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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5화 (96/141)

95화 - 난 이 사람을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너무 컸다. 에스티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느끼고 있는 게 맞다면 이 심장 소리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소리가 합쳐서 나는 소리였다.

여태까지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에 이끌려 심장이 요동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격렬했던 적은 없었다. 에스티아는 그를 밀어내고 싶었다. 그가 이 소리를 들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움직이는 걸 막기라도 하는 것처럼 머릿속에 선명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티아.

어리지만 이 목소리는 분명 이 남자의 어렸을 적 목소리였다.

-에버, 이 꽃 예쁘지? 파란 장미야. 너무 마음에 들어.

-글쎄, 난 별론데.

-왜?

쿵쿵. 지금 심장이 더 속도를 높이는 게 그가 자신을 껴안고 있어서 그런 건지, 기억 속 그의 눈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파란 장미 꽃말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거든. 너 머리색과 닮아서 예쁘긴 하지만 그래도 싫어, 이 꽃.

꽃잎보다 진한 감정이 그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그가 파란 장미를 싫어해서 아쉬웠지만 꽃보다 그가 더 아름다워서 에스티아는 웃었다.

‘괜찮아, 꽃말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에스티아?”

내가 사랑해 줄게.

“싫어…….”

귓가에 그의 음성이 들렸지만 에스티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제는 싫어, 안 하고 싶어.”

에스티아는 간절하게 중얼거리며 그의 어깨에 짚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더욱 바싹 끌어안았다.

“싫은 거 알아요. 내가 죽도록 증오스럽고 혐오스럽다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전…….”

그의 음성이 두려움으로 잘게 흔들렸다.

“노예처럼 부려지더라도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에버.

“에버하르트…….”

속이 울렁거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일순 흐려졌다.

“에스티아?”

갑자기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에버하르트가 잠시 몸을 뗐다. 곧 그의 눈에 창백해진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에스티아가 보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티아? 에스티아? 왜,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그가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잡았다. 에스티아의 얼굴은 차갑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생기가 아예 빠져나갔다고 생각할 정도로.

오래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어머니 조이가 쓰러졌을 때였다. 하얘진 에스티아는 몸이 차가워지더니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졌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조이처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에게는 공포의 순간이었고, 그런 순간을 다시는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로 의원에게 가요. 지금 당장.”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안아 올리기 위해 두 팔을 그녀의 허리와 다리 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에스티아가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잠시 현기증이 나서 그런 것뿐이에요. 이 정도 가지고 왜 놀라고 그래요.”

에스티아가 손등으로 식은땀을 닦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에버하르트는 애가 탔다.

“제 말 들으세요. 전에도 이러다가 쓰러진 적이 있다고요. 또 아프면 어떡합니까?”

“에버하르트.”

에스티아가 매섭게 눈을 뜨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칼날 속에 담긴 이름이었지만 그는 왠지 자신이 억지를 부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녀에게 이름만 불릴 수 있다면.

“이 정도 현기증은 아무렇지 않아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당신 덕분에 경험했는데, 이런 게 대수예요?”

“하지만…….”

“전에 미룬 소원 카드 지금 쓸까요? 당신이 다시는 내 곁에 오지 않는 걸로?”

그녀는 방금 전 정신을 잃을 뻔한 사람답지 않게 또렷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끔찍한 질문에 다른 의미로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당연히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말씀만 하지 말아주세요.”

그는 마음을 찌르는 비수에 얼굴을 일그러트렸지만 바로 그녀의 말에 순응하며 제복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누가 지나갈지도 모르는 복도라는 건 알지만 불과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어제인지라 에스티아가 괜히 움찔했다.

“몸이 차십니다. 얇게 입으셨으니 뭐라도 걸치셔야죠.”

그가 벗은 겉옷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워낙 키가 큰 남자인지라 겉옷이 거의 드레스처럼 그녀의 몸을 덮었다. 훅 밀려오는 그의 체취에 에스티아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에버하르트는 그녀의 안색이 좋아졌다고 생각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좀 따뜻하십니까?”

‘난 이 사람을 원해.’

머릿속 어딘가에서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에스티아는 그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에버하르트.”

두근. 나지막하고도 매혹적인 음성에 그는 심장을 부여잡을 뻔했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그가 그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아이비에게 안내해 주세요.”

