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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1화 (92/141)

91화 - 당신이 원한다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지긋지긋한 필체는. 에스티아가 데뷔탕트를 치렀을 무렵, 글레멘드 공작가에는 잊을 만하면 편지가 왔다.

그때 그자의 필체를 처음 보았다. 그 전에 굳이 그자의 글씨를 볼 일도 없었을뿐더러 볼 기회가 있었다고 해도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친애하는 에스티아에게.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불길함이 솟아올랐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그는 에스티아의 책상 위에 올려진 그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라 빅터 오스카. 그자가 맞다면 분명 마법사 길드에 속해 있는 마법사일 것이다. 이런 이름은 제국에서 한 번밖에 들어 본 적 없으니.

나이를 알 수 없는 마법사. 고위 마법사이지만 길드장에 오르지 않는 마법사. 사교계에는 일절 등장하지 않으면서 교류하는 귀족이 거의 없는 남자. 그런 남자가 에스티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그는 저도 모르게 봉투에 쓰인 그 말을 중얼거렸다. 보통 귀족들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 친근감을 자주 표하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안면이 있을 때 쓰곤 했다. 애초에 편지를 서로 보낸다는 것 자체가 안면이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에버? 왜 그래? 표정이 안 좋아.

그때 에스티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미안,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오스카 후작과 아는 사이야?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그가 참지 못하고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아, 우리 엄마와 아는 사이라고 요즘 들어 저택에 오는 분이셔. 왜?

-저택에 온다고?

그의 표정이 다시금 안 좋아졌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그래, 에버. 무슨 문제라도 있어?

웬만하면 동요하지 않는 에버하르트였기에 에스티아는 조금 놀란 상태였다. 그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는 오스카 후작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냥 불길하다고 만나지 말라고 하기에는 의처증 있는 남자 같아서 그는 대충 둘러댔다.

-아냐. 그냥 너가 다른 남자랑 편지 주고받는 게 싫어서. 자주 편지하지 마. 질투 나.

하지만 이 말도 진심이긴 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목소리에 유치한 질투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으니까. 에스티아도 그걸 느꼈는지 얼굴이 한껏 붉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에버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불안하지만 행복했던 순간.

에버하르트가 이안의 주머니에서 편지를 확 뺐다. 이안은 다른 이의 손이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에버하르트가 더 빨랐다. 에버하르트가 편지 겉봉투에 쓰인 글씨를 바라보았다.

“라 빅터 오스카…….”

“뭐 하시는 겁니까!”

이안이 다시 편지를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에버하르트가 뒤로 물러섰다. 이안이 외치는 소리에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버하르트는 그걸 신경 쓸 새가 없었다.

“뭡니까? 이 작자한테서 왜 편지가 옵니까?”

“주십시오.”

“대답부터 하세요.”

에버하르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 모습에 살기가 가득해서 이안은 결국 태도를 부드럽게 바꿀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모릅니다. 아가씨의 편지를 제가 마음대로 열어 볼 수 없지 않습니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에버하르트의 손이 편지를 찢을 듯이 움켜쥐고 있었다. 그걸 보니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나 싶어 이안은 한발 물러섰다. 어찌 되었든 지금 상황에서는 오스카보다는 대공이 믿을 만했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는 원래부터 이안을 신용하고 있었다. 에스티아의 친오빠 같은 사람이자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그걸 자신이 옹졸하게 질투해서 그렇지.

“아직 조사 중이지만 오스카 후작이…… 저와 폐하는 후작이 흑마법을 사용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안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상대로 이안의 눈이 동그래졌다.

“증거는요?”

“찾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에스티아에게 딱 붙어 있어요.”

“그…….”

이안이 말을 이으려고 했지만 침대에서 에스티아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짠 것처럼 입을 바로 다물었다. 에스티아가 눈을 비비면서 일어났다.

“이안?”

“아가씨.”

이안이 침대에 털썩 앉더니 에스티아를 끌어안았다. 에스티아는 당황하지 않고 성한 왼손으로 이안을 토닥였다. 에버하르트는 이 상황에서까지 질투하면 자신이 머저리 같다는 생각으로 조용히 서 있었다.

“많이 아프셨죠.”

이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에스티아가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팠는데 괜찮아. 꾸준히 낫고 있어.”

“열도 나셨다면서요.”

“이제 다 내렸는걸.”

평소에는 오빠와 여동생 같았는데 지금은 누나와 남동생을 보는 거 같았다. 하기야 에스티아에게 안 좋은 일 생기면 망가질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긴 하다. 그중에서 제일은 자신이겠지만.

“이안은 다친 데 없어?”

“전 괜찮습니다.”

이안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둘은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상황을 이야기했다. 에스티아는 도피와 치료를, 이안은 데인과 저택 상황을 얘기했다.

