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부상
-그거 알아요, 에버?
그의 귓가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괜히 애꿎은 사람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요.
마음 같아서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한 손에는 에스티아를 안고 있을뿐더러 그 소리는 귀를 막아서 듣지 않을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였으니까.
-그러니까 잘 생각해요.
그는 이를 아득 물었다. 과거에도 에스티아가 말에서 떨어졌던 적이 있었다. 하필 그 부근이 절벽 근처여서 자칫 잘못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아마 그 사건이 그의 인생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나중에 말을 확인해 보니 꼬리 쪽에 작은 화살촉이 박혀 있었다. 성분을 조사하니 마취제가 묻어 있었다.
그 사람 짓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그녀가 얼마나 다쳤는지를 떠나서 그에게는 정말 끔찍한 순간이었다.
-뭐가 문제에요, 에버? 지금껏 잘해 왔잖아요. 왜 갑자기 무너지느냐고.
또다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고삐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 밑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손톱이 박힌 손바닥보다 타들어 가는 심장 쪽이 더 아팠다.
그녀가 죽을 바에는 차라리 그가 대신 그 악마의 손에 죽는 게 나았다. 그러면 그녀도 잃지 않을 수 있고 그 위선적인 가면을 벗길 수도 있을 테니까.
그러니 죽으면 안 돼, 에스티아.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죽으면 안 된다고, 에스티아.’
그가 속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저 멀리서 익숙한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말이 카페 앞에서 멈춰 섰다. 그의 황제가 마련해 준 이 카페는 그가 허락해 준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 바일 저택으로 갈 수 있었지만 어차피 그의 황제한테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었다.
카페에서 중년의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선대 황제의 전 시종장인 ‘칸’으로, 지금도 레이븐을 자식처럼 여기는 남자였다. 전에는 일부러 카페를 비워 주었기에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잡힌 ‘만남’이 없었기 때문에 카페에서 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가 바로 이 카페의 주인이었다. 나이가 있어 더는 시종장은 못하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레이븐을 모시고 싶다는 그의 요청에 황제는 그에게 카페 하나를 차려 줬다. 사실 카페를 가장한 은밀한 회의장인 만큼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전하, 무슨 일입니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노신사답게 칸은 당황하지 않고 말을 향해 다가왔다.
“칸, 이 사람이 많이 다쳤어요. 빨리 치료해야 합니다.”
의연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그걸 눈치챈 칸이 위로 두 팔을 뻗었다.
“자 제가 받치겠습니다. 2층으로 모시지요.”
칸은 거의 칠십이 다 된 노인이었지만 다부진 몸을 갖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그에게 에스티아를 조심스럽게 넘기자 칸이 흔들림 없이 에스티아를 안아 들었다.
그는 바로 말에서 내려 다시 에스티아를 자신의 품으로 안았다. 아까보다 의식이 흐려진 에스티아가 아래로 축 팔을 늘어뜨렸다. 칸이 울타리에 말을 묶는 사이 에버하르트가 단번에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큰 다리로 2층 계단을 한숨에 올라가며 그는 계속 에스티아에게 말을 걸었다. 대개 괜찮을 거다, 다 왔다, 이제는 안전하다, 등의 말이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무너질 거 같아서.
에버하르트는 침대에 조심스레 에스티아를 뉘였다. 에스티아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열이 확 오르고 눈앞에 어지러웠다. 안 그래도 삐끗했던 오른 손목이었다. 그런데 낙마하면서 오른쪽 손목은 아예 혹이 생긴 것처럼 부어올랐고 팔꿈치 쪽에는 피까지 나고 있었다.
계단에서 칸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옆에 구급상자를 놓고 에버하르트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전하, 동요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로는 죽지 않습니다.”
레이븐이 태어날 때부터 봐 온 칸은 당연히 에버하르트의 어린 시절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그때의 어린아이가 떨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렇게 다쳤던 적이 없었습니다.”
에버하르트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렸다. 칸은 널찍한 두 어깨를 양손으로 집었다.
“잘 들으세요, 전하. 전하가 이렇게 진정하지 못할수록 아가씨가 더 위험해질 겁니다.”
그 말에 에버하르트가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잘 아시겠죠?”
칸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깨가…… 어깨가 탈골된 거 같습니다. 일단 어깨 고정부터 해야 해요.”
