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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85화 (86/141)

85화 - 더 이상

찌릿한 고통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의원에게 치료받고 난 뒤 상태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픈 건 여전했다. 에스티아는 왼손으로 침대를 받치며 겨우 상체를 침대 헤드에 기댔다.

키도 큰 사람이 그녀의 옆에서 불편하게 자고 있었다. 등은 창이 있는 벽에 기대고 자고 있었는데 그 자세가 퍽 익숙한 듯 평온해 보였다. 에스티아는 그의 옆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사실 저택에서 일어났던 일은 머릿속에서 희미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탓이었다. 워낙 로셸이라는 인물이 만만치 않은 인물이니 여러 계획은 세워 놨지만, 그중에서 총에 맞을 수 있다는 가정은 없었다. 아무리 그게 말일지라도.

기사가 충동적으로 말에 총을 쏘진 않았을 것이다. 분명 다쳐도 된다고 그 인간이 얘기를 했겠지.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승마를 잘 알지는 못 하지만 적어도 낙마하면 보통 부상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치료는 무진장 아팠지만 어깨 탈골에 약간의 골절 정도면 양반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히려 같이 탄 사용인이 걱정되었다.

“하…….”

천륜을 너무 믿었다. 로셸 글레멘드는 아마 자식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리라. 에스티아는 이를 아득 갈았다.

그나마 다리가 아닌 팔이 다친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걸어 다닐 수는 있으니 상단 일도 계속 할 수 있을 거고 꽃도 찾아다닐 수 있었다.

에스티아가 무릎을 굽히고 한쪽 팔로 두 다리를 끌어 모았다. 조용히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울 일인가. 딸이 말썽을 피운다는 생각이 들면 혼을 내지 누가 죽이려 하냔 말이다.

눈물이 찔끔 나오려고 했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눈물을 삼켰다. 그래도 최악의 상황은 면했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생각했다.

“으음…….”

소리가 들려 옆을 바라보니 대공이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꼬대를 하는 듯했다.

저런 냉혈한도 잠꼬대를 하는구나 싶어 괜히 신기해졌다. 에스티아는 손을 들어 대공의 미간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몸을 움찔하더니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에스티아……?”

그러더니 바로 상체를 일으켜 그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이름 부르지 말라고 쏘아붙일까 하다가 아무리 그래도 도움을 받았으니 그 말은 지금은 참기로 했다.

“제가 깨웠나요?”

“어…….”

“네, 맞아요. 깨우려고 만진 거였어요.”

대답을 고르던 그의 말을 자르고 에스티아가 뻔뻔한 낯빛을 지어 보였다.

“악몽을 꾸는 거 같길래.”

“아…… 네, 맞습니다. 잠꼬대를 했나 보네요.”

냉랭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그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괜히 한 대 때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팔을 뻗었는데 어느새 대공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앞에 보이자 당황한 에스티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열은 많이 내렸네요.”

그의 손이 어느새 그녀의 이마를 짚고 있었다. 다른 손은 자기 이마에 댄 거 보니 체온을 비교해 보는 거 같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미열은 있으니 따뜻하게 입는 게 낫겠어요. 칸한테 영애가 입을 만한 겉옷을 받았습니다. 황궁에는 그걸 입고 가시죠.”

“……소원 카드.”

“네?”

괜히 민망해진 에스티아가 시선을 피했다.

“소원 하나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이번 일로 해 주신 거예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이 사람이 싫어도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미운 말은 덜어 낸 채 담백하게 말했다. 내심 빚지기 싫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꼭 이번에 쓴 걸로 해야 합니까?”

“네?”

이번에는 에스티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공이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침대 맡에 걸터앉았다.

“소원 카드요. 이번에는 그냥 제가 영애를 돕고 싶어서 도왔다고 치고, 다음에 소원 카드 쓰세요. 좋은 카드인데 아껴 쓰면 좋잖아요.”

편안한 말투에 도리어 에스티아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왜 그리 모질게 대했을까.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하라고 하지 않나, 자기 약혼녀 될 사람한테 사과하라고 하지 않나, 너 원래 소문을 생각하라고 하지 않나.

“여전히…… 저희 둘 사이가 틀어진 이유는 제가 다 나으면 말할 생각인가요?”

“……네.”

대공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은 거 같았다. 하지만 에스티아도 물러설 수 없었다.

