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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88화 (89/141)

88화 - 이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저택 내에 어머니의 무덤이 있는데…….”

에스티아는 광활한 저택 부지 안에 있는 가족무덤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히 ‘조이 글레멘드’라는 이름을 보았었다.

“가짜 무덤을 만들어 놓은 걸 거예요.”

맙소사. 에스티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내의 시신은 아무도 보지 못할 곳에 숨기고 딸은 상품처럼 이용한다. 로셸 글레멘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 걸까.

“그 이후 수소문해서 조이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난 아직도 조이를 찾고 있어요.”

“그럴 수가. 그러셨군요.”

에스티아는 충격과 동시에 그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자신의 어머니를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근데 폐하께서 글레멘드 공의 ‘악행’이라고 하는 건 다른 이유가 또 있는 것이죠?”

에스티아가 예리하게 지적했다. 레이첼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것도 전쟁에 관해서요.”

“전쟁이요?”

예상치 못한 단어에 에스티아가 화들짝 놀랐다.

“칼 셰린포드가 2년 전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둬 공작이 된 건 에스티아도 잘 알 거예요.”

단어에 이어 전혀 생각지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칼 셰린포드라면 메르헨의 아버지였다.

“셰린포드 공작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요?”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 에스티아가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 전쟁이 끝난 후,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들을 수습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수상한 사실을 발견했죠.”

레이첼이 찻잔 둘레를 엄지로 쓱 쓸었다.

“병사들에 몸에는 ‘사창(射創)’이 수십 개는 나 있었습니다.”

“수십 개나요……?”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극한 상황 속에서 왜 병사의 몸에 수십 개의 총상이 나 있단 말인가. 에스티아가 홀로 생각에 골몰해 있자 레이첼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머리나 심장 쪽이 아니더라도 두 발만 맞아도 신체 일부가 사라집니다. 근데 그렇게 사창이 많이 있다면 가능성은 하나죠.”

레이첼이 시선을 들어 에스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패로 쓴 겁니다. 어린 병사들을.”

“설마…….”

떠오르는 가정에 에스티아가 경악하자 레이첼이 수긍하듯 쓴 미소를 지었다.

“네, 맞아요. 병사들을 일명 ‘고기방패’로 쓴 거예요. 아마 땅을 판 걸로는 방패막이 부족하니 병사들을 쓴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큰 무기에 달아 놓은 걸 수도 있고요. 문제는 단순히 시체만 쓴 게 아니라 살아 있을 때부터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건…… 어떻게 알아내신 건가요?”

에스티아가 그렇게 물은 건 레이첼의 말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끔찍해서 믿고 싶지 않아서였다.

“사창에 혈액이 어떻게 응고되었는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죠. 병사들은 분명 살아 있었어요.”

“……거기에 칼 셰린포드 공작이 관련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리고…… 글레멘드 공과.”

에스티아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레이첼의 눈동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해당 전쟁의 사령관이 셰린포드 공작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글레멘드 공이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공작 영지에서 어린 소년들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영지에서요?”

“네, 공작이 황실에 올린 보고서에는 아무래도 세금을 내지 못해서 도망친 거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내 생각엔 달라요, 그건…….”

말끝을 흐린 레이첼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아마 공작이 인신매매를 한 거라고 추측하고 있어요.”

“아…… 그럼 그 상대가 셰린포드 공작이고요…….”

에스티아가 혼잣말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순간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 이름이 떠오르자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폐하, 혹시…….”

에스티아가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물었다.

“바일 대공 전하도 그 사실을 알고 있나요?”

레이첼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그것이 곧 긍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아래로 떨궈졌다.

“바일 대공작은,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 전쟁에는 참여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셰린포드 공작이 사령관이 되고 아이비 부기사단장이 부사령관이 되었죠. 다만 시신을 수습하는 건 바일 기사단장이 지도하여 진행하였습니다.”

두근두근.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그 당시 아이비 백작은 부상을 당해서 전쟁 중반부 때 되어서는 후발대에서 지휘를 하던 상황이었어요. 선발대의 상황을 완전히 알기 어려웠죠. 그렇게 병사들의 희생이 묻힐 뻔했지만 다행히 대공과 백작이 수상한 점을 알아챘고요.”

아, 자신은 얼마나 우매했나. 원작의 설정만 믿고 그간 바보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그런 에스티아의 기분을 알아챈 레이첼이 부드럽게 그녀를 달랬다.

