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어리석은 여자
그는 꽃잎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눈과 귀는 사방에 깔려 있었다. 하지만 사실, 굳이 꽃잎들이 알려 주지 않아도 그 어리석은 남자가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것 정도는 모를 수가 없었다.
어리석기는. 그게 자기 무덤을 파는 일인지도 모르고 그러고 있었다. 그때 그에게 분명히 일렀었다. 시간을 되돌렸고, 그녀는 그 부작용으로 기억을 잃었고 그를 사랑하는 마음도 잊었을 거라는걸. 물론 그자는 조금도 믿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기야 그자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기 이전에 그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메르헨은 에스티아가 그 남자한테 했던 짓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대공이 시간을 되돌리기 전, 그녀에게 한 짓에 비하면 약과였다. 적어도 오스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메르헨은 움직이기 쉬운 패였다. 2년 전에 에스티아가 대공에게 한 짓을 일러둔 뒤, 한동안 대공은 메르헨과 가까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에스티아에게 계속 흔들렸다. 메르헨이 애써 외면하고 있던 진실이었다. 만약에 메르헨이 그가 에스티아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면 그와 손을 잡진 않았으리라.
‘어리석은 여자.’
메르헨은 에스티아를 비웃었지만 적어도 에스티아는 흑마법에 손을 대진 않았다. 적어도 오스카가 악마인 건 알아보았으리라.
흑마법은 대가를 요구했다. 마력이나 생명력. 한 번 흑마법에 손을 대면 그건 거머리처럼 그 사람의 생명을 쪽쪽 빨아먹는다. 메르헨은 그저 악마에 영혼을 팔았을 뿐이리라.
그리고 한 번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이는 뒤로 물러서지 못한다. 오스카는 메르헨이 다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오길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를 더 기다렸을까. 집사 안셀이 그의 집무실의 문을 두들겼다. 정확히 5초 뒤, 안셀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5초 동안 대답하지 않으면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주님. 셰린포드 공작 영애가 찾아오셨습니다. 지금, 응접실에 계십니다.”
드디어 왔구나. 지금쯤이면 아마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2년 동안 그 남자를 곁에 붙잡아 두려고 갖은 애를 썼는데 결국 실패했으니.
“바로 가겠다고 일러. 영애한테 차 한 잔 갖다 주고.”
“예, 가주님.”
안셀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소리 없이 집무실을 나갔다.
오스카는 메르헨이 안쓰럽긴 했지만 중요한 진실을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이다.
* * *
오스카가 오랜만에 만난 메르헨은 거의 살아 있는 시체 같았다. 원래 피부야 여느 귀족 영애처럼 새하얬지만 시체 같다는 걸 그걸 염두에 두고 말한 게 아니었다.
생기라는 게 없었다. 눈에 초점도 없었다. 영혼 없는 인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후작님.”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응접실을 고요하게 울렸다.
“에버가 그 빌어먹을 에스티아에게 돌아갔어요. 2년 전에 한 짓은 생각도 안 하고 돌아가 버렸다고요.”
‘에스티아’라는 이름을 입에 담자 메르헨의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건 명백한 증오와 혐오였다.
“이상하네요. 후작님이 알려 준 대로 에스티아에게 장미꽃을 줬는데 왜…….”
메르헨의 시선이 딱 오스카에게로 향했다.
“왜, 에스티아가 안 죽죠?”
메르헨이 빨리 대답하라는 식으로 그를 노려봤다. 오스카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메르헨. 그건 에스티아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에스티아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용도라고.”
“아무튼.”
메르헨이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런 것치고는 아직 너무 멀쩡하잖아요.”
“서서히 효과가 나타날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찬찬히 기다려 보세요.”
정확히는 생명력을 빨아들여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때쯤 서서히 잊었던 기억이 돌아올 테니. 게다가 그때쯤이면 그녀에게 건 ‘저주’에 대해서도 말해 줄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직‧간접적으로 건넨 모든 꽃은 저주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했으니.
