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부녀
에스티아는 이안으로부터 기나긴 이야기를 들었다. 에스티아가 대공에게 품은 마음으로 인해 점점 망가졌을 무렵, 로셸 글레멘드가 저택을 비웠다. 사용인들은 내심 안심했지만 이안은 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에스티아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사용인, 메리와 카린과 함께 가주님의 뒤를 캐기로 결심했다. 메리와 카린은 귀족 영애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는 연줄이 많았다. 이안은 소드 마스터라 그와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집요하리만치 공작의 행적을 주시했다. 그 결과, 공작이 콘스 왕국으로 가는 거 같은 제보를 받았다. 그때쯤 되니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주님…… 아니, 아버지한테…….”
에스티아가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따로 연인과 아이가 있다는 거지?”
차마 그 단어를 입에 담기가 그래서 에스티아는 애써 다른 단어로 대체했다. 이안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때 정부가 있으셨고 그 사이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정부의 이름은 헤이즐 자인. 남작입니다. 오라버니가 있었지만 병으로 일찍 죽어 가주 자리를 이어받았고요.”
“그럼 딸은?”
에스티아가 침착하게 마음을 다독였다. 지금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면 이안과 메리가 불안해할 거 같았다.
“딸은…… 에이셀 자인입니다. 17살이고 현재 홀로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걸로 확인됐습니다. 워낙 헤이즐 자인이 딸을 데리고 철저히 몸을 숨겨서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리셨던 거 같습니다.”
17살. 에스티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야기를 많이 들은 건 아니지만 벌써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아마 이안이 그런 상황까지 확인했을 정도면 이미 공작은 그곳에 갔다가 돌아오는 중일 것이다.
“그러니 너의 말은 아버지께서 정부와 아이를 찾으러 갔다는 거지? 사랑에 눈이 먼 딸을 대신할?”
이안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거기서 바로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에스티아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에이셀 자인만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아이만 데려온다니?”
심상치 않은 말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정보망을 통해 알아보니 원래는 헤이즐 자인은 그대로 집에 두고 오시려고 했답니다. 근데 에이셀 자인이 어머니는 무조건 데려가야 한다고 매달렸고요.”
“그래서?”
절로 이가 갈렸다. 로셸은 병든 정부는 버리고 가문의 후계를 이을 아이만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다.
“집에서 데리고 나온 듯한데 그 이후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인 남작 영애와 갈라진 거 같습니다.”
하. 에스티아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정부의 아이가 딸이어서 둘을 그냥 버려 버린 것이다. 그러다 에스티아가 점점 미쳐 가니 후계를 이을 패로서 갑자기 필요해진 것이고.
그 사람한테는 자식은 그저 장기말인 것일까. 마음속에 진한 씁쓸함이 스며들었다.
처음 로셸 글레멘드가 저택을 비웠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경우의 수였긴 했다. 분명 원작에서 나온 묘사나 사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그 상황에 집을 비울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구간 관리인이 말하길 원래 같았으면 ‘에스티아를 독방에 가두고 심리적으로 고문했을 거’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집을 비운 가장 강력한 이유는 바로 이거라고 생각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를 갈아치우려는 거야.’
그래서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증명해 후계자로서는 버려지되 가문의 일원으로서는 버릴 수 없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한 때 사랑했을 정부를 버리고 자식만 데려올 정도로 혈안이 된 사람이라면 과연 그녀의 뜻대로 흘러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티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빙의 이후로 제일 강력하고 무서운 상대를 만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안.”
“네.”
강인한 대답이 들려왔다. 에스티아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날 지켜.”
에스티아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 전처럼 독방에 갇힐 생각도 없어. 사랑에 빠져서 미칠 생각도 없고. 만약 아버지께서 날 가두려고 한다면 난 필사적으로 그걸 거부할 생각이야. 그러려면 네가 필요해.”
“그럼,”
이안이 의자에서 일어나 에스티아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저 명령만 내려 주십시오. 그게 무엇이든 저는 주군의 명령을 따를 것입니다.”
에스티아는 그 모습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슬픔이 깃든 미소였지만 두려움은 사라진 웃음이었다.
“만약 아버지께서 날 정말 포기하신 거고 그것도 모자라 평생 집 안에 가두려고 한다면,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버지를 이길 생각이야. 남들이 진흙탕 싸움이니 뭐니, 그딴 소리 해도 상관없어.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주군.”
이안이 더욱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했다.
“저도 끝까지 아가씨를 따르겠습니다.”
메리가 일어서더니 허리를 굽혔다. 에스티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둘 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 아주 미친년처럼 나갈 생각이니까.”
에스티아가 결연하게 말했다.
