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 키스해 줘요
에버하르트는 레이븐에게 급히 전령을 통해 편지를 보냈다. 자신이 은밀하게 의원을 불러올 수 있었지만 공작이 아직 이 일대를 뒤지고 있었다. 가급적 눈에 띄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야 한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사실, 이 모든 건 핑계고 에스티아의 곁에서 떨어지기가 싫었다. 물론 칸이 있긴 했지만 그는 검술에 많이 약했다. 누군가가 여기를 찾지 못한다고 완전히 확신할 수 없으니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 했다.
그렇게 그는 근처 마을에 머물고 있는 전령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레이븐에게 갈 그 편지는 황궁 의원을 여기로 보내 달라는 거였다. 아무리 대공작이라도 황실 의원을 왔다 갔다 하게 하면 안 되었지만 다행히 레이븐은 곧바로 바로 보내겠노라 답장을 해 왔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왼손을 꼭 잡고 그 옆에 살포시 엎드렸다. 칸이 천 주머니에 얼음을 넣어 에스티아의 이마에 올려놓았지만 에스티아의 손은 여전히 뜨거웠다. 그는 그 손을 더 꼬옥 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귓가에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렸다.
“네, 왼손이요. 거기서 피가 나더라고요.”
“다행히 심한 건 아니네요. 약을 바르고 붕대만 살짝 감아 주면 될 거 같습니다.”
에스티아와 칸이 나누는 대화 소리였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잠이 들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무방비하게 잠들었다는 사실에 그가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셨습니까?”
칸이 그에게 자상하게 물어 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약을 바른 그의 왼쪽 손바닥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많이 피곤하셨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이 놀라셨으니까요.”
“네, 그렇…….”
그렇죠, 라고 대답하려던 에버하르트가 반대편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으로 에스티아가 생각난 탓이었다. 에스티아는 안색이 창백했지만 아까보다는 눈동자에 깃든 빛이 선명했다. 에스티아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궁금한 게 많다는 표정이었다.
“전 내려가 있을까요?”
칸이 싱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누가 오래 궁에서 일했던 사람이 아니라고 눈치가 여간 빠른 게 아니었다.
“부탁해요.”
에버하르트가 어물쩡어물쩡거리고 있는데 에스티아가 답했다. 칸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동공이 잘게 흔들리던 에버하르트가 겨우 시선을 들어 보였다.
“아픈 건 좀 어떠십니까? 통증이 심하진 않습니까?”
“아직 좀 아프긴 한데 칸이 진통제를 좀 줘서 괜찮아요. 이안과 다른 일행들이 걱정이죠. 물론 이안이 잘 대피시키고 있겠지만. 데인도 걱정이고요.”
“……혹시라도 소식이 오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아픈 건,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황궁에서 곧 의원이 올 겁니다.”
또 황궁 의원을 부른 거냐고 핀잔을 들을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에스티아는 조용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마음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렇군요……. 근데 손은 언제까지 잡고 계실 건가요?”
“아.”
에스티아의 말에 에버하르트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그…… 일부러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놀라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가 우왕좌왕하며 허공으로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이 항복을 선언하는 거 같아 에스티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돼요?”
이번에는 에버하르트가 눈을 깜빡였다. 그가 엄마 말을 듣는 어린애처럼 고개를 끄덕했다.
“어떻게 딱 그때 저희 저택으로 온 거예요?”
뜨끔. 당연히 물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되니 진땀이 났다.
“그…… 글레멘드 공작이 영애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건 기억하고 계십니까?”
차마 ‘학대’라는 말을 담지 못한 그가 시선을 내렸다.
“네, 알고 있어요. 그래서요?”
“공작이 오랜 시간 저택을 비워 수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닌 거 같아 수도 근처에 사람을 풀어놓았습니다. 공작의 저택이 수도로 진입하거든 알려 달라고 했죠.”
그가 그때 당시를 회상했다. 그날도 에스티아와 미친 듯이 싸웠던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차가 한 대가 아니라더군요. 더 자세히 알아보니 다른 마차에는 여자 하나가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공작과 같은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 혼외 자식이라는 걸 알아챘죠.”
“그러니까 한마디로 글레멘드 가주의 뒤를 캐고 계셨군요.”
“그, 그건…….”
“그래서요?”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가 말 더듬는 걸 가볍게 무시하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글레멘드 공작저로 간 겁니다. 가 보니 그런 상황이었고요.”
