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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79화 (80/141)

79화 - 글레멘드 공작

효과가 아예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아주 미약하게나마 드러났다고 할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후작의 눈빛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언제나 평온하던 눈빛에 어떤 감정이 일렁이고 점점 짙어지고 있다는걸.

오스카 후작은 스스로가 노련하고 여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억지로 이기려고 했다가는 승산이 나지 않는다. 그들이 제일 화를 나는 순간은 그들을 이기려고 할 때가 아니라 그들을 믿지 못할 때이다. 그러니 그들을 믿지 못한다는 증거를 살살 흘리거나 그들 자신을 향한 믿음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면 된다.

오스카 후작은 에스티아가 기억을 잃음으로써 -사실은 빙의했기 때문에 없다고 보는 게 맞았지만- 에버하르트 바일을 향한 사랑도 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대공의 이름을 꺼내 들었다. 질투는 사랑을 증명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으니까. 그만큼 사람의 마음은 연약하고 그래서 유치하다. 에스티아는 후작의 연약함을 노렸고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에버하르트…….”

후작이 대공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옳다구나. 에스티아가 그런 후작의 반응을 보고 일부러 표정을 아련하게 지어 보였다.

“대공 전하와는 이제 연이 없으신 줄 알았는데…….”

후작이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언뜻 보면 일말의 동요도 없는 태도였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그것이 오히려 동요를 숨기기 위해 하는 행동임을 알아챘다.

“사적인 연이어야 그렇죠. 하지만 공적으로는 계속 봐야 하고…… 게다가 10년 넘게 해 온 짝사랑이 하루아침에 끝날 일도 없으니까요.”

손수건만 있다면 눈물을 찍는 시늉이라도 했을 텐데 아쉬웠다. 대신 에스티아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두 검지로 꼼지락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반응으로서는 해 봄 직 했다.

“그것참, 마음고생이 심하시겠군요.”

안타까움이 담긴 후작의 음성이 에스티아의 귓가에 닿았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씩 웃었다. 오랜 시간 사업가로 지내면서 눈치에는 훤했다. 평온한 음성에는 미약하지만 시기와 질투가 살짝 묻어 있었다.

“그렇지만도 않아요. 어찌되었든 그분과의 추억은 소중한걸요.”

“소중하다고요?”

후작의 옅은 미소가 흔들렸다. 아주 찰나였지만 그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은 걸 에스티아는 분명하게 보았다.

“사랑하는…… 아니, 사랑하던 사람이니까요.”

에스티아는 의도적으로 말을 한 번 틀리게 했다. 사실상 빙의만 안 됐으면 계속 사랑했을 테니까. 물론 그랬다면 에스티아가 남주 에버하르트를 포기할 일도 없었겠지만.

“제가 영애를 도와 드릴 수 있을까요?”

“네? 어떻게요?”

에스티아가 오스카 후작을 향해 맑은 눈을 들어 보였다. 그가 그 눈빛을 똑바로 마주 보며 미소 지었다.

“글쎄요.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영애께 도움이 될는지요. 다만 절 얼마든지 이용하셔도 좋습니다. 안 그래도 영애도 걱정이 될 거 아니겠습니까? 대공 전하 옆에는 엄연히 약혼자가 되실 분이 계시니까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 후작은 메르헨을 입에 담았다. 그것부터가 그가 의도적으로 대공과 자신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해 대공에게 그런 말을 속삭였다고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죠. 이제 메르헨은 저에게 소중한 친구고 그러니 더더욱 대공 전하와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죠. 그래야겠죠…….”

에스티아가 아련한 척 말끝을 흐렸다. 오스카 후작의 한쪽 눈썹이 위로 살짝 올라갔다. 그걸 본 에스티아는 눈물을 짜내기 위해 슬픈 상상을 머릿속에 그려냈다.

“그렇다면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절 이용하세요. 영애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후작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에스티아는 겨우 짜낸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후작님께 폐를 끼칠 순 없죠.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의 눈에 ‘당신이 청혼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동시에 ‘나는 아직도 에버하르트 바일에게 미련이 남았다’,

그런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후작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혹시 생각이 바뀌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에스티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먼저 덫을 놓고 그녀는 그걸 물었다.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미끼를 놓았다.

이제 저 베일에 싸인 후작이 덫 안에 있는 치즈를 물 차례였다.

* * *

메리는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녀는 연신 본관 현관 앞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에스티아에게 한시라도 빨리 전할 말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지체되었다가는 에스티아가 무슨 화를 당할지 몰랐다.

그렇게 한 20분 동안을 전전긍긍하며 기다리고 있을 때 마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메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에스티아가 마차에서 내릴 때까지 기다렸다.