* * *
에스티아가 미리 준비한 건 칼이었다. 에스티아는 공작이 저택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로비에 이안과 함께 서 있었다. 메리와 카린은 미리 상단으로 피신을 가 있게 했다. 혹시라도 공작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다칠까 봐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마차가 본관으로 이어진 마찻길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티아는 귀가 밝았다. 이쯤 되니 지금 들려오는 마차 소리가 평소에 듣던 소리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래, 어디 얼굴 좀 봅시다.’
그렇게 딸을 못살게 군 아버지 얼굴 한번 보자.
에스티아는 속으로 열심히 칼을 갈았다. 그렇게 5분가량을 본관 문을 노려보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면서 어두운 로비 안으로 회색빛이 흘러들어왔다.
“공작 각하 드십니다.”
에스티아는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었다. 미리 공부한 대로가 맞다면 지금 목소리는 글레멘드 가의 집사 인터스였다. 로셸 글레멘드의 충신 중에서도 손꼽히는 충신.
문이 활짝 열렸다. 모자를 벗은 채 긴 로브를 걸친 공작과 집사 인터스, 기사들이 줄지어 로비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기세가 형형했다. 마치 누군가를 제압하러 오는 사람들처럼.
“오셨어요.”
에스티아가 두 손에 팔꿈치만 한 칼을 들고 싱긋 웃었다. 싸늘한 갈색 눈동자가 그녀의 손으로 향했다가 다시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에스티아 글레멘드.”
시리도록 차갑고 감정이 묻어 있지 않은 음성. 차가운 갈색 눈동자만큼이나 서릿발 같은 눈빛이었다. 뒤로 넘긴 갈색 머리카락은 바람에 살짝 흐트러져 있었지만 고압적인 분위기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천박한 일을 하고 다닌다더니, 아예 미쳐 버린 게냐.”
“그러는 가주님께서는 혼자 오셨나요? 듣기로는 동행이 있으시다고 하던데. 같이 안 오셨나요?”
“아가씨, 후일을 생각하신다면 이만하시죠.”
집사 인터스의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어디 집사가 주인들 이야기에 끼어드는가.”
“…….”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인터스에게 향했다. 집사 인터스의 한쪽 눈썹이 팔자로 휘어졌다. 30대에서 40대 사이에 있는 듯한 얼굴에 험악한 기운이 감돌았다. 에스티아는 집사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로셸 글레멘드를 쳐다보았다.
“이미 소식을 다 알고 오셨으니 지금 여기서 이야기하시죠. 이미 아버지께서 제 이복동생을 콘스 왕국에서 여기로 끌고 온 것을 압니다. 제가 상단 일도 하고 있는 것도 알고 계실 테고요. 그 아이를 후계자로 들이실 생각이신가요? 그럼 절 가문에서 파하시고 정식으로 들이시죠. 그리고 저는 놓아주시고요.”
“미친 것.”
로셸 글레멘드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원래도 제 어미를 닮아서 멍청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지금대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래, 요새 벌이 부족했지.”
미치기는 아주 지가 미쳤구먼. 에스티아가 허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그걸 본 인터스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글레멘드 공작님.”
에스티아가 차가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로셸의 미소가 점점 희미해졌다.
“사랑이 없는 벌은 학대입니다. 전 공작님의 벌을 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제안드릴 수 있는 건 두 가지입니다. 앞으로 제 앞날을 통제하지 않는 것, 만약 그럴 수 없다면 절 가문에서 파하시는 것, 이렇게 두 가지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거랑 얘기해 봤자 시간 낭비이지만, 오랜만에 보니, 그래, 받아 주마.”
로셸이 한 손을 들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에스티아와 이안의 주변을 둘러쌌다.
“후계자로서는 대공에게 팔 좋은 상품이고, 그냥 글레멘드로서는 황제가 후원하고 있는 상단의 대주주인데 버리긴 아깝지 않느냐.”
그가 에스티아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벌을 받으면 다시 나아질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일러 더욱 독한 환각과 환청을 보여 주라고 하면 되겠구나.”
“그럼 전, 전처럼 공작님의 순하디 순한 딸로서 팔려 가는 건가요? 그저 그런 귀족 영애로 남으면서?”
“아예 짐승이 된 건 아닌 모양이로구나.”
에스티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동안 ‘에스티아’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아왔을지 선연히 그려졌다.
에스티아가 검집에서 칼을 빼 들었다. 그걸 본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에 손을 올렸다. 이안이 그들을 살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에스티아가 검을 쓰려고 팔을 들었다. 이안도 검을 빼 들 준비를 했다.
그들은 계획을 실천할 생각이었다. 긴 그림자가 로비 바닥을 가르는 걸 보기 전까지.
“에스티아.”
익숙한 음성이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렸다. 에스티아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로셸도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칼 내려놓으세요, 위험합니다.”
로셸 글레멘드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라보는 이는,
에스티아가 그토록 싫어하고 또 싫어하는,
에버하르트 바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