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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6화 (97/141)

96화 - 두 숨결

에스티아의 부탁은 이거였다. 산에서 어떤 ‘물건’을 찾아 오스카 후작저에 가야 하는데 그때 아이비가 동행을 해 달라는 거였다. 이안에게는 따로 시킬 일이 있었다.

“왜 제가 아니라 부단장입니까?”

에버하르트가 옆에서 불만스럽다는 듯이 내뱉었다.

“전하께서는 후작을 싫어하시잖아요. 거기서 괜히 눈치 보기 싫어요.”

보나 마나 뻔했다. 오스카 후작저에 그와 함께 가게 된다면 꽃이 문제가 아니라 분위기가 아주 살벌할 것이다. 그사이에서 오스카 후작을 제대로 캐묻지도 못한 채 나올 바에는 아예 그와 별 연관이 없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게 나았다.

“해 주시겠어요, 이벤다?”

“그거야 어렵지 않죠. 전 괜찮아요, 에스티아.”

아이비가 선뜻 에스티아의 부탁을 받아 주었다. 에스티아는 좋은 친구를 만난 거 같아 저도 모르게 배시시 웃었다.

“……금방 오시는 거겠죠?”

에버하르트가 축 처진 눈으로 눈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을 지긋이 보던 에스티아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건 얘기 나눠 봐야 알겠는데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향해 의자를 바싹 잡아당겼다. 아이비가 입을 떡 벌렸다. 도대체 이 남자가 몇 명에게 충격을 주는지 모르겠다.

“빨리 돌아와 주세요. 그 남자 집에 오래 계시는 거 싫습니다.”

“세상에…….”

아이비가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읊조렸다. 아마 그녀가 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일 것이다. 아직 에스티아조차 적응이 되지 않았건만, 이 뻔뻔한 남자만이 간절한 눈동자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티아가 그걸 무시하듯 아이비를 향해 고개를 홱 틀었다.

“그러고 보니 오스카 후작님을 본 적이 있나요, 이벤다?”

“오스카 후작이요…….”

아이비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살짝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네요.”

“나중에 저랑 같이 가요. 인물이 되게 좋으시거든요.”

“음…….”

에스티아는 비꼬듯이 말했지만 두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비의 시선이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를 왔다 갔다 했다. 에스티아가 조용히 차를 마시는 반면, 에버하르트는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닙니다.”

게다가 옹졸하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이비는 자신의 상사로부터 이런 유치한 모습을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건 전하만의 생각이신 거 같은데요.”

“영애의 생각을 제가 바꿀 기회는 없겠습니까?”

에버하르트가 뻔뻔한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옷은 멀끔하게 차려입었는데 눈빛은 영락없이 칭찬을 받고픈 어린애라 에스티아의 마음이 말랑해졌다. 시선을 돌린 에스티아의 귓가가 붉었다.

‘내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왠지 모를 회한에 젖어 든 아이비가 결국 대화 주제를 바꿨다.

“전쟁 이야기도 듣고 싶다고 하셨었죠?”

“네.”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에스티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자세를 다잡았다.

아이비의 이야기는 레이첼과 에버하르트가 들려준 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바로 그녀의 부상에 대한 것이었다.

“그때 전쟁을 하다가 옆구리가 베였었습니다. 꽤 깊이 베여서 나중에는 선발대에 설 수가 없었죠.”

그때가 선명하게 생각나는 듯 아이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부상을 당했을 때는 전쟁이 거의 끝나간다고 해도 전쟁 중이어서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볼 시간이 없었습니다. 전쟁 후, 저택에서 치료를 받을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죠.”

중저음의 목소리가 조용히 전쟁 당시의 순간을 불러왔다.

“검상을 보면 검을 알 수 있고, 검을 쓴 사람도 알 수 있죠. 만약 적국 중에 저를 그렇게 벨 수 있는 병사가 있다면 저는 진즉 그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예상 가능한 사람이 없었고요?”

“그렇죠. 마치 저를 일부러 전선 앞부분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막은 것처럼요.”

“…….”

딱 들어도 수상한 낌새가 술술 풍겼다. 어쨌든 아이비는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다. 그런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길 만한 사람이면 아이비가 모를 리가 없었다.

“상처가 워낙 깊었어서 흉터는 남아 있습니다. 몸에 증거가 남아 있으니 딱 한 번만 더 마주친다면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요…….”

검상이라. 한참 그 단어를 속으로 곱씹던 에스티아가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전하한테서 그 당시 실종된 병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어요. 그 병사에 대한 자료를 볼 수 있을까요?”

문득 에버하르트가 했던 말을 생각해낸 에스티아가 아이비에게 물었다.