“…….”
에스티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혹시 갑작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경우, 그때에 쓸 플랜 B도 세워 놓았었지만 그랬다면 다른 사용인들이 위험했을 것이다. 에스티아가 다칠 경우 몇몇 기사들이 에스티아를 호위하고 뒤쪽에 있는 다른 말을 통해 이동할 생각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후 그들도 몸을 숨기기로 했지만 만약 그마저도 실패했으면 그들은 끔찍한 결과를 면치 못했으리라. 그러니 인정하긴 싫어도 대공의 도움을 크게 받은 셈이다.
“감사해요.”
“……?”
예상치 못한 말에 에버하르트의 눈이 똥그래졌다.
“아…… 아닙니다.”
에버하르트가 얼떨떨해하며 대답했다. 사람 기분 나쁘게 비꼬던 남자는 어디로 간 걸까.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집에서 감금되는 건 면했어요.”
“예…….”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자세히 보니 귓가가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걸 보니 에스티아의 마음이 잠시 술렁였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그 증상을 외면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말씀하세요.”
에스티아가 잠시 속으로 할 말을 정리했다. 아직 몸이 아파서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지 않았다.
“전에 오스카 후작 때문에 우리 사이가 틀어진 거냐고 물은 적이 있었죠.”
그 말에 에버하르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에스티아가 동요의 기색을 띠는 에버하르트를 가만히 바라봤다.
“전에 폐하하고 얘기했을 때는 제가 전하한테 실수하지 않았냐고 떠보았는데 부정을 하지 못하셨어요.”
“…….”
“도대체 2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그때를 떠올리자 다시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당신이 저한테 잘못한 거 맞습니다. 오스카 후작도 그 잘못에 한몫했고요. 그때는…… 당신이 더 미웠지만 이제는 그 사람이 나빴다는 걸 압니다.”
정말 바람이라도 났던 건가. 에스티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역시 과거는 과거대로 묻어 둬야 하는 걸까. 조금은 알아야 한다는 건 오만이었을까. 그녀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바로 상체를 일으켰다. 뺨에 두 손을 갖다 대니 겨우 내려가는 거 같았던 열이 다시 오르고 있었다.
“에스티아! 잠깐만…… 해열제를…….”
“에버하르트…….”
일어서려던 그의 몸이 뚝 멈췄다. 삐걱삐걱 그녀를 돌아보니 그녀의 초점이 다시 흐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다시 과거 속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왼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네, 여기 있어요. 일단…… 푹 자고…… 당신이 물은 건, 당신이 다 나으면 말해 줄게요.”
“에버하르트.”
이런 상황인데도 심장은 눈치 없이 대차게 뛰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아파서 의식이 흐려지고 있는데 마음은 그녀가 한 번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황홀함에 물들고 있었다.
“네, 말해요.”
“키스해 줘요.”
“예?”
다시 한번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한마디에 지금이 나름 심각한 상황인 것도 잊고 그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부상에, 고열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게 분명한 말임에도 그는 흔들렸다. 그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에스티아, 지금은 안 돼요. 당신 지금 열나서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난 좋지만…… 당신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요.”
자신이 감기에 옮고 그러는 건 상관없었다. 그 정도야 쉽게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했으니까.
하지만 에스티아는 달랐다. 그녀는 지금 크게 다친 상황이었고 그로 인해 열까지 나는 상황이었다.
“아파요…… 아파서…… 당신이 날 꼭 안아 줬으면 좋겠어.”
에스티아가 성한 왼팔을 쭉 뻗었다. 에버하르트는 순간 예전 에스티아가 돌아온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에버하르트는 왼손으로 그녀의 턱을 조심스럽게 받치고 입을 맞추었다. 메말랐지만 여전히 그의 영혼을 빨아 당기는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혹시라도 그녀가 숨이 찰까 겉에서만 맴돌며 쪽쪽거리던 그를 에스티아가 왼손으로 그의 칼라를 잡고 잡아당겼다.
연약하지만 매혹적인 손길에 결국 그는 에스티아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두 혀가 얽혀 타액이 질척이는 소리가 2층 다락방을 울렸다. 분명 에스티아가 제정신을 차린다면 후회하겠지만 그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직후, 에스티아는 단잠에 빠진 반면 그는 뜬눈으로 창밖을 멍하니 바라봐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