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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2화 (93/141)

92화 - 짓밟다 (1)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이 했던 얘기를 에버하르트에게도 들려주었다. 그는 그녀의 얘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공격을 받고 그 영향으로 마력이 꽃에 봉인이 됐다. 그 정도로 마력을 분산시키고 봉인까지 할 정도면 상대도 마력 소모가 심각했을 겁니다. 근데 그만큼 강한 마법사는 극소수고, 그들은 이미 길드에서 후작과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는 누구일까요?”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 이안은 넓은 침대 가운데에 옹기종기 모여 진지하게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조르.”

“네?”

해당 단어를 처음 들어 본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에버하르트가 설명을 덧붙였다.

“길드의 수장입니다. 정체는 오로지 황실의 주인들만 알고 있지요. ‘이조르’ 자체도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안은 들어 본 적 없는 단어였다. 에스티아는 카페의 다락방에서 잠깐 들었던 내용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이 자리에서 그 단어를 말한 이유는 순전히 이안을 믿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조르 정도가 되어야 오스카 후작을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요즘 들어 이조르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소문이 있는데 만약 그가 그런 거라면 얼추 말이 들어맞죠.”

에스티아와 이안이 그의 말을 동의하듯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실을 폐하께 알려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저라도 이유도 얘기하지 않고 이조르의 행방과 근황이 어떤지 물을 순 없으니까요.”

말투는 단호했지만 그녀를 향한 눈빛은 부드러웠다. 흡사 꿀을 발라 놓은 듯한 눈빛이라 덕분에 이안은 회의에 집중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끌어모아야 했다.

“네, 폐하라면 믿을 수 있어요.”

“……네, 그럼 폐하께 바로 말씀드리도록 하죠.”

무슨 말이 또 마음에 안 들었는지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그는 그걸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대신 이렇게 물었다.

“……꽃은 언제 찾으러 가실 겁니까?”

“가능하다면 당장 오늘이라도 가야죠.”

에스티아가 일상 이야기하듯 편안한 톤으로 말했다. 반면에 이안과 에버하르트는 당장이라도 바리케이드를 칠 것처럼 깜짝 놀랐다.

“안 됩니다, 아가씨!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산행입니까.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아빠가 딸에게 훈계하듯 매서운 음성이었다.

“그럼 이대로 후작을 계속 기다리게 해? 이건 좋은 기회야. 꽃으로 오스카 후작에게 또 다시 접근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에스티아의 시선이 에버하르트에게로 향했다.

“오스카 후작은 내가 이 사람을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래서 줄기차게 내 주변을 맴돌면서 날 손아귀에 쥐려고 하고 있어. 물론 그 반대라고 생각해서 더 그러는 걸 수도 있고.”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다만 내가 그나마 확신하는 건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걸 그 남자가 바라고 있을 거라는 거야. 그럼 불안해서라도 이런저런 말을 내뱉겠지. 그리고 그 사람이 꼭 찾아야 할 꽃이 내게 있고.”

“잠깐 그러면…….”

이안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걸 눈치챈 에스티아가 그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어디까지나 그러는 척이니까.”

나는 과거의 기억이 있고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나는 당신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다. 어쩌면 오스카 후작은 그걸 인정하기 싫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기억이 없길 바라니까.

그건 비단 에버하르트를 사랑하지 않아져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 후작과도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작은 그녀가 기억이 없길 바라는 것일 거다.

“이분을 좀 사랑하는 척할 생각이야, 이안. 진짜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아, 네…….”

이안이 슬쩍 대공 쪽을 쳐다보았다. 초롱초롱하던 사모예드의 귀가 축 처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스퀘일러 상단주님이 궁으로 오시기로 한 날이 언제였죠?”

에스티아가 일부러 대공을 향해 물었다. 그가 정신이 딴 데로 가 있는 듯해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내일모레입니다.”

“그럼 내일까지 쉬고 내일모레 스퀘일러를 만나는 대로 소수만 꾸려서 꽃을 찾으러 가야겠어요. 시간 괜찮으신가요, 전하?”

에스티아의 표정은 동요하는 기색 없이 평온했다. 언제든 떠날 사람 같아 그의 마음이 꽉 조여들었다. 시간이 안 된다고 해도 마련을 해야 했다. 그래야지 떠나지 말라고 구걸이라도 할 테지.

“좋아요, 그럼 이제는 얘기가 다 끝난 거죠?”

에스티아가 왼손으로 무릎을 탁 치면서 둘을 향해 물었다. 이안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에버하르트는 미동도 없었다. 그 모습에 에스티아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전하?”

에스티아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에스티아는 고요했다. 마치 다른 패만 발견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버릴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거 같았다.

적의 시체 사이를 걸어갔을 때도 떨리지 않던 손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혹시라도 이안이 이걸 볼까 손을 뒤로 숨겼다. 다행히 이안은 보지 못했지만 에스티아는 그 손을 보고야 말았다. 에스티아가 후 하고 숨을 내뱉었다.

“이안, 이제 가 봐. 방은 궁인에게 말해서 배정받고.”

“네? 저만요? 그럼 아가씨와 전하하고 단둘이서만…… 안 됩니다!”

멍해지던 이안이 펄쩍 뛰었다.

“침실에 두 분이서만 계신다니요! 제 눈에 흙이 들어간다고 해도!”

이안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그 모습이 딱 결혼에 반대하는 친오빠 느낌이라 에스티아는 웃음이 나왔다.