“에스티아가 당신에게 협조해서 꽤 만족해하지 않았습니까?”
“나름 진심인 거 같아서 안심했었죠. 어느 정도 나한테 최선을 다해 준 후에 죽어 주면 딱 좋다고 생각했고.”
오스카가 그녀를 연민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쪽 다리를 꼬았다.
“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될 겁니다. 뭐가 걱정입니까. 제가 얼마 전에 좋은 ‘팁’을 하나 드리기까지 했는데요.”
“아, 뭐, 영애들 납치해서 생명력과 마력 빨아먹는 거요?”
메르헨이 허 하고 헛웃음을 쳤다.
“그걸로는 부족해요! 그걸 재료로 써서 장미에 흑마법을 걸었는데도 에스티아가 안 죽었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대놓고 고래를 절레절레 젓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메르헨이 총명한 줄 알고 있지만 그녀는 그저 멍청한 악마일 뿐이었다.
“물론 스트레스 풀기에 좋기도 했어요. 에버의 약혼자로 거론되는 여자들만 골라서 납치했거든요. 근데 그것도 이제 못 해요! 에버가 언제 눈치챌지 모른다고요.”
아마 이미 눈치재지 않았을까. 오스카가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그냥 대공을 에스티아에게서 더 빨리 떼어놓고 싶다고 말을 하세요.”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나요?”
날을 세우던 메르헨이 조금은 누그러진 자세로 물었다. 오스카가 꼬던 다리를 푸르고 상체를 메르헨 쪽으로 숙였다.
“있죠. 그동안은 꽃으로 간접적으로 저주를 걸었지만 직접 저주를 걸면 더 효과적이죠.”
“그럼 그 방법으로 했어야죠! 왜……!”
“위험하니까요.”
오스카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에게 저주를 걸고 싶으면 당신도 뭔가를 더 걸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마력을 대가로 바치는 거죠.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마법 진을 그려 드리겠습니다.”
메르헨이 이를 으득 갈았다. 그녀도 흑마법에 능통하진 못했지만 마력이나 생명력을 마법 진 소유자인 악마에게 바치면 특정 물체에 저주를 걸 수 있었다. 그럼 그 저주는 그 물체를 받는 상대에게로 넘어간다. 그건 알지만…….
“하지만 빅터, 알잖아요. 여기서 더 마력을 바치면 난 죽어요.”
“마력 말고 일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생명력이 있지 않습니까.”
오스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걸 바친다는 계약서를 쓰세요. 그럼 대신 내 마력을 먼저 대가로 바치겠습니다. 그럼 더 강력한 저주를 에스티아에게 걸도록 하죠.”
“좋아요, 얼마든지.”
“생명력은 곧 영혼입니다. 영혼을 조금씩 잘라 내는 거예요. 그래도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당연하죠.”
메르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는지 오스카처럼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그렇게 에스티아가 아프면 당신에게는 뭐가 좋은 건가요? 그 여자를 사랑하면서.”
메르헨의 눈초리가 그를 캐묻듯 매서워졌다. 오스카가 빙긋 웃었다.
“알잖아요, 메르헨. 에스티아는 날 사랑할 일이 없어요. 그러면 난…….”
오스카가 에스티아의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 여자 시체라도 갖고 싶은 사람이라고.”
“그래요……?”
메르헨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 멍청한 눈은 다시 신뢰를 띄고 있었다.
원래 이 정도로 멍청한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흑마법이 그녀의 마력을 거머리처럼 빨아먹으면서 메르헨은 총기를 잃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반짝임 따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바로 써요, 계약서. 빨리.”
오히려 멍청하게 재앙을 재촉할 뿐.