“이런 얘기하긴 정말 싫었지만 황궁에 온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설령 그쪽에서 눈치챈다고 하더라도 쉽게 아가씨를 빼오진 못할 겁니다. 이미 그분이 아가씨한테 어떤 짓을 했는지 소문이 다 났으니까요.”

“응, 내 생각도 그래.”

“혹시라도 악의적인 소문을 번질 걸 막기 위해 사람을 통해 아가씨가 폭력을 피해 황궁에 의탁했다고 말을 뿌려 놓았습니다.”

“안 그래도 폐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고 하더라. 잘했어, 이안. 고마워.”

에스티아가 이안의 손을 꼬옥 잡았다. 그제야 이안이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전하께서는 뭘 노려보고 계신 거예요?”

이안의 시선이 대공에게로 향했다. 대공이 편지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편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당신에게…… 온 편지입니다.”

에버하르트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저한테요?”

“오스카 후작이요.”

‘오스카 후작’이라는 말에 에스티아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일부러 보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남작의 주머니에 익숙한 필체가 보여 저도 모르게…….”

혹시 화가 났을까 봐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눈치를 보며 변명했다. 에스티아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알겠어요. 주세요.”

에버하르트가 바로 편지를 건넸다. 손끝에 그녀의 손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젖어 있기도 잠시, 그는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을지 불안해졌다.

“죄송하지만, 전하 잠깐 밖에…….”

“왜.”

순해졌던 에버하르트의 눈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주인에게는 온순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사나워지는 사모예드를 보는 거 같았다. 이안은 이 상황이 당황스러우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눈에 띄는 차별은 뭐란 말인가.

“아가씨와 잠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이야기는 아까 다 끝난 거 아니었습니까? 왜 오스카 후작 편지를 드린 다음에 나가라는 겁니까?”

“하, 그냥 좀 나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가씨도 아픈데.”

“정 영애가 걱정되면 남작도 같이 나가시죠. 나 혼자 나가기는 싫은데.”

언제 사이가 좋았냐는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며 편지지를 내려놓았다.

“괜찮아, 이안. 어차피 영원히 숨길 수도 없는 문제야. 게다가 이 문제는 왠지 전하도 알아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드네.”

“괜찮으시겠습니까? 귀찮은 일만 더 생기는 건 아닐는지요.”

빠직. 에버하르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이안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응, 괜찮아. 그러니 둘 다 앉아 봐요.”

“이분도요?”

이안이 고갯짓으로 에버하르트를 가리켰다. 으드득. 그를 향해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결국 에스티아가 둘을 매섭게 째려보고 나서야 두 사람은 신경전을 멈췄다.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과 어떤 일이 있었으며 어떤 거래를 했는지 에버하르트에게 들려주었다. 얘기할수록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지만 에스티아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경청했다.

“아…….”

에버하르트가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에스티아는 그가 지금 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이었으면 왜 그랬냐, 어떻게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수 있냐, 왜 이렇게 무모하냐 등등 여러 말로 잔소리를 퍼부었을 테니. 어쩌면 잔소리로 끝나지 않고 모진 말로까지 갈 수도 있었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에스티아, 이안 둘 다 놀라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얘기해 줘서.”

그의 눈매는 다시 순해져 있었고 눈빛은 주인을 바라보는 충심 가득한 개처럼 초롱초롱했다. 그걸 본 이안은 입을 떡 벌렸다.

에스티아도 고맙다는 말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적어도 왜 그랬냐 정도는 물을 줄 알았다.

“전하께서 그러셨잖아요. 오스카 후작이 흑마법을 사용한 거 같다고. 아무래도 저 혼자서 맞서려는 건 너무 무모한 짓 같아요.”

그동안은 오기로라도 혼자서 오스카 후작의 비밀을 캐고 싶었다. 하지만 적이 후작만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더는 혼자는 무리였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사람과 손을 잡아야 할 때였다.

“오스카 후작이…… 꽃을 찾고 있다고 하셨죠?”

잠시 감동한 상태로 그녀를 바라보던 에버하르트가 편지지로 시선을 던졌다. 에스티아가 편지지를 에버하르트에게 건넸다. 이렇게 보여 줄 줄은 몰랐는지라 그가 잠깐 놀랐지만 곧 편지지를 받아 들고는 정독하기 시작했다.

“‘퀸 오브 더 핑크스’. ‘히아신스’만 알았지, 이 꽃 이름은 처음 들어 보는군요.”

“‘히아신스’ 종류 중 하나일 거예요. 오스카 후작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에스티아가 다시 편지지를 건네받았다.

“그러니, 같이 찾아요. 저랑.”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꽃. 저랑 같이 찾아요.”

그의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 마음의 주인이 명령했으니 자신은 그저 따를 뿐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그가 다시금 그녀의 왼손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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