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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87화 (88/141)

87화 - 악행

-티아.

기억은 안 나지만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티아, 바일 소 공작이 좋나요?

기억에 따르면 아무래도 어머니는 자식에게까지 존댓말을 썼나 보다.

-사랑은 신뢰가 중요해요. 상대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라기보다 티아가 그 사람한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야 해요.

아마 어린 티아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거 같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 말도 맞다는걸. 자신은 개선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상대만 발전하기 바라는 건 이기적인 마음이었으니까.

그래도 가끔은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 줬으면 하고 바랄 때가 있다. 그녀는 전생에서도 평생 먼저 다가가기만 했다. 그러니 아주 가끔은, 노력하지 않아도 베풀어지는 그런 사랑을 받고 싶었다.

에스티아는 괜히 부끄러워졌다. 따뜻한 인사에 마음이 이리 말랑해지는 걸 보면 그동안 참 자신이 고생 많이 했다 싶어서.

“존귀하신 태후 폐하를 뵙습니다.”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자, 우리 자세한 이야기는 맛있는 음식 먹고 마저 하도록 해요.”

레이첼은 손수 에스티아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어구, 이게 뭐야. 안색 안 좋은 것 봐. 아무래도 영애가 여기 있을 동안에는 내가 좋은 음식 많이 대접해야겠어요.”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음식을 먹지도 않았는데 기분이 훨씬 나아지는 느낌이었다. 에스티아가 설렘을 참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감사해요, 폐하.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이렇게 다쳤는데 쉬어야지 그럼! 자, 어서 밥 먹어요, 밥.”

에스티아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너무 기분이 좋아져서 주책없이 웃음이 나올 거 같았기 때문이다.

친할머니를 만난 거 같은 포근한 느낌이었다. 전생에서는 이미 외가 쪽도, 친가 쪽도 조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상태였다. 그러니 그녀로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레이첼을 만나면서 그 부분을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레이첼은 자리에 앉으며 에스티아를 향해 자상하게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아리따운 분과 식사를 하는 건. 황실 위엄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외부 손님을 자주 부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부담 갖지 말고 있어도 돼요. 오래 있을수록 나야 좋고.”

친근한 목소리에는 가식이나 오만함이 없었다. 분명 막 빙의했을 때쯤 공부한 레이첼 정보에 의하면 그녀는 가히 어마어마한 귀족이었다.

레이첼 옥티비아 2세. 콘스 왕국의 왕과 폰스탄 왕국의 여왕이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었다. 장녀였던 그녀는 두 왕국의 귀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바른 교육을 받으며 자란 그녀는 몬터레이 제국의 황제와 혼인하여 선황제를 낳았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녀였지만 오히려 검소하고 겸손했다고 한다.

동시에 사교회에 빠삭한 이인지라 에스티아와 대화할 때도 어색한 공백은 두지 않았다. 아직 이런 사교식 대화가 어색한 에스티아에게는 더없이 이야기하기 좋은 상대였다. 오래 봐 온 사이도 아니건만 에스티아는 레이첼에게 푹 빠졌다. 오죽하면 그녀와의 이야기에 빠져서 음식을 먹지 않아 레이첼이 음식 좀 들라고 타이를 정도였다.

그마저도 정말 나무라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손녀를 걱정하듯 다정해서 에스티아는 마음이 저절로 치유되는 걸 느꼈다.

“차는 괜찮아요? 놀란 마음에는 커피보다는 차죠.”

“네, 너무 좋아요.”

어느새 티 테이블로 옮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허브티는 그녀의 말대로 에스티아의 마음을 녹여 주었다.

“좋죠? 자카르가 좋아하던 차예요. 날씨가 좋을 때마다 먹던 차죠. 물론 오늘이 날이 좋은 날은 아니지만 요즘 치고는 비가 적게 오고 있으니까.”

레이첼이 천막 아래서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카르라면 레이븐의 할아버지이자 그녀의 남편을 말하는 거였다.

“자카르는 좋은 남편이었지만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어요. 내가 크리티안을 낳다가 죽을 뻔했거든요.”

크리티안 리자인. 레이븐의 아버지였다. 즉, 자카르는 25대 황제, 크리티안은 26대 황제였다.

“크리티안은 당연히 자카르와 사이가 좋지 않았죠. 사춘기가 심해지면서 사적으로는 대화를 나누지 않는 상태까지 왔고. 나도 그 사이에서 좀 더 그 아이에게 다정하지 못했어요. 어찌 되었든 나도 황후였으니까.”

레이첼이 씁쓸한 눈빛으로 비가 오는 걸 바라보았다.

“크리티안이 아내와 아들에게 다정하지 못한 건, 그 아이가 자랄 때 내가 제대로 중재하지 못한 탓이에요. 내가…….”

