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 편지
그의 몸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요즘은 볼 때마다 허옇게 질려 있어서 몸도 그만큼 차가울 줄 알았는데. 그의 몸과 맞닿은 곳에 온기가 스며드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등을 왼쪽 팔로 살짝 껴안았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에스티아는 그렇게 그를 안고 있었다.
쿵쾅쿵쾅. 에스티아의 귓가에 크게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사람의 심장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나 궁금했다. 에스티아가 살짝 몸을 틀어 그의 가슴께에 오른쪽 귀를 갖다 댔다. 그녀의 동작에 큰 상체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쿵쿵쿵. 심장이 방금보다 더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신기하면서도 이상하게 그 소리를 들으니 안심이 되어서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점점 평온해졌다.
반면에 누군가에게는 고행의 시간이었다. 안 그래도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데,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의 몸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는 간단한 마법 수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심각한 사항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자신의 가슴에 닿은 그녀의 얼굴이, 자신의 등을 살포시 안고 있는 그녀의 작은 손이 미치도록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에, 에스티아…….”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울고 싶었다. 팔을 두르면 그건 그것대로 싫어할까 봐 걱정되고, 그렇다고 밀어내면 그것대로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겁이 났다. 이를 악물고 참는 수밖에 없었다.
“있잖아요…….”
그렇게 한참 고행의 시간을 갖던 차에, 에스티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네, 말씀하세요.”
“나한테 정말 미안하면, 위에 앉아도 돼요?”
뭐?
이게 무슨 말이야. 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위라면 그의 무릎 위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에스티아가 어렸을 때야 그녀와 만날 때면 무릎에 앉히고 부둥부둥해 줬지만 그것도 다 옛날 얘기다. 그녀가 점점 숙녀 티를 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그는 그걸 금지했다. 에스티아는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여자로 인식하기 시작하자 살짝 손만 닿아도 심장이 떨렸으니까.
하물며 지금은 그녀도 어엿한 여인이며, 자신도 건장한 청년이다. 안 그래도 사람을 매혹시키는 모습인데 여기서 더 껴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시험일 터였다. 차라리 칼을 빼들고 전쟁에 참여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싫으면 말해요. 그럼 다시는 이런 부탁…….”
“얼마든지요.”
그렇다고 한들 그에게 선택권이 있을 리는 없었다. 그는 큰 두 팔로 부드럽게 그녀를 들어 올려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오른쪽 팔이 다쳤으니 일부러 그녀의 왼쪽이 자신에게 기댈 수 있도록 했다.
에스티아가 다시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완전히 자신에게 몸을 맡기자 온몸의 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몸 전체가 뻣뻣해졌다. 에스티아가 편하게 기대려면 그도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혹시라도 그녀가 불쾌할 상황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온힘을 끌어내야 했다.
그때 에스티아가 그의 목에 왼팔을 둘렀다.
“왠지 과거의 나라면, 이러고 싶었을 거 같아요. 정확히는 당신이 날 외면해 온 그 긴 시간 동안.”
“…….”
그녀의 진심이 메마른 땅 위에 오는 단비처럼 그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가 그녀를 조심스레 껴안았다. 이번에는 왠지 그래도 될 거 같았다. 그의 생각이 맞다고 하듯, 에스티아의 고른 숨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왔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당신을 향한 미련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죠. 정확히는 ‘과거의 내’가 갖고 있는 미련이요.”
“지금의 당신은…… 날 버리고 싶을 거고요.”
내심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어 그렇게 말한 거였지만 에스티아는 역시 이번에도 솔직했다.
“네, 지금의 전 당신을 미치도록 버리고 싶어요. 다시는 안 보고 싶고.”
말 한마디가 정말 비수처럼 푹푹 마음에 박혔다. 저절로 그녀를 두른 팔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날카롭게 외쳤다.
“아파요!”
그 목소리가 무척 매서워서 그는 바로 팔의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래요? 당신이 나한테 했던 말을 생각해 봐요.”
“……네.”
에버하르트가 바로 수긍했다. 그녀가 기억도 더불어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잊었을 거라는 오스카의 말을 부정하고자, 그녀에게 했던 끔찍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할까 하다가 혹시라도 전처럼 ‘늦었다’라는 말을 들을까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른한 듯 에스티아의 숨소리가 점점 규칙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그의 마음도 덩달아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그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거렸다. 에스티아가 악몽을 꿔서 울면서 깰 때마다 그는 지금처럼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에스티아는 어렸을 때부터 악몽을 많이 꿨으니까.
그게 바로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지만 지금은 그저 그녀를 재우는 거에 집중했다.