“걱정하지 마. 무슨 일이 있었을 거 같으면 진작에 있었어. 정 걱정되면 1시간 후에 와 보든지.”

이거 안심시키는 거 맞아? 이안이 더욱 얼굴을 험악하게 구겼다. 하지만 에스티아의 고집을 꺾기란 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안은 한발 물러섰다.

“그러면 1시간 후에 옵니다. 조금이라도 방이 흐트러져 있으면,”

“이안.”

또 얘기가 삼천포로 빠질 기세라 에스티아가 이안의 말을 막았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얼른 나가, 얼른!”

에스티아가 침대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이안을 떠밀었다. 이안이 간절한 표정으로 저항하는 게 보였지만 문은 그의 소망과 다르게 단호하게 닫혔다.

“후.”

에스티아가 문에 등을 대고 숨을 훅 뱉었다. 그러고는 에버하르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전히 풀이 죽은 상태였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리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용당해 준다면서요.”

에스티아가 그의 절박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 잘못했다면서요.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상처받으면 어떡해요. 자기는 더한 말도 했으면서.”

“네, 제가 다 잘못한 게 맞고 제가 더 심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계속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영애한테 저보다 더 좋은 패가 생기면 그대로 버려질까 봐…….”

‘버려진다’라는 말이 에스티아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 줄 순 없었다.

“그렇게 두려웠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죠. 당신이 함부로 대해도 내가 떠나지 않을 거라고, 자만하지는 말았어야지.”

그 말이 맞았다. 자신은 입이 천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가 두려움을 참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이 눈앞을 가렸지만 지금은 그녀의 차가운 얼굴을 보는 게 더 무서웠다.

“네, 제가 잘못…….”

다시 잘못을 빌려 했다. 곧 일어날 일만 아니었다면.

움찔. 뺨에 닿는 손길에 에버하르트가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작은 손을 그의 뺨 위에 얹고 있었다.

“벌써부터 불안해하면 내 옆에 어떻게 있으려고 그래요. 걱정하지 마요. 오스카 후작의 꿍꿍이를 알아내기 전까지 당신을 버릴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당신을 온전히 믿는 건 아니에요.”

안심하던 에버하르트는 순간 아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폐하라면 믿을 수 있어요.

레이븐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유치한 감정이 솟구쳤다. 그는 그런 자신의 어수룩함이 혐오스러웠다. 이 순간에서조차 질투라니. 이 순간에서조차 그 신뢰를 탐을 내다니.

“왜요?”

그걸 눈치챘는지 에스티아가 은근히 물어 왔다.

“레이븐은 믿어도 당신은 믿지 않아서 질투 나요?”

하기야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겠지.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전 예전부터 당신 곁에 있는 남자란 남자는 다 싫어했습니다. 오스카 후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남작도, 당신이 아끼는 사용인들마저 가리지 않고. 하물며 남자한테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제가 당신이 아끼는 하녀들마저 질투했다면 믿겠습니까?”

그의 지나친 솔직함에 에스티아의 눈빛이 혼란스러움으로 흔들렸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난 당신이…….”

물론 그마저도 그의 눈에는 아름답게 보였지만 말이다. 빛은 다른 색이 스며들어도 눈부신 빛인걸. 설령 검은색이 덮쳐도 어둠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 그녀 앞에서 어둠도 빛도 다 무의미하다.

그녀의 눈에도 그의 감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몰랐던 게 이상했을 정도였다. 겉으로야 당신이 싫다, 경멸스럽다 해도 이리 티 나는 걸 왜 몰랐을까.

“난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날 사…….”

답답한 마음에 그 ‘단어’를 입에 담으려던 에스티아는 말을 멈췄다. 왠지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정말 마음이 흔들리게 될까 봐 겁이 났다. 과거 에스티아를 사랑해서라도 그녀는 그를 사랑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랑할 자신도 없었다.

에스티아의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그 손을 에버하르트가 붙잡았다. 그는 그 손을 쥔 채로 살짝 에스티아를 끌어당겼다. 당황한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의 얼굴이 손바닥 두께만큼의 사이만 두고 가까이 있었다.

“당신 곁에 있고 싶은 이유야 수십 개는 댈 수 있겠죠. 하지만 그건 그저 부가적인 것뿐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마음을 감쌌다.

“당신은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사랑스러웠는걸. 언제나 그랬는걸.”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짧아진 머리카락 끝을 다른 한 손으로 조심스레 잡았다.

“그냥, 그냥, 그런 것뿐이에요. 내가 당신을…….”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았던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조심스레 갖다 댔다. 말하고 싶었다. 열렬히 그 단어를 입에 담고 마음을 전부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내가 한순간도 빼놓지 않고 당신을 원하고 있었다고.

그러면 도망가 버리겠지. 그래서 그는 그저 그녀의 옆머리를 조심스레 넘겨줄 뿐이었다. 평생을 겉에서 맴돈다고 해도 그저 볼 수만 있다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럼 훗날 남을 내 미련도 지울 겸, 당신도 안심시킬 겸…….”

그렇다고 착각하지 마요, 오해하지도 말고. 이건 그냥 배려일 뿐이니까.

모진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 닿은 촉감은 반대로 너무 부드러워서. 그는 동아줄을 갈급하게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도 그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가 한없이 제 아래에서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다.

그에게 의지하고 싶었다. 그리고 짓밟고 싶었다. 한 가지 감정은 현재의 것, 다른 한 가지는 과거의 것이었다.

그렇게 에스티아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 양가적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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