“네.”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간지러우면서도 생생한 촉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아이비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대공이 미리 알린 거 같았다. 그 틈새에 언제 그녀에게 미리 일러뒀나 싶어 에스티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영애!”

“에스티아라고 불러요.”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아름다운 미소였지만 그 미소가 안색을 가려 주는 건 아니었다. 아이비는 버선발로 뛰어가 에스티아를 반기더니 그녀를 폭 껴안았다.

“소식 들었어요. 고생 많았어요. 몸은 괜찮아요?”

그새 또 말라 있었다. 요 며칠간 얼마나 고생을 심하게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요. 고마워요, 아이비.”

“이벤다라고 불러요, 에스티아.”

둘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서로에게 정이 가는 걸 느꼈다. 허울만 가득한 귀족 사회에서 보기 힘든 선한 사람이라는 걸 둘 다 느낀 탓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왠지 범접할 수 없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뒤로 물러섰다. 부러웠지만 동시에 에스티아가 좋아해서 안심이 되었다.

“세상에, 정말. 뭐 좀 먹여야겠네요.”

아이비가 포옹을 풀고 에스티아의 몸을 살폈다. 말하는 투가 언니 같아서 에스티아는 웃음이 나왔다.

“팔은 또 왜 이래요?”

마주 웃던 아이비가 붕대가 감긴 에스티아의 팔을 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낙마했어요. 글레멘드 공작의 기사께서 말에 총을 쏘셨거든요.”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럴수록 아이비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다. 나중에 가서는 눈빛과 표정에 아무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에스티아는 그게 곧 아이비의 분노 표출 방식이라는 걸 눈치챘다.

“전문으로 훈련받은 기사가 그렇게 낙마해도 회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비가 기가 막힌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허리에 찬 검집으로 향했다.

“훈련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아니 자신의 딸이 타고 있는데도 총을 쐈군요.”

아이비의 긴 손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그 동작에서 짙은 살기가 느껴져 에스티아는 아이비의 손을 붙잡았다.

“괜찮아요, 이벤다. 감사히도 많은 분들께서 저를 도와주셨어요. 지금은 잘 회복하고 있어요.”

“그렇다기엔 안색이…….”

아이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뺨에 손을 얹었다. 그러더니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너무나 따뜻해서 에스티아는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는 걸 느꼈다.

“그래야죠. 제국을 살린 개국 공신인데. 굳이 ‘사심’이 아니더라도 에스티아를 도와야죠.”

아이비의 눈빛이 새초롬하게 에버하르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눈빛을 받자 움찔하더니 곧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벤다가 도와준다면 누구의 도움이 ‘덜’ 필요할 거 같은데,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하지만 그 눈빛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에스티아의 말에 곧바로 순한 사모예드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그의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요. 사심을 갖고 맴도는 ‘날파리’들은 치워야 제 맛이죠.”

으득. 하지만 곧 언제 그랬나는 듯 그의 입에서 뭐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비와 한판 겨루고 싶었지만 에스티아가 있어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부들거리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자, 그래서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될까요, 에스티아.”

“글레멘드 공작이 인신매매를 했을 거라는 걸 태후 폐하께 들었습니다. 덧붙여 전쟁에 대한 것도요.”

에스티아가 어두운 이야기를 꺼내자 아이비의 표정도 바로 진지해졌다.

“그 이야기를 이벤다한테도 듣고 싶어요. 그리고…… 누군가가 저 때문에 연기하는 것도 지긋지긋해서 증거를 잡고 싶기도 하고요.”

“?”

의미 모를 말에 아이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고 싶은 거 하고 살려면 나쁜 사람들부터 처리해야죠. 그게 인신매매든, 이상한 마법이든.”

에스티아가 왼손으로 아이비의 손을 꼭 쥐었다.

“부끄럽게도 전 지금 혼자서 제 몸을 지킬 수 없어요. 이안과 있지만 웬트한테는 개인적으로 명을 내릴 일이 많아요. 그래서 정말 죄송하지만, 이벤다의 도움이 필요해요. 당신이 저를 좀 지켜 줬으면 해요.”

“에스티아.”

“저 사람이 항상 저를 지킬 순 없으니 이벤다의 시간을 조금만 제게 주세요.”

끌어내야 했다. 주저가 되면서도 물리쳐야 했다.

원작 속 서브 여주의 아버지를. 그리고,

원작 속 여주인공과 그 곁에 있는 악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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