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추락
에스티아는 잘 알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회일수록 작은 하나만 어긋나도 무너진다는걸. 지금 하는 짓이 미약한 발버둥일지라도 뜻을 드러내는 데 충분할 것이다.
“대공께서는 여긴 어떻게…….”
로셸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얼굴을 펴더니 에스티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돌아본 눈빛에는 ‘네가 아예 쓸모없는 애는 아니구나.’라는 말이 담겨 있었다.
“일단 글레멘드 공, 기사들을 무르시지요.”
로셸도 키가 꽤 큰 편이었지만 대공 옆에 서니 원래 키보다 작아 보였다.
“제 딸을 보러 오신 건가요? 그렇다면 잠시 응접실에 가서 기다리고 계시겠습니까. 한 10분이면 됩니다. 아시다시피 저 아이가 요즘 정신이 이상해서.”
“말을 가려 하시지요, 글레멘드 공.”
대공의 목소리에 살벌한 기운이 서렸다. 그에 로셸의 한쪽 눈썹이 팔자로 휘었다.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듯했다.
“이상하군요, 대공께서 저 아이를 감싸는 거 같다고 느끼고 있다면 제 착각이겠지요.”
“착각이 아니라 제대로 보신 겁니다.”
에스티아가 대공의 표정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혹시 에스티아가 학대 받았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공작의 행적까지 미리 조사하고 있었다는 건가?’
에스티아는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그렇게 조롱하고 경멸하더니 뒤에서는 계속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을 학대하고 방치하니까. 그리고 저 바보 같은 남자는 그 딸을 ‘미워’하고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달려오려고 했고.
근데 어떡할까. 지금부터 그녀가 할 짓은 저 아버지 같지 않은 사람과 그한테서 벗어나기 위해 하려는 짓인데.
‘꽉 막힌 귀족 사회가 이럴 때 도움이 되는구나.’
“공작께서 요즘 제 딸아이를 귀히 여겨 주신다는 건 알지만 지금 이렇게 끼어들어 봤자 좋으실 건 없을 겁니다. 본디 가축을 집에 들일 때는 온순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거든요.”
칼을 쥔 에스티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좋게 말해서는 말귀를 못 알아먹는 아버지셨구나. 에스티아는 칼을 두 손으로 쥐고는 고개를 탁 들었다.
“웃기고 있네, 진짜.”
에스티아가 하 하고 웃었다. 로셸과 대공은 물론 집사 인터스, 기사들의 시선이 에스타에게로 쏠렸다. 대공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들의 눈빛이 ‘제정신이냐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공의 눈도 커져 있긴 했지만 말이다.
“좀 더 빨리 오시지 그러셨어요. 그럼 또 어떻게 될지 몰랐을 텐데. 지금은 제가 하극상을 벌였으면 벌였지 순순히 당신 말에 따라 줄 생각이 없거든요.”
“에스티아, 입 다물어라.”
로셸의 날카로운 눈빛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그 안에는 사랑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들어 있지 않았다.
“공작님이야말로 조용히 좀 하세요.”
“뭐……·?”
그제야 로셸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에스티아의 행동이 단순한 객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챈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하물며 사장님 가발도 벗겨 봤는데 겨우 당신한테 이렇게 못 할까. 과거 에스티아가 당한 것까지 합해서 제대로 혈압을 올려 줄 계획이었다. 에스티아는 검집에서 칼을 뺐다. 스르릉. 칼날이 빛에 반사되어 선명하게 빛났다.
“에스티아.”
아무래도 저 남자는 놀라기만 하면 얼굴에 핏기가 가시는 모양이었다. 또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봐 에스티아가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요. 자해하려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그의 심장은 에스티아가 칼을 뽑아 든 이후로 거세게 뛰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요즘 들어 그녀의 행동을 유추하기가 영 힘들었으니까. 그나마 로셸 글레멘드가 다치는 거라면 상관없었지만 그녀의 손에 피가 묻는 게 싫었다.
“공작님.”
에스티아가 고개를 틀어 로셸을 바라보았다. 단 숨에라도 에스티아를 짓밟을 듯한 차가운 얼굴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어디 밖에다 내놓으려면 꽤 오래 기다리셔야겠네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귀족 사회에서는 긴 머리가 귀족 여성의 상징인데, 딸이 긴 머리가 아니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에스티아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검청색 머리를 한 손으로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칼을 꼭 잡고 있었다. 무게가 많이 무거웠지만 그동안 짊어져 온 삶의 무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죽하면 모 영애가 정신을 놓자 그 아버지가 머리를 단발로 잘라 버리고 집에 가두었다고 하는군요.”
에스티아가 손으로 잡고 있는 검청색 머리카락을 내려다보았다.
“근데 전 제정신이거든요. 공작 각하.”
에스티아가 머리를 바짝 잡아당겼다. 검청색 머리카락이 탱탱하게 일직선을 그렸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에요. 에이셀 자인을 저 대신 공작 영애로 들이시거든 명심하시라고요.”
에스티아가 머리카락 가까이로 칼을 가까이 갖다 댔다. 그녀는 칼날을 아래로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에스티아는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그대로 칼날을 아래로 내렸다.
