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이제 와서
에스티아는 궁인의 안내를 받아 별궁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태후 대공비가 머물고 있는 곳이 별궁이었기에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게 낫다는 레이븐의 판단 때문이었다. 에스티아는 궁인의 도움을 받아 몸을 씻은 다음 침대에 몸을 뉘었다.
아직 겨우 아침이었을 뿐이지만 에스티아는 거의 녹초가 되어 있었다. 아침에 대공과 벌인 실랑이 때문이었다.
전생과 합해서도 남자가 자신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는 건 처음이었지만 전혀 희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 깊은 씁쓸함만 가득했다.
그는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결국 애증의 감정으로 그녀에게 비수 같은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오스카한테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그녀에게 사실만 물었어도 서로에게 그렇게 상처 줄 일이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때부터 그녀가 오스카 후작을 경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괜한 그는 자존심으로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서 그녀를 힘들게 했다.
에스티아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녀가 왼손을 들어 그의 손 위에 얹었다. 그렇게 한 손이나마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역시나, 대공의 손은 큰 돌덩이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놔줘요. 이러고 있는 거 싫어요.”
“…….”
뒤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나 마나 영혼이 저 멀리 가 있을 거 같아 에스티아는 결국 다시 손을 뗐다.
“좋아요, 그럼 말해 봐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데요.”
“흑…… 흑마법은…….”
대공이 거칠게 숨을 내쉬면서 겨우 말을 이어갔다.
“목숨과 직결되는 마력과 신성력을 대가로 악마에게 바치는 마법이기 때문에…….”
헉헉. 에스티아의 드레스를 붙잡은 대공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갔다.
“그걸 쓰는 사람도 매우 적을뿐더러, 그래서 더 증거나 범인을 잡기 어렵습니다.”
윽. 그가 상체를 굽히고 바닥으로 숨을 뱉어 냈다. 설마. 대공의 상태에 에스티아는 불쑥 불안한 마음이 튀어나왔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악마의 힘을 빌려 저주를 붓는 거 아닙니까. ‘마스터’ 아니면…… 하…… 이기기 힘든…….”
“전하.”
에스티아가 그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홱 몸을 돌렸다. 그러자 눈물이 뺨에 메말라 붙은 얼굴이 보였다. 에스티아가 조심스럽게 한쪽 다리를 굽혔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대공이 본능적으로 에스티아의 몸을 받쳐 앉도록 도왔다.
“자, 나 봐요.”
“……?”
“나 따라 해요. 후- 하- 후- 하-”
“아.”
아니, 숨 제대로 쉬라고 다독여 줬더니 또 눈에 눈물이 그득 찬다. 마음 한쪽이 욱신거렸지만 에스티아는 인내심을 발휘하여 그를 기다려 주었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따라 천천히 숨을 쉬기 시작했다.
“숨 고르고 똑바로 이야기해요. 마법 마스터만이 흑마법사를 이길 수 있다는 거죠?”
“네…….”
눈물이 가득 맺힌 눈이 에스티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언제 사라질지 두려운 사람처럼.
“그래서 제가 아무리 여러 마법사들과 같이 메르헨을 찾아가도 위험할 가능성이 컸고, 당신은 무모하게 행동할 내가 걱정됐고요?”
“……네, 그래도 무조건 제가 잘못했습니다.”
무슨 기계도 아니고 방금했던 말을 또 반복한다. 그가 한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반복했던 것처럼.
결국 에스티아가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 마스터란 사람은 어디 있는데요?”
“저도 모릅니다, 정말로요.”
그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애절한 눈으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다만 마스터들은 대대로 ‘이조르’라는 이름을 물려받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마스터는 여자, 남자 상관없이 물려받습니다. 그 정체는 오직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만이 알고 있습니다.”
이조르. 에스티아가 그 단어를 혀 위로 굴려 보았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단어였다.
그 이후 그와 어떻게 궁으로 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가 궁 어디로 갔는지조차 모른다. 다만 은밀하게 그들을 마중 나온 황제는 둘이 쉬어야 한다는 말만 계속했다.
입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침은 드셔야 한다는 궁인의 말에 에스티아는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수프와 빵은 단출하지만 따뜻했다. 궁인은 진통제 몇 알과 물이 담긴 유리컵을 음식 옆에 놓았다. 언제든 필요할 때 불러 달라는 말과 함께 궁인은 소리 없이 나갔다.
접시를 깔끔히 비운 에스티아가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약을 먹었다. 따뜻한 음식에다가 약까지 먹으니 통증이 한결 더 가라앉은 기분이었다.
