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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89화 (90/141)

89화 - 단 한 번도

에스티아는 처음부터 아름다웠다. 13살 때, 9살 소녀를 갓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그게 사랑인지 몰랐다. 그걸 인지하기에는 아직 많이 어렸던 거 같다. 다만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에스티아가 귀찮지 않았다는 건 분명했다.

삐약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가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는 그게 결코 싫지 않았다. 저택 사용인들은 조용하기만 한 도련님이 웃으신다며 좋아했다. 에스티아가 저택에 오면 바일 저택의 분위기가 살아났다.

에스티아는 16살 겨울 말미에 데뷔탕트를 치렀다. 아마 그녀보다 그가 더 긴장했을 거라 자신할 수 있었다. 그 데뷔탕트에는 수많은 영식이 참여할 예정이었으니.

이미 그때 기사단장 승급을 앞두고 있어 바빴지만 결코 빠질 수 없었다. 그는 시간에 딱 맞춰 사교 행사에 참석했다. 그리고 곧 에스티아를 마주했다.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에스티아의 해사한 미소에 그의 모든 시간이 멈춰 버렸다. 짙은 청색 드레스를 입은 에스티아는 ‘아름답다’라는 말마저 과소평가라고 할 만큼 눈이 부셨다. 그녀가 그를 발견하고는 더욱 밝게 웃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충만함을 느꼈다.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에스티아에게로 다가갔다. 에스티아가 다른 귀족과 하던 대화를 멈추고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녀의 손등을 들어 입을 맞췄다. 영식들의 못마땅한 헛기침과 영애들의 부러운 탄식 소리가 들렸다.

왔어요, 에버?

그녀가 입모양으로 그렇게 물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주변 시선이 온통 여기로 몰려 있어, 그는 그 포옹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때 그 순간을 미치도록 후회한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껴안았더라면, 조용한 복도에서 그녀와 이렇게 거리를 두고 있지 않았을 텐데.

“그럼 가요, 내 방으로. 내가 당신 좀 이용해야겠으니까.”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요.”

그저 그녀만 볼 수 있다면 그는 지금 그 무엇이 닥쳐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그를 버리는 것만 빼면.

* * *

다만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게 있다면 지금 그녀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다는 거였다. 에스티아는 지금 격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며 그를 널찍한 소파에 앉히고는 자신도 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게다가 에스티아는 보통 마부들이 하는 책상다리를 하고 그를 향해 앉아 있었다. 최근 2년간 전혀 볼 수 없었던 자세라 놀랐다. 엄청 불편해 보이는 이 자세는 에스티아가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에 자주 하던 자세였다.

에버하르트는 그것이 반가운 한편 에스티아 모르게 열심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자세와 상관없이 랜턴 불빛 아래 그녀의 모습은 청초하여 심장을 떨리게 했으니.

더군다나 바짝 붙어 앉아 있는 터라 그녀의 얼굴이 그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그 간질거리는 거리가 그의 마음을 더 설레게 했다. 예전 에스티아가 돌아온 느낌이라 더욱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몸을 틀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아예 앞을 보고 있기도 애매해서 절로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그는 고개만 돌린 채로 에스티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선의 조합이 저런 걸까 싶을 때 에스티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한테 꼭 물어볼 게 있어요. 지금 이렇게 기억을 털어놓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요.”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마치 보고를 하듯이 딱딱했지만 그는 그것마저도 좋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었으니까.

“글레멘드 공과 셰린포드 공이 인신매매를 했다는 걸, 태후 폐하한테서 들었어요. 혹시 증거가 있나요?”

에스티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싶어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살아남은 생존자들 수와 전사한 병사들의 합이 출전 병사들의 수보다 적었습니다.”

“얼마나요?”

에스티아가 다급하게 물어왔다.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딱 한 명이요.”

“…….”

한 명. 너무 적은 수에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다시 결연하게 물어왔다.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는 거죠?”

“네, 기사들을 시켜 샅샅이 뒤졌는데 시체는 없었습니다. 다만 사람이 이동한 걸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죠. 가령 불을 지핀 흔적이라든가, 발자국이라든가. 지금 계속 흔적을 쫓는 중입니다.”

“혹시…….”

에스티아의 시선이 올곧게 그를 향했다.

“메르헨에게 접근한 이유에 그것도 있었어요?”