* * *
이 아이디어는 흘러가듯이 나온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저 어느 날 겨우 스며든 꿈속에서 그 남자를 보았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그 위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생일 때 뭘 갖고 싶어, 티아?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내려놓고 그녀의 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에스티아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내 옆에 있어 주면 돼.
-왜 이렇게 욕심이 없어.
그가 칭얼거리는 투로 말하며 에스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따스하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에버가 옆에 있어 주는 거랑 어머니의 건강이 낫는 걸 뿐인걸.
-그래? 그러면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어야겠네.
그 말에 에스티아가 풋 웃었다.
-정말?
-그럼. 네가 원하는 거면 뭐든.
그가 에스티아의 이마의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손이 머리를 쓰다듬더니 그녀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러니까 말만 해. 네가 원하는 건 다 이루어 줄 테니까.
그의 입술이 쪽하고 에스티아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에스티아가 자신의 긴 남색 머리카락을 꼬옥 잡았다. 설렐 때마다 나오는 에스티아의 습관이었다. 이 습관은 그하고 있을 때만 나타났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다 못해 터질 거 같았다. 그 손을 그의 다른 손이 붙잡아 왔다. 그가 닿는 곳에 온기가 깊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 알았어. 내가 갖고 싶은 건…….
싸악.
그녀의 손에서 짙은 달빛을 닮은 머리카락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의 숨결과 자신의 짙은 떨림을 담은 머리카락이 힘없이 그녀의 손에서 멀어져갔다. 긴 머리카락이 한곳에 떨어지면서 작은 연못을 이룬 듯했다. 이제는 아무것도 담지 않은 껍데기뿐인 추억만이 거기에 있었다.
에스티아가 칼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소드 마스터인 이안이 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 * *
작전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에서 만약 로셸이 저택에 오자마자 에스티아를 제압하려든다면 실행하자는 방법이 바로 지금 상황이었다.
에스티아가 머리를 자르면 기사들이 한눈을 파는 사이 이안이 로셸한테 달려든다. 그러면 기사들은 당연히 그쪽으로 몰려들 테고 그사이 에스티아는 메리와 함께 뒷문으로 빠져나간다.
공작이 전처럼 에스티아를 제압하거나 그녀를 버린다고 해서 에스티아의 인생이 큰일 나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잠시 공작을 피해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 판단했다.
유일한 변수는 그 자리에 대공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에스티아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에스티아를 쫓아오려는 기사를 대공이 막는 걸 보았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던 기사는 대공이 앞을 가로막자 당황하며 우뚝 섰다. 그 이후에는 피하느라 보진 못했지만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린 걸 보면 제대로 제압을 한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뒷문에서 메리와 인사한 뒤 말 위에 올라가 있는 사용인에게로 다가갔다.
“데인!”
에스티아가 사용인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사용인은 에스티아를 발견하자 말 위에서 내려오더니 그녀를 말 위에 올려 주고는 자신도 뒤에 탔다. 과거부터 에스티아를 충실히 따르던 사용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에스티아의 작전에 참가했다.
그렇게 달리기 시작한 말 뒤로 밖으로 나온 기사들이 다다닥 다가왔다.
“멈추십시오!”
한 기사가 외쳤다. 그 목소리를 당연히 무시하려던 에스티아는 귀를 찌르는 굉음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히이잉. 말이 큰 목소리로 울더니 몸을 크게 틀었다. 사용인의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에스티아는 결국 사용인을 놓쳤다. 에스티아는 떨어지면서 깨달았다.
총, 총을 쏜 것이다. 에스티아는 흙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윽…….”
온몸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에스티아는 몸을 덜덜 떨었다. 가문의 기사들이 그 가문의 영애가 탄 말에 총을 쏘았다. 그 현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에스티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을 짚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고통에 잠긴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그사이 다시 철컥하고 총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악!”
그렇게 더 큰 고통이 오나 싶던 차, 그녀를 조준하던 기사가 비명을 질러댔다. 타닥타닥. 말 한 마리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에스티아!”
대공이 한 번에 말에서 뛰어내려 에스티아를 안아 들었다.
“이 개자식이…….”
대공이 낮게 욕을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품에서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대공이 그런 그녀를 먼저 말 위에 앉히고는 자신도 뒤에 앉아 바로 말을 몰았다. 주인의 말을 잘 듣는 말은 바로 앞을 향해 달려갔다.
기사들은 방금과는 달리 말을 향해 총을 쏘지 못했다. 그의 동료가 거의 반쯤 잘린 어깨를 부여잡기도 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무려 제국의 대공작을 다치게 할 순 없었다. 그 사실이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겨우 의식을 부여잡고 있는 에스티아가 힘없이 그의 상체에 몸을 기댔다. 대공은 왼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하게 끌어안고는 한 손으로 말을 몰았다. 기사단장이 되기 위해 승마를 제대로 익힌 게 다행이다 싶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는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지금은 에스티아를 한시라도 빨리 치료하는 게 먼저였다.
에스티아는 괜찮을 거다, 괜찮을 거다. 괜찮아야만 한다.
그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