“왜요? 어차피 잘못은 저한테 있는 거면 전하가 말 못 할 이유는 없잖아요.”

“아뇨, 있습니다.”

축 처진 목소리가 그녀의 마음속에서 고요히 울렸다.

“영애도 짐작하겠지만 단순히 싸우고 풀릴 감정 응어리가 아닙니다. 지금 섣불리 얘기했다가 영애가 저를…….”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영애가 저를…… 더 피하게 되면 어떡합니까.”

“…….”

에스티아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야 그런 말을 하는 저 남자가 괘씸했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두려워하면 뭐한다고.”

“그러게요…….”

에스티아가 혼잣말하듯이 내뱉은 말에 그가 바로 대답했다.

“메르헨은 어쩌고요.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을 하든 안 하든, 둘이 지금 애인 사이 아니에요?”

계속 마음에 걸렸다. 대공이 괴로워하길 바라면서도 내내 메르헨이 생각났다. 어찌 되었든 공식적으로는 둘은 아직 연인 사이였다.

“메르헨 셰린포드가…….”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흑마법에 손을 댄 거 같습니다. 요근래 귀족 여성들이 실종된 것도 메르헨 짓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흑마법에 필요한 생명력을 갈취할 용도로요.”

“……뭐라고요?”

믿기지 않는 말에 에스티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말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조금이라도 마음이 떠난 거 같다거나 당신한테 미련이 남은 기색을 보이면 당신의 목숨을 위협하겠다고 계속 협박했습니다. 실종된 귀족 여성들도 한 번이라도 제 약혼녀 후보로 거론되었던 여성들이고요.”

“……말도 안 돼.”

메르헨이 그녀가 읽던 원작과는 다르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흑마법이라니. 납치라니.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마법 진이나 불법 주술 물건을 찾지 못했거든요. 다만 그 여자가 탔다고 추정되는 마차가 오스카 후작가로 향하는 걸 저희 기사가 목격했습니다.”

오스카 후작이라면…….

“설마 그 사람과 손이라도 잡았다는 소리에요?”

“전에 영애가 지적했던 대로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다만 그 여자가 저한테 집착하는 거 보면 흑마법을 써서라도 영애를 위험하게 만들 거라는 거죠.”

“하……”

에스티아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당신이 밉기도 했고, 당신이 다칠까 봐 두렵기도 했고요.”

“정말 뭘 그렇게 다 혼자 감당했어요? 당신이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건 내가 지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 빠지는 거였어요.”

“그건,”

그가 다급하게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에스티아가 매정하게 잘라 냈다.

“지금 난 이제 세간의 평뿐만 아니라 내 친아버지까지 적으로 둬야 하는 상황이에요. 더더욱 당신의 힘이 필요해진 상황이에요.”

에스티아가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당신은 날 구해 주기까지 했어요. 근데 왜…… 왜 이렇게 마음이 안 좋을까요. 당신이 메르헨 옆에 있었던 건 날 괴롭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날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한데.”

“영애.”

그가 에스티아를 애타게 불러왔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에스티아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당신은 계속 날 지켜 준 사람이지만 2년 동안 날 짙은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사람이기도 해요.”

안 그래도 ‘진짜 에스티아’에 동화된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이 꽉 옥죄어 오는 거 같았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아요. 지난밤 당신한테 키스해 달라고 한 거는 열병에 시달려 내뱉은 헛소리였어요. 나 당신 용서하고 싶지 않아요.”

“영애……!”

“소원 카드는 이번에 쓴 걸로 해요. 이 이상 당신에게 뭔가를 빚져서 또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에스티아가 그대로 몸을 틀었다. 아직 미열이 있어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이 공간에서 그와 단둘이 있는 것보다는 나을 거 같았다.

그렇게 계단으로 향하던 에스티아는 뒤에서 누군가가 끌어안는 손길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공이 무릎을 꿇은 채로 그녀를 뒤에서 안은 것이었다. 에스티아가 뚝 멈춰 서자 그가 팔을 살짝 풀어 두 손으로 그녀의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그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녀에게 매달렸다.

“메르헨 셰린포드에게는 이미 끝을 고했습니다. 아니, 그냥…… 제가 다 잘못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거 같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에스티아, 제발…….”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바보 같은 대공이 울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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