에스티아의 모습이 보이자 메리는 두 손을 꼭 맞잡고 후우 하며 숨을 골랐다. 이안과 함께 우산을 쓰고 오던 에스티아가 현관 앞에 나와 있는 메리를 보며 의아한 기색을 띠었다.

“메리? 날씨도 안 좋은데 왜 나와 있어.”

“아가씨!”

메리가 반가움을 온몸으로 표출하며 계단 앞까지 내려갔다. 그에 에스티아는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본관 안으로 들어갔다.

“왜, 메리. 무슨 일 있었어?”

“그게…….”

메리가 슬쩍 이안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이안의 표정이 뭔가를 눈치챈 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두 사람이 수상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둘 사이에 무슨 비밀이라도 있어?”

“아가씨.”

이안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에스티아를 마주 보았다. 심상치 않은 이야기구나 싶어 에스티아는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가씨한테 말씀 안 드린 게 있습니다. 지금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 가능하실까요?”

“그래, 대신 내 방으로 가자.”

다행히 에스티아는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안과 메리는 그 사실에 안심하며 에스티아의 뒤를 따랐다.

방으로 들어간 에스티아는 자신의 방에 있는 의자 3개를 끌고 왔다. 그러더니 이안과 메리에게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자, 여기서 앉아서 얘기하자.”

“네? 이렇게요?”

메리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그래도 주인인 아가씨와 이렇게 허물없이 마주 앉아도 되나 싶었다. 그런 메리의 마음을 알아챈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편하게 얘기하고 싶어. 급한 이야기라면 더더욱 형식을 갖출 필요는 없으니까.”

“그러죠, 메리.”

에스티아가 진심임을 단번에 알아본 이안이 메리에게 먼저 의자를 권했다. 메리가 쭈뼛거리며 의자에 앉자 이안도 따라 착석했다. 에스티아가 얼른 말해 보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 표정을 보니 더없이 여동생 같아서 이안은 마음이 아려왔다.

“사실 아가씨 몰래 알아본 게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아가씨께서…… 보고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말씀을 못 드렸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괜히 아가씨 심기를 어지럽힐까 봐 좀 더 확실해진 다음에 말씀드리려고 했고요.”

부연 설명이 긴 것 보니 꽤 심각한 사항인 듯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아마 전에는 이안의 말대로 에스티아가 보고받을 상태가 아니었을 것이다. 한창 사랑의 열병을 앓는 와중이었을 테니.

“어떤 이야기인데?”

“다름이 아니라…….”

이안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의 입술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가주님에 대한 일입니다.”

* * *

에이커는 다리를 쩔뚝거리며 상사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스퀘일러 상단과 산행을 갔다 온 상사의 상태가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어떤 연락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처럼 연신 저택 안을 잰걸음으로 돌아다녔다.

문제는 아무리 그에게는 잰걸음일지라도 에이커한테는 따라잡기 힘든 보폭인지라 에이커가 꽤 고생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안 그래도 겨우 회복하자마자 주군의 상태가 전보다 안 좋아졌는데 오늘은 아주 가관이었다. 에이커는 그 이유가 글레멘드 가의 공작 영애 때문이라는 걸 쉽게 유추해 냈지만 그렇다고 딱히 뾰족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전하…… 좀 천천히 걸어 주세요…….”

자신의 간병에 지극정성이었다기에 좀 감동하려고 했더니 이렇게 또 고생을 시키신다. 에이커는 픽 한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잠시 걸음을 늦추는 듯하더니 다시 속도를 높였다.

“벌써 점심이 다 되어 가……. 지금 벌써 2시간이 지났는데.”

에이커는 맥이 빠져 걸음을 멈추었다. 그 영애께서 어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날씨에는 어딜 가든 편도에만 기본 몇 십 분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겨우 2시간 가지고 저러다니.

‘알 만하신 분이 왜 그러실까.’

“에이커.”

“예! 전하!”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온 건가 싶어 에이커가 정자세로 차렷했다.

“……아니야.”

환장하겠네. 에이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뒤를 쫓아다녔을까. 바일 가문 소속의 기사가 빠른 걸음으로 대공에게 다가왔다.

“전하, 급히 전해 드려야 할 소식이 있습니다.”

“……뭔가.”

대답은 했지만 전혀 궁금해 보이진 않았다.

“글레멘드 관련 소식입니다.”

“뭔데.”

하지만 ‘글레멘드’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홱 몸을 돌렸다. 살짝 고개를 젓던 에이커는 순간 어떤 예상이 스쳐 지나가면서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글레멘드 소유로 보이는 마차가 수도 안으로 진입을 했다고 합니다. 문양은 없었지만 바퀴 모양을 보니 글레멘드 가문의 것입니다.”

그 말인즉슨,

“글레멘드 공작이 돌아왔습니다.”

기사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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