깨에 이마를 대었다.
다행히 이안이 상인들을 다른 데로 물린 턱에 숲에는 오직 두 사람만 있었다.
“그래요, 오스카 후작 때문이 맞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 관계가 어긋나고 당신과 저는 그대로 망가졌어요. 지금 당장 오스카 후작이 당신을 위험하게 만들진 않겠지만 서서히 조여 올 겁니다. 그걸 저보고 그대로 지켜보라고요?”
그의 옅은 은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에스티아의 목을 간질였다. 오늘 날씨는 비가 별로 오지 않았고 여름치고는 선선한 편이었다. 나무들이 바람과 몸을 비비며 쏴아 하는 소리를 뱉어 냈다. 에스티아의 긴 머리도 바람에 몸을 맡겼다.
“그때 관계가 어긋났을 때 분명 전 당신에게 매달렸겠죠.”
“…….”
“당신을 날 외면했고.”
“…….”
에스티아의 어깨를 잡은 대공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에스티아가 그런 대공을 밀어내며 말했다.
“전하의 간곡한 요청도 있으니 이안과 함께 갈게요. 근데 딱 여기까지. 전 이안과 바로 오스카 후작저로 향할 거예요. 전하께서도 부디, 무탈히 돌아가세요.”
“연락,”
대공이 단호한 음성이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에스티아는 대답 없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등 뒤로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 * *
애초에 혼자 가겠다 한 건 단순히 대공을 괴롭히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이안과 함께 오스카 후작저를 방문한 에스티아는 이번에도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집사 안셀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갔다. 다만 응접실에는 에스티아 혼자만 들어갔다.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과 마주 앉자마자 꽃이 든 상자를 내밀었다. 후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손으로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어 안을 살펴보는 손짓이 조심스러웠다.
“감사합니다, 영애. 한 번 보셨다더니 정말 찾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근데…… 괜찮으신 건가요? 저희 가문 소속의 마법사가 상자를 보더니 안 좋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하던데……. 조금 걱정되어서요.”
걱정하는 척하면서 에스티아는 슬쩍 꽃의 기운에 대해 물었다. 후작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뚜껑을 닫았다.
“마력이 꽤 오랜 시간 봉인되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상하기 쉬운 음식을 실온에 둔 것처럼요. 그건 그렇게 놔둔 사람이 잘못이지, 음식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이상하게 어감이 묘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짐짓 침착한 척 컵에 든 차를 마셨다.
“그나저나 힘드시겠네요. 갑자기 공격을 받아서 마력이 흩어진 것뿐만 아니라 꽃에 봉인되기까지 하다니. 그것도 찾기 힘들어 ‘전설의 꽃’이라 부르는 꽃에.”
“제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이죠. 진작 싹을 잘라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목 뒤로 따뜻한 차가 넘어갔다. 에스티아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자는 에스티아가 기억을 잃은 걸 알고 있다. 그걸 대공에게 말했지만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일부러 그녀가 겁먹길 바라는 것처럼 다소 센 어감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일을 저한테 맡기시다니 놀랐어요. 후작님께는…… 정말로 큰 상처를 드렸었는데요.”
그래서 궁금했다. 만약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척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만약 꽃을 만져서 기억이 돌아온다는 걸 그가 알고 있다면 분명 그 상황을 통해 얻는 게 있을 것이다. 그걸 알면 그가 꽃을 찾으라고 굳이 그녀에게 부탁한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큰 상처는요.”
오스카가 에스티아를 꿰뚫듯이 쳐다보았다.
“영애라면 얼마든지 줘도 괜찮습니다.”
오스카 후작이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에스티아는 그 미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초에 그가 그녀가 기억에 없는 거까지 알고 있다면 순순히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대공에게 쓰는 방법을 그에게도 똑같이 쓰기로 마음먹었다.
“에버하르트처럼 다정하시네요.”
에스티아가 짐짓 씁쓸한 척 웃어 보였다. 대공의 이름이 어색하게 혀끝을 타고 입 밖으로 나왔지만 어쩌면 오스카 후작에게는 그게 중요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대공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작은 대공을 도발했다. 그가 괴로워하길 바라면서.
그 말은 그녀가 그를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소리이다.
만약 정말로 후작이 그녀가 대공을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에 집착하고 있다면 추측이 가능한 이유가 하나 있었다.
후작은 어쩌면 에스티아를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면 에스티아는 당당히 다가오지 못하고 다른 비겁한 수를 쓰는 그 사랑을 짓밟을 생각이었다.
짐짓 대공을 사랑하는 척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