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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4화 (95/141)

94화 - 다른 남자하고

캐롤 부인은 표정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이 황궁에서 꽤 오래 있었는데 대공이 이렇게 부드럽게 미소 짓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레이첼이 궁에 들어온 이후부터 쭉 궁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대공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다.

대공은 어렸을 때도 참 차분했다. 한참 미운 나이라던 4살 때도 너무 얌전해서 황실 일원들은 물론 궁인들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하물며 그 온화한 황제도 그 나이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그러다 보니 황제가 주로 장난치는 쪽이었고, 대공은 그걸 평온하게 받아 주는 쪽이었다. 선 황제는 어떻게 애가 저러냐고 선대 대공작에게 한마디 했을 정도였다.

“아뇨,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전혀 안 바쁜데요.”

에스티아가 능청스러운 에버하르트의 태도에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에스티아가 도움을 요청하듯 캐롤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이 상황을 구경하기 바빴다.

대공이 한때 죽고 못 산다던 여인이 이분이셨구나. 캐롤은 바로 눈치챘다. 어쩌면 ‘한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금 대공의 표정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캐롤 부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호호 웃었다.

“어머, 제가 깜빡한 일이 있네요! 어휴, 태후 폐하께서 시키신 일이 있었는데. 내 정신 좀 봐!”

아. 에스티아가 저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부인 너무 티가 나잖아요.

“그럼 가 보셔야겠네요. 영애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좋은 시간…… 아니, 이만 가 볼게요!”

둘은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 것처럼 죽이 잘 맞았다. 에스티아는 캐롤 부인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영애.”

에버하르트가 조심스럽게 에스티아에게로 다가왔다. 에스티아는 태연한 척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잘 주무셨습니까?”

방금 여유로운 자세는 언제 가고 그는 온순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귓불이 또 빨개져 있었다. 그걸 보니 평소의 그 포커페이스가 정말 힘들게 유지한 거구나 싶었다.

에스티아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짝 둘러보고는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그의 귓불과 목덜미를 살살 쓰다듬었다.

“잘 잤죠. 전하는요?”

사실 민망한 속내를 감추려고 한 행동이었다. 아무리 이 사람을 괴롭히고 싶다고 한들 자신은 팜므파탈이나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걸 눈치챌 여유도 없는 듯했다. 반쯤 눈이 감긴 데다가 목덜미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상태였으니까.

“저는…… 잘 못 잤습니다. 당신이 계속 보고 싶어서.”

에스티아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도대체 이런 간지러운 말을 어디서 배운 걸까. 에스티아는 그가 어이없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서 손길을 거뒀다. 그는 그걸 아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에스티아는 혹시라도 그 반응에 기대고 싶어질까 봐 부러 날카롭게 반응했다.

“최근 들어 갑자기 그런 거겠죠. 뻔뻔하실 때가 차라리 더 나았네요. 지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에스티아가 그를 홱 지나쳐 갔다. 그가 다시 풀이 죽는 게 느껴졌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러지 않으려 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이 놀이에 진지해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가요.”

안 그래도 굴하지 않고 뒤로 졸졸 따라오는 저 남자 때문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마음이 술렁거리고, 의식하게 되고, 기대하게 된다. 언제 변해 버릴지도 모를 저 무책임한 마음에 기대고 싶어진다.

에스티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에서야 잘못했다, 어쨌다 해도, 전에 했던 모진 말들이 다 연기였다고 해도, 상처받았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따라오지 않으셔도 돼요. 길 아니까.”

미리 알아 두면 좋을 거 같아 캐롤 부인한테 상세히 듣고 오는 길이다. 에스티아는 기억하는 건 자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여기서 오른쪽, 잠깐 오른쪽이 맞나?

에스티아가 우뚝 멈춰 섰다. 분명히 왼, 오, 왼, 오, 오……. 아니다. 왼, 오, 오, 왼이었나?

“오른쪽 맞습니다, 영애.”

“알아요!”

에스티아가 찌릿 하고 눈을 노려보았다. 그걸로 기죽지 않으리라는 건 알았지만 그는 맑아도 너무 맑은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주인을 충실히 쫓아오는 충견 같았다. 아무래도 이 상태로 가는 건 더 바보 같다 싶어서 에스티아는 결국 항복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내 부탁드려요. 역시 길이 복잡하네요.”