“네, 자료야 기사단에서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으니까요. 다만 빌려 가시는 건 안 되고 보시는 건 가능합니다. 기록실의 로빈스 경에게 말을 해 두겠습니다.”

“고마워요, 이벤다.”

“아참!”

아이비가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로빈스 경이 에스티아의 열렬한 추종자입니다. 그분이 극적인 스토리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참고로, ‘미혼’입니다.”

“네?”

“아이비.”

어리바리한 얼굴을 한 에스티아와는 달리 에버하르트는 매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요. 로빈스 경이면 인물 괜찮죠. 로빈스 백작가 차남이죠. 성품도 그만하면 훌륭하죠. 무엇보다 사람이 참 겸손하고 착하고…….”

“이야기 다 끝나셨으면 일어나시죠.”

에버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딱 봐도 조마조마해 보여서 또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혹시 신분 가지고 사람 무시하거나 그러진 않죠?”

에스티아가 아이비 쪽으로 몸을 숙였다. 전에 그가 에팅을 무시한 걸 염두에 두고 뱉은 말이었다.

끄응. 에버하르트가 절로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멀끔한 남자가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있으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마음 떠나기 전에 실컷 놀려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요. 그건 제가 보장해요. 영애의 배필로…….”

“아이비 경.”

에버하르트가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걸 본 에스티아가 풋 웃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이벤다한테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의 표정이 풀어졌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눈빛이 당혹감으로 젖어 들어 갔다.

“기대되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볼게요. 쉬어요, 아이비.”

에스티아는 왔을 때처럼 아이비와 포옹했다. 아이비가 멀리 마중 나오지 않게 한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와 함께 레이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시계는 어느새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가야 할 때였다.

“영애.”

얼마나 걸었다고 역시나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에게 말을 걸어 왔다. 에스티아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어갔다. 그러자 에버하르트가 성큼성큼 그녀의 옆에 섰다.

“에스티아.”

“왜요.”

에스티아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에버하르트가 걷는 속도를 높여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에스티아가 찌릿 그를 째려보았다. 그가 움찔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비켜 설 거 같지 않았다.

“뭔데요.”

“자료 조사 목적으로만 가시는 거죠?”

“아뇨?”

“예?”

에스티아의 태연한 반응에 도리어 에버하르트가 당황했다.

“아예 사심이 없다고는 말 못 하겠는데요. 무슨 문제 있나요?”

하. 에버하르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에스티아는 그의 겉옷을 걸치고 있지도 않았다. 덕분에 매혹적인 어깨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붉은 입술과 평온히 그를 담고 있는 검은색 눈동자가 안 그래도 심장을 더 세차게 뛰게 했다.

“설마 혼자 가시는 건가요?”

“그런 데도 전하와 같이 가야 하나요?”

“그럼 겉옷이라도,”

“안 추운데요.”

에스티아가 차갑게 그의 말을 잘랐다. 그는 절로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확실히 안 추운 거 같다. 몸속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열이 났으니.

“다른 옷 입고 가시면 안 됩니까?”

“태후 폐하께서 선물해 주신 옷이에요. 이 옷 입고 로빈스 경 만나러 갈 거예요.”

에스티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그동안 쌓인 게 많긴 했는지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즐거웠다.

“게다가 이벤다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걸요. 이제 저도 제대로 된 사랑 할 때가 되긴 했죠.”

에스티아는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이성이 뚝 끊기는 소리를.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끝을 잡아왔다. 그와 반대로 눈빛은 소유욕으로 들끓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런 그의 손을 잡고 근처에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문을 닫자마자 그가 문에 손을 집고 그녀에게 바싹 몸을 붙여 왔다. 에스티아가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죄송하지만, 더 참아 주셔야겠어요. 좀 이따가 로빈스 경은 ‘혼자’ 만나러 갈 거예요. 기다리든 말든 그건 전하의 마음이에요. 잘 참을 수 있죠?”

“같이는 안 됩니까?”

“안 돼요.”

그가 상체를 숙여 그녀의 목에 입을 맞추었다. 그 상태로 입술을 움직였다. 숨결이 에스티아의 목을 간질였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빨리 오셔야 합니다. 아니, 빨리 와 주세요. 방으로 오시는 마지막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자국이 남을까 에스티아는 그의 뺨에 손을 얹어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언제 올지 몰라요. 저녁이나 밤늦게 올 수도 있어요.”

“그래도 기다려야죠.”

그의 숨결이 점점 가까워졌다.

“하루라도 당신을 안 보면 안 되니까.”

이미 보지 않았냐고 말을 하려던 에스티아의 입술로 부드러운 촉감이 와 닿았다.

두 숨결이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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