“……혹시 서류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싶었죠. 불법일수록 더욱 서로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증표를 마련해 놓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찾으셨나요?”

에스티아의 음성이 긴장으로 떨렸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떤 의지로 번득이고 있었다.

“찾진 못했지만 메르헨의 방과 연결된 공간이 있다는 걸 알아냈어요.”

“네? 그걸 어떻게…….”

“바깥에서 보는 집 구조와 안이 교묘하게 달라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죠. 그래서 어느 날 자리를 비웠을 때 벽을 두드려 보니 특정 부분이 안이 비어 있더군요.”

“그랬군요, 메르헨의 방에서…….”

에스티아가 생각에 잠긴 듯 말끝을 흐렸다. 그녀로서는 단순히 상황을 추측해 보느라 그런 것인데 에버하르트는 다른 의도로 이해했다.

“아니, 그…… 그냥 방 구경만 했습니다!”

“……?”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어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의 생각이 더욱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정말…… 바로 나왔습니다. 5분도 안 있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아, 그런 건가. 에스티아가 그제야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녀가 심드렁하게 손을 저었다.

“됐어요. 어차피 저도 후작 집에 여러 번 갔는걸요.”

뚝. 우왕좌왕하던 에버하르트의 동작이 싹 멈췄다.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그녀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별일 없었냐.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 오스카 후작이 뭔 이상한 수작을 안 걸었냐 등등 묻고 싶은 게 수십 개였지만 애써 참았다. 어떻게 잡은 순간인데 초를 칠 순 없었다.

“아무튼 그래서요?”

한창 동요하던 그는 에스티아의 목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인신매매가 발생하고 있으니 제 예상엔, 매매를 한 사람들을 거기에 가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공간이 메르헨의 방과 연결되어 있고요?”

“확실한 건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 불같은 성격에 메르헨을 찾아갈까 싶어 그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알아내려면 역시 거기에 가야…….”

“절대 안 됩니다.”

에스티아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가 말을 잘랐다. 어느새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향해 몸을 완전히 튼 상태였다. 눈이 다시 이글이글 타는 걸 보니 또 버튼이 눌린 거 같다.

“아니, 말이 그렇다고요. 진짜 가겠다는 게 아니라.”

에스티아가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거의 댈락 말락 한 수준인데도 그는 곧바로 가라앉았다. 무슨 개 훈련시키는 기분이라 에스티아가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무튼 메르헨에게 접근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군요. 셰린포드 가문의 비리를 알아내야 했고, 나를 지켜야 했고, 내가 미웠고…….”

“…….”

그의 시선이 잘게 떨리더니 아래로 향했다.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어찌 되었든 메르헨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떠나서, 둘이 연인이었는데, 조금이라도 메르헨을 사랑하는 마음은 없었어요?”

원작의 남여주였고, 연기였을지언정 방금 말한 대로 둘은 연인이었다. 정말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았나 궁금했다.

순수한 궁금증으로 물은 건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잖아요. 그렇게 다정하게 군 게 다 연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사실 지금 돌이켜 보면 형식적인 애정 표현이긴 했다. 그때는 그저 꼴 보기 싫어서 깊이 생각을 안 했다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진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의 눈빛을 보았으니, 아니 보고 있으니까.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어요. 기사들 시켜서 질질 끌려 나가게 해놓고서는.”

소설로만 봤지 기억에는 없는 장면이었지만 그랬다는 사실만 떠올리면 이상하게 마음이 쓰렸다.

“그건…….”

“알아요. 메르헨이 바로 옆에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그랬던 거겠죠.”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미안해요.”

그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떨리는 손으로 생채기가 잔뜩 난 에스티아의 왼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많이 아팠죠……?”

에스티아는 그렇다고 해야 할지,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러자 몸을 가만히 웅크리고 있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서는 말했다. 어서 보상을 받으라고. 이제 이 관계의 주도권은 오로지 너한테 있다고.

에스티아가 그의 칼라를 잡아당겼다. 훤칠한 남자는 겨우 두 손가락의 움직임에 속절없이 끌려왔다.

동요하고 있는, 눈동자가 보였다. 과거에는 그녀가 끌려가는 걸 무정하게 보고 있던 눈이었다.

그때 에스티아는 이 남자에게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러지 않았을까. 한 가지 가정에 도달했을 때 에스티아가 그 가정을 바로 실천했다.

‘진짜 에스티아’가 바라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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