레이첼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의자를 끌고 레이첼 옆에 다가왔다. 뒤의 궁인들은 모두 놀랐지만 레이첼은 그저 에스티아를 지긋이 보기만 했다.

에스티아가 손을 들어 레이첼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었다. 시녀들이 그걸 막으려 했으나 레이첼이 이를 제지했다.

“역시 조이의 딸이야.”

조이, 조이라면.

“조이가 아이 하나는 잘 키웠어. 공작을 닮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에스티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조이는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조이 글레멘드.

“미안해요. 근데 사실 난 결혼에 반대했었거든. 공작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사과는 건넸지만 레이첼의 눈빛은 어느새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태후의 눈빛이었다.

“그래서 별궁으로 절 초대해 주신 건가요?”

에스티아가 장난기가 묻은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첼도 부드럽게 웃었다.

“그런 것도 있죠. 게다가 조이의 아이였고. 조이의 아이가 그 오만한 작자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는데 내가 가만히 있어요?! 레이븐이 궁으로 영애를 불러들이자고 제안하자마자 바로 승낙했죠.”

“그랬군요…….”

“네, 아이디어는 대공이 내고.”

“풉.”

레이첼과 나란히 앉아 차를 들이켜던 에스티아가 차를 뿜었다. 시녀들의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정작 레이첼은 호탕하게 웃었다.

“어머어머, 역시 간섭하면 안 되지만 남녀 간의 이야기가 제일 재밌다니까.”

“그, 그런 거 정말 아니에요.”

에스티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저었다. 실제로 대공과 엮이는 게 싫기도 했다.

“알아요, 이거 완전 일방향이잖아요. 무슨 일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조건 바일 대공이 잘못했어요.”

“그, 그게…….”

당황한 에스티아가 눈을 도륵 굴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레이첼은 곧 얼굴을 굳혔다.

“영애,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요?”

왠지 진지한 이야기가 시작될 거 같은 분위기였다. 에스티아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폐하.”

“그럼, 에스티아.”

레이첼이 에스티아를 향해 몸을 틀더니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러더니 주변을 물렸다. 시녀는 물론 호위 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에스티아, 내가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어쩌면 영애를 괴롭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들어줄래요.”

“그럼요.”

에스티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왠지 레이첼의 이야기라면 꼭 들어야 할 거 같았다.

“좋아요, 내가 영애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레이첼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로셸 글레멘드 공작의 악행에 대한 겁니다.”

* * *

레이첼에게 조이는 장래가 총망한 마법사이자 딸 같은 존재였다. 성격도 좋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사랑을 받던 그녀는 로셸 글레멘드와 정략혼을 올렸다. 로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러 번 반대도 해 보았지만 가문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싶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혼을 한 조이는 다행히 결혼하고 나서도 마법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남편 로셸이 참한 공작 부인이 되라며 엄청나게 반대한 모양이었지만 조이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레이첼이 만족하던 것도 잠시, 조이가 임신을 하면서 마법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왔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죠. 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내가 제일 잘 아니까. 글레멘드 공이 어디 가 있는지도 모를 때 내가 그녀 옆에 있어 줬어요. 계속 그랬어야 했는데…….”

레이첼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렇다 해도 난 결국 외지인이었어요. 조이가 건강하게 에스티아를 출산한 이후로 소원해졌죠. 그래도 잘 지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도 딱히 들려오던 말도 없었고. 그런데…….”

에스티아는 레이첼의 손을 따스하게 붙잡은 채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 날부터가 조이가 병들기 시작했어요. 내가 저명한 의원이란 의원은 다 보내 주겠다고 했지만 글레멘드 공이 그걸 거부했습니다. 약초도 마찬가지였어요. 왜냐고 물었더니 이미 병이 깊어져서 소용없다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심상치 않은 말에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무려 태후가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아내의 치료를 거부했다? 아무리 사랑 없는 결혼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됐다.

“그래서 한때는 공이 흑마법의 힘을 빌려 조이를…… 죽였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흑마법. 요즘 들어 자주 듣는 말이었다. 오스카 후작이 지금 그 혐의를 받고 있었고, 대공의 말에 의하면 메르헨도 오스카 후작과 손을 잡은 걸 수도 있었다.

우연일까? 우연인 걸까. 로셸을 아버지로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말만은 아니길 바랐다. 만약 그랬다면 ‘진짜 에스티아’가 너무 불쌍해서…….

“더 끔찍했던 건 조이가 죽은 뒤였습니다. 그때 글레멘드 공은…….”

레이첼의 손을 잡은 에스티아의 손에 땀이 맺혔다. 레이첼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조이의 시신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 버렸습니다.”

“그게 무슨…….”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몰래 조이가 누워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죠.”

레이첼의 눈빛이 그때를 떠올린 듯 슬픔에 잠겼다.

“그때 관을 열어 보니,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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