그가 그녀를 안은 채로 가뿐히 소파에서 일어났다. 요즘 여기저기 돌아다닌 데다가 다시 아프기까지 했으니 확실히 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기회가 되면 아무래도 맛있는 걸 먹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왠지 모를 설렘을 가득 안으며 그는 침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그녀를 뉘였다.
에스티아가 단꿈을 꾸고 있었다.
* * *
이렇게 몸이 떨렸던 때가 언제였더라. 아마 몇 개월 전에 로셸이 저택 어딘가에 에스티아를 가두고 학대를 하고 있을 때였던 거 같다. 로셸은 에스티아가 말을 안 들을 때마다 방에 가두고 마법사들에게 그녀를 정신적으로 고문하기를 시켰다. 그녀를 정신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환각, 환청이 주된 고문이었는데 그때마다 에스티아는 더욱 피폐해졌다. 대개 그가 잠깐 자리 비울 때를 교묘하게 노렸다.
그날은 어떻게 보냈는지 모르겠다. 온갖 방이란 방은 다 뒤졌다. 부순 방문도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사용인들은 에스티아를 아꼈기에 그런 그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벌을 받는다는 걸 아는데도 그랬다.
‘이안!’
겨우 그녀를 찾았을 때 그도 그녀를 따라 결국 울고 말았다.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더욱 날개를 달았을 주군이었다. 공작 부인이 살아 있을 때는 부인이 보호를 해 줬지만 부인이 돌아가신 뒤로는 로셸이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학대했다.
대공이 종종 이런저런 핑계로 저택을 찾아오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때는 이미 대공과 에스티아의 사이가 틀어진 지 오래였다. 계속 머무르는 것도 결례였다.
그때도 엄청 두려웠는데 지금은 그 배로 무서웠다. 에스티아가 신경 쓸 걸 알기에 다친 데인을 의원에게 맡기고, 카린과 메리를 잠시 다른 데로 피신시키느라 황궁으로 가는 데 더 늦어 버렸다.
다행히 대공이 잘 말해 놓았는지 그는 바로 육중한 황궁 문을 통과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달려야 에스티아가 있는 별궁에 도착했다.
그 이후 어떻게 에스티아가 머무는 방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침대 위에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을 자고 있는 에스티아를 보고 나서야 온몸의 힘이 쫙 풀렸다.
“괜찮습니까?”
물론 그 옆에 있는 대공은 꼴 보기도 싫었지만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이안이 상체를 숙인 채 두 무릎을 짚었다. 그대로 주저앉을 거 같았지만 에스티아의 상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에스티아의 오른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안정되던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저절로 이가 갈렸다.
“……에스티아가 타던 말에 총을 쏘았습니다.”
그의 반응을 이해한다는 듯 에버하르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리 최근 들어 강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몸이 많이 약해졌던 주인이다. 말에서 떨어졌을 걸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개자식들…….”
결국 이안이 작게 욕을 읊조렸다.
“혹시 총 쏜 새끼 얼굴 봤습니까?”
엄청 높은 신분까지는 아니어도 그래도 귀족인지라 이안은 평소에는 욕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무려 에스티아가 다쳤다. 그것도 어디 살짝 긁힌 정도가 아니라 붕대까지 감아야 할 정도로 크게 다쳤다.
“어깨는 썰고 왔는데, 나머지는 에스티아와 상의해서 남작이 알아서 하세요.”
그래서 에버하르트도 격식 없이 답했다. 이안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하…… 정말 이런 말은 다시는 하기 싫었지만, 아무튼…… 감사합니다, 전하.”
“……아닙니다. 에스티아가 자칫하면 더 크게 다쳤을 수도 있었어요. 다 내 불찰입니다.”
“…….”
이안은 그런 그가 적응이 되지 않아 그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에스티아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께서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손목 금, 팔꿈치 위쪽 출혈, 어깨 탈골. 그 이후 통증으로 잠시 고열이 왔었습니다.”
에버하르트의 귀에 이안이 감히 입에 담지도 못할 상스러운 욕을 읊조리는 게 들렸다. 그러나 그는 그 심정이 백번 이해되어 딱히 뭐라 하진 않았다.
“세상에. 달리는 말에 총이라니. 미친놈들, 미친놈들.”
“에스티아가 데인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의식이 없습니다. 팔다리 다 하나씩 부러졌고, 머리에도 출혈이 있습니다. 오늘 밤이 고비일 겁니다.”
에버하르트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만에 하나 고비를 넘기지 못한다면 에스티아가 많이 슬퍼하겠다 싶었다.
“근데…….”
그의 눈에 이안의 주머니에 든 흰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 봉투는 뭡니까?”
이안이 급하게 쑤셔 넣고 온 봉투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 편지 끄트머리를 보는데…….
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저 글씨는,
라 빅터 오스카의 필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