“자책하지 말아요, 에스티아. 그들은 무척 교묘하게 행동했으니까. 우리도 아직 증거를 더 찾아야 해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뭐든 하겠어요.”

에스티아가 울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더는 무책임한 자의 비리로 인해 죄 없는 사람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그래야 그녀도 ‘에스티아 글레멘드’로서 떳떳하게 살 수 있을 터였다.

“제가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폐하. 공작은 저 또한 상품으로 소유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 그런 삶을 더는 살기 싫어요.”

“난 에스티아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뿐이지, 영애를 위험하게 만들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이대로 숨어 있는 건 못할 거 같습니다. 돕게 해 주세요, 폐하.”

“난 에스티아가 나에게 손을 내밀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레이첼은 드디어 오랜 시간 동안 로셸에게 묶여 있던 에스티아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로셸이 에스티아의 목숨을 위협함으로써 스스로 화를 자초한 덕분이었다.

이제 그의 오만한 행보를 멈출 차례였다.

* * *

에스티아는 궁인 뒤를 따라 터덜터덜 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열의에 확 차올랐는데 레이첼과 헤어지고 나니 기운이 쭉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릿속은 복잡했고 마음은 심란했기 때문이다.

전부 다 확실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정이 사실이라면 메르헨은 흑마법을 사용해 에스티아를 위협하려고 했고 그걸로 대공을 협박했다. 셰린포드 공은 어린 병사들을 고기 방패로 희생시켰고 그 병사들을 공작에게 갖다 바친 게 자신의 친아버지이다. 그리고 그 친아버지는 아내의 죽음을 방관했다.

‘게다가 메르헨.’

에스티아가 탄식을 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원래 약초 확보에 힘쓴 건 안전한 나라에서 살고 싶기도 했지만 메르헨의 아버지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면 혹시라도 찾아올 죽음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을 잘못 생각했구나.’

약초를 미리 확보해 놓음으로써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화시키고, 다른 환경에서도 약초를 재배할 수 있도록 활발히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지 새삼 실감이 났다.

“글레멘드 영애?”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에스티아가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에스티아는 대답 없이 눈앞에 선 상대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을 정말로 이용할 수 있을까. 철저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용으로만 그를 곁에 둘 수 있을까. 가끔 그녀가 원할 때만 그에게 오아시스가 되어 주며, 끝내는 저 사람과 진정으로 인연을 끝내는 것이 가능할까.

에스티아가 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궁인을 지나쳐 대공에게 다가갔다.

“에버하르트.”

쿵쾅쿵쾅. 그의 심장 소리가 선명히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실제로 들린 건 아니지만 그의 심장이 요동치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눈빛이 젖어 들고 뺨은 황홀하다는 듯이 상기되었으니까.

“내가 당신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에스티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겨우 비 한 방울이 작은 생물에게 생명줄처럼 다가오는 것처럼.

“네…… 그러기만 한다면 소원이 없을 거 같습니다. 정말로…….”

그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무한히 이어질 거 같은 어두운 동굴 속에서 빛줄기를 발견한 여행자처럼. 그의 눈빛은 눈앞의 빛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만 해 주셔도, 당신이 절 살리시는 겁니다.”

그가 조심조심 손을 뻗어 그녀의 왼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손등 위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에스티아는 담담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반면에 그의 눈동자는 언제라도 그녀를 놓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두려움이 가득했다.

“그럼 가요, 내 방으로.”

에스티아가 여전히 차갑게 그를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정말 당신이 나에게 필요한 거 같으니까.”

* * *

그는 뭐든 좋았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녀를 보지 않는 1분 1초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곧 벼랑에 밀린 사람처럼 두려웠고, 빛을 잃은 죄인처럼 고통스러웠다.

레이첼에게 인사를 하러 간다는 핑계로 별궁을 향한 건 그래서 그런 거였다. 그녀의 경멸 어린 시선을 받더라도, 설령 그녀가 시선조차 주지 않더라도 아주 잠깐이나마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기쁨을 누리고 싶었다.

복도 저 끝에서 그녀와 마주쳤을 때, 그는 정말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청색 보석이 박힌 머리띠를 하고 그것보다 옅은 색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말로 형용하기 죄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계속 볼 수만 있다면 영혼도 바칠 수 있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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