왠지 뻘쭘했지만 그래도 괜히 오기 부리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에버하르트가 바로 성큼성큼 에스티아 옆으로 다가왔다.

“근데 주변에 궁인들이 없네요. 궁인이 있었으면 궁인한테 부탁하려고 했는데.”

에스티아가 주변을 빠른 고갯짓으로 둘러보았다. 복도를 분주히 누비던 궁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혹시.

“전하?”

에스티아가 떠보듯이 에버하르트를 불렀다. 그랬더니 역시나 눈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시선을 피했다. 오호라. 그가 꼼수 부리는 걸 눈치챈 에스티아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 전하가 궁인들을 막은 건가요?”

“죄송합니다.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서.”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수줍은 음성이 그녀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가 달콤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그가 짓밟았을 수많은 그녀의 음성이 생각났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책 속에서 묘사되었던 에스티아의 절규가 머릿속을 스쳤다.

“제가 전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이렇게 마음대로 하시는 건 불편해요.”

에스티아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영애.”

뒤에서 그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스티아는 무시했다. 그러자 그가 큰 보폭으로 그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제가 혹시 실수한 겁니까? 죄송합니다. 영애를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요?”

에스티아가 뚝 걸음을 멈추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고 나서도 제가 불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네요. 혹시나 싶어 말씀드리는 건데, 착각하지 마세요. 전하가 했던 말 기억하시죠?”

“어떤 말 말입니까?”

언뜻 보면 보통 무표정 같았지만 눈빛은 이미 상처가 짙게 물들어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남자하고도 끝까지 갈 수 있냐고 하셨잖아요. 어제는 단지 그런 것뿐이라고요.”

아무리 이 남자가 무릎 꿇고 빈다고 해도 그 말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한 사람에게 수치를 내뱉은 말이 설령 연기였다고 한들, 합의되지 않은 연극이라면 합리화할 수 없었다. 그건 아마 이 남자가 잘 알 것이다.

“그랬죠. 제가 그랬죠.”

그가 곱씹듯 말을 내뱉었다. 후회가 잔뜩 어려 있는 눈빛이었지만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어제는 그저 스쳐 지나간 하루였을 뿐이에요. 누구하고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조금이라도 더 상처를 주고 싶었다.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상처 입는 모습을 옆에서 보고 싶었다. 어차피 떠나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에스티아는 언젠가 그가 그런 마음이 들 때까지 그를 끝까지 괴롭힐 생각이었다.

“빨리 길 안내 부탁드려요.”

“누구하고도……?”

그저 상처만 줄 생각이었는데 그의 목소리가 왠지 이상했다. 고개를 돌려 얼굴을 보니 짙은 질투심이 그의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나중에 그와 그런 날이 있었는지 기억 못할 거 같다는 의도로 얘기한 건데 아무래도 다른 포인트에 꽂힌 듯싶었다.

저 펜던트 눈빛. 저 눈빛을 어떻게 눈치 못 챘나 싶을 정도로 선명했다. 그가 한 뼘 정도만 차이 날 정도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 마세요.”

“뭐를요.”

에스티아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를 꽉 깨문 그의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얼마든지, 저를 어떤 용도로도 이용해도 좋으니까 다른 사내하고 하지 마세요.”

“그니까 뭐를요.”

에스티아가 태연자약한 얼굴을 쭉 내밀었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입술에 닿을 수 있도록. 대놓고 한 도발이었다. 당신은 결국 내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농락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홀린 듯 그녀의 의도에 응했다.

“이런 거요.”

그가 그녀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그 이후 에스티아가 계속 차가운 눈빛을 유지했기에 그는 더 다가오진 않았지만 충분히 떨고 있음을 에스티아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귓가가 대공의 가슴에 가까이 있었고 그의 심장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뛰고 있었으니까.

“글쎄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문제죠.”

에스티아가 그의 심장 쪽에 손을 올린 채 나지막하게 말했다. 올려다보진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심하게 표정이 일그러져 있을 거라는걸.

그녀의 예상이 맞다고 하듯 그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고는 다른 쪽 팔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가 평온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안은 손에 힘을 줬다.

“제가 미칠 거 같거든요.”

불안해서. 그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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