* * *
다행히 에스티아는 의원의 치료를 받아 금방 회복했다. 다행히 피가 난 상처는 잘 봉합이 된 상태였고 오른쪽 손목도 몇 주 깁스만 하고 있으면 괜찮았다. 어깨는 의원의 전문적인 손길 아래 원래 위치로 돌아갔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가 치료받는 내내 옆에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못 했다. 처음 그녀와 입 맞춘 것도 아닌데도 아까 했던 키스를 생각하면 그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다 되었습니다.”
마무리한 의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낙마한 것치고는 심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당분간 충분히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예, 명심하죠.”
에버하르트가 결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리고.”
의원이 뭐가 생각났는지 품에서 작은 편지지를 꺼냈다.
“이거 폐하께서 전하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폐하께서요?”
레이븐이 편지를 보내왔다는 말에 에버하르트가 바로 편지지를 받아 들었다. 의원이 답을 기다리듯이 떠나지 않기에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편지지를 열어 보았다.
‘에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인사는 생략합니다. 우리야 뭐 얼굴도 자주 보는 사이니까요.’
이런 말 할 시간에 인사를 했겠다. 그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어디에 있으면 안전할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바일 저택도 괜찮지만 그보다 더 안전한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그게 바로 황궁이라고 생각합니다.’
황궁. 확실히 황궁은 감시가 삼엄하다. 대공저도 만만치 않지만 황궁은 그 규모도 남다를뿐더러 무려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에스티아가 아프면 바로 의원이 와서 진찰해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에스티아만 괜찮다면 그녀를 황궁에 모시고 싶어요. 어찌 되었든 우리는 그녀에게 큰 신세를 지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소문이 이상하게 나는 건 막아야겠죠. 제 친조모인 ‘레이첼’이 스퀘일러 상단 대주주인 에스티아가 공작과 갈등을 겪는 게 안타까워 그녀를 불러들였다고, 제가 사람을 시켜 말을 흘릴 겁니다. 이미 레이첼과는 말을 맞춰 둔 상태입니다.’
레이첼 옥티비아 2세. 선황제의 어머니이자 몬터레이 제국의 ‘태후’이다. 가식이 없고 소박한 황실 어른으로, 선황제뿐만 아니라 선 황후에게도 다정했던 사람이었다. 운명이 가혹하여 아들과 며느리를 먼저 떠나보낸 후 레이븐을 아끼고 전폭 지지해 주고 있는 든든한 어른이었다.
레이첼은 심성이 선한 사람이니 에스티아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게다가 에스티아가 황궁에 있다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녀를 보러 갈 수도 있었다.
“좋습니다.”
에버하르트가 편지에서 시선을 들어 의원을 바라보았다.
“전 좋습니다. 영애만 승낙한다면.”
“응?”
자신이 언급되자 에스티아가 홱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 뭐요?”
확실히 치료받고 난 뒤 고통이 줄었는지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기운이 넘쳤다. 눈도 초롱초롱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에스티아가 그걸 한 손으로 든 채 편지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이런 신세를 제가 져도 될까요……?”
그렇게 묻는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어두웠다. 에버하르트가 몸을 낮춘 채 부드럽게 웃었다.
“폐하야 말할 것도 없고 태후 폐하께서는 무조건 황제 폐하 편입니다. 폐하는 영애 편이니 두말할 거 없지요.”
상세한 그의 설명에 에스티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모습도 너무 예뻐서 에버하르트는 넋 놓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좋아요. 그렇다고 계속 신세 지기는 죄송하니 아버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계속 찾아봐야죠.”
“괜찮으시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그 말에 에스티아가 묘한 표정으로 에버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 다 승낙을 받은 의원은 곧바로 카페를 떠났다.
“내일 새벽에 은밀히 떠나죠. 그동안 영애는 눈 좀 붙이세요.”
“전하는요.”
말투는 딱딱했지만 그 안의 뜻은 다정해서 에버하르트가 미소 지었다.
“전 괜찮습니다. 당신만 괜찮으면.”
그의 지긋한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에 머물렀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에스티아는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