에스티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바보 같은 대공작은 지금 레이븐과 함께 있을까? 도대체 이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그 남자가 괘씸했다.
그녀를 누르고 밖으로 나오려는 ‘진짜 에스티아’의 의지도 에스티아의 화에 한몫했다. 얼른, 얼른 가서 그를 붙잡으라는 목소리. 그리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그를 지옥 속으로 몰아넣으라는 목소리.
‘에스티아’의 짙은 한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에스티아가 컵을 들어 안에 남은 물을 쭉 들이켰다.
그때 ‘똑똑’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안 봐도 뻔해서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소심한 노크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안에 계십니까?”
잘못한 건 아는지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공은 문을 사이에 두고 에스티아에게 계속 말을 건넸다.
“기억까지 잃은 분에게 그렇게 상처 줘서는 안 되었습니다. 오히려 기억을 잃었다면 제가 먼저 나서서 당신에게 손을 내밀었어야 했습니다. 아니, 설령 과거를 잊으셨다 해도 당신 말대로 전 그래서는 안 되었어요.”
에스티아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그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걸 아는지 대공이 말을 이었다.
“그때…… 제 저택에서 다른 기사들에게 끌려 나가셨을 때, 많이 아프셨겠죠. 이곳저곳에 멍이 났다고 하셨으니 많이 아프셨을 겁니다.”
이해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한 게 아예 추측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분명 메르헨이 바로 옆에 있었으니 액션을 취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쉽게 용서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니었다. 에스티아는 다시 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이제는 그러기 싫어서 그 여자에게 끝을 고했다고는 해도, 그런 저 덕분에 다시 영애가 위험해졌습니다. 다 제 부족함 때문입니다. 다 저 때문이에요…….”
울컥. 차라리 못되게 굴 거면 끝까지 뻔뻔하던가. 정말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지금 와서 용서해 달라, 기회를 달라 하는 말씀은 드리지 않을 테니 제가 주변에서 영애를 지킬 수 있게 해 주세요. 마스터는 아니지만 준마스터로서 영애를 지켜 드릴 순 있습니다. 백보 뒤에서 걸으라고 하면, 아니 천보 뒤에서 오라고 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작 그렇게 말 좀 해 주지. 이 안에 있는 ‘에스티아’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혹시라도 저도 모르게 대답할까 봐 에스티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레이첼 태후 폐하께서 영애와 함께 점심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오후 12시에 맞춰 궁인이 이리로 올 겁니다. 궁 안에서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시고 폐하와 맛있는 점심 드세요.”
“네.”
무려 태후와의 약속이라 에스티아가 겨우 한 글자만 내뱉었다. 그게 누군가의 숨통을 틔워 주는지는 모르고.
“혹시라도 어디 아프시면 바로 궁인을 부르셔야 합니다. 혼자 참지 마시고…….”
미련이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이 문을 열고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
그래도 당신은 더 괴로워야지. 에스티아가 고개를 틀어 문을 바라보았다.
“그럼 전 기사단 훈련을 위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혹시 아이비 부단장이랑 만나고 싶으면 궁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만나시겠다 하신다면 저는 자리를 피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이비를 잊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아이비를 만나 많은 걸 물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쉬세요, 영애.”
조금씩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차마 이렇게 가지는 못 하겠다는 듯이 마음을 뚝뚝 흘리며.
그렇게 에스티아는 한동안 마음이 흐르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 * *
시간은 빨리 흘러 어느새 궁인이 에스티아를 모시러 왔다. 궁인은 짧아진 에스티아의 머리를 보고 잠시 흠칫했으나 표정을 갈무리하고 에스티아를 안내했다.
머리가 어깨에 닿을 듯 말듯 짧아진 에스티아는 머리에 청색 보석이 박힌 머리띠를 하고, 짙은 푸른색 드레스를 입었다. 팔이 검은색 레이스로 이루어진 드레스 디자인 덕분에 팔을 움직이기가 편했다. 게다가 태후가 보내 준 이 드레스는 코르셋까지 없어서 숨 쉬기도 편했다. 부상을 당하자 태후가 특별히 그렇게 주문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에스티아는 빨리 레이첼을 만나고 싶어졌다.
궁인은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정원으로 에스티아를 인도했다. 얼마나 꽃밭을 가로질렀을까, 하얀색 아치형 아래에 대리석 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레이첼 태후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반갑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서 와요, 글레멘드 영애.”
온화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