그 와중에 피가 난 상처가 깊지 않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소매를 걷어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그렇게 심하진 않았지만 여전히 피가 나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구급상자에서 긴 천 하나를 꺼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어깨를 직접 맞추어 주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더 안 좋아질까 겁이 났다. 전시 상황에서야 당장 팔을 못 쓰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맞춰 주었다 해도 지금은 어찌 되었든 안전한 곳에 와 있었다. 괜히 욕심을 낼 필요는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천을 펼친 다음 에스티아의 팔을 움직이지 않게 고정했다. 그 와중에도 자신이 치료받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꾹 참았다.
“잘했어요, 잘하고 있어요.”
에버하르트가 붕대를 매듭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어깨는 탈골됐고 팔꿈치 근처에서는 피가 나고, 손목은 제대로 금이 갔거나 골절이 된 게 분명했다.
의식을 잃지 않았을 뿐이지 상태가 괜찮은 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이 몰려오면서 열이 오르고 식은땀까지 나는 상황이었다.
“아파…… 아파요…….”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조금 올라오며 그녀의 검청색 눈동자가 보였다.
“많이…… 많이 심한 거예요?”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겨우 의식의 끝을 붙잡고 있었다.
“괜찮아요, 치료만 하면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그가 그녀의 뺨을 한 번 쓰다듬으며 상자에서 바늘과 실을 꺼냈다.
“여기 위스키입니다.”
칸이 그의 등 뒤로 위스키가 든 작은 술병을 건넸다. 그는 그걸 건네받았다.
“에스티아, 좀 아플 거예요. 그래도 상처가 깊지 않아서 금방 끝날 거예요. 견딜 수 있죠?”
그가 한 손은 여전히 에스티아의 뺨에 갖다 댄 채 물었다. 에스티아의 검청색 눈동자가 그를 지긋이 응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스티아의 목덜미를 잡은 채로 위스키 잔을 조심히 그녀의 입가로 기울였다. 에스티아가 힘없이 위스키를 받아 마셨다.
에버하르트는 칸과 자리를 바꾸었다. 그녀의 옆으로 이동한 칸이 자신의 어깨에 그녀가 기대게 했다. 에버하르트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봉합에 들어갔다.
에스티아가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단 한 번도 팔을 빼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대견한 마음이 들어 그는 더욱 속도를 높였다. 다행히 봉합은 10분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그는 그 위로 붕대를 감았다.
“전하, 붕대를 더 가져와야 할 거 같습니다.”
칸이 그가 붕대 감는 걸 바라보며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확실히 구급상자에는 더는 붕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주변 의원이나 시장을 다녀올까요?”
“안 됩니다, 이 카페는 주변에서 멀지 않아요. 공작이 아마 이 일대 전부를 뒤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더니 에버하르트가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그는 겉옷의 안감과 겉감 사이에 있는 경계선을 칼로 푹 찔렀다. 그렇게 완전히 안감과 겉감을 구분한 에버하르트는 즉시 에스티아의 손목에 안감을 감았다.
“아!”
에스티아가 고통 어린 신음을 내뱉었다. 울음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타다 못해 썩어 들어가는 거 같았다.
“거의…… 거의 다 됐어요.”
에버하르트가 공포심을 애써 누른 상태로 안감을 두른 손목 위로 겉감을 다시 둘렀다. 매듭을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다 됐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전하.”
칸이 침대 헤드와 에스티아 사이에 있는 쿠션을 다시 잘 놓아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창고에서 더 쓸 만한 것이 없나 찾아보겠습니다.”
칸은 그 말을 끝으로 2층 계단을 내려갔다.
“전하.”
에스티아가 거의 다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에버하르트가 바로 에스티아의 옆으로 이동했다.
“네, 나 여기 있어요.”
“아까…….”
금방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을 억지로 뜨며 에스티아가 말을 이었다.
“아까…… 저와 같이 말을 탔던 사람이 있었어요. 데인이라고…… 18살밖에 안 된 아이인데…….”
에버하르트는 불안했다. 에스티아가 아까보다 식은땀을 많이 흘리고 있었다. 추운지 몸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일단, 쉬어야 합니다. 쉬어야 해요, 에스티아.”
그녀의 뺨에 떨리는 손을 갖다 댔다. 손바닥에 짧아진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네, 부탁드릴게요……. 전 그럼 좀 잘게요…….”
에스티아의 눈이 스르륵 잠겼다. 그가 조심스레 손끝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푹 자요, 에스티아.”
깨어나기만 하면 돼.
그러기만 하면 돼.
그가 침대 천을 꼭 쥐었다. 그 손바닥에선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