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앞으로도
숨이 막히듯 덮쳐 오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그 붉은 입술이 하얀 피부 위에 있을 때가 문제였다. 혹시라도 흔적이 남을까 자꾸 밀어내자 그는 그 전날 그랬던 것처럼 드레스를 끌어 내렸다.
다행히 곧 레이첼을 보러 가야 했기에 그는 살짝만 드레스를 내렸다. 하지만 전날보다 더 집요하고 농밀했다. 그는 옷 안의 하얀 여백에는 흔적을 남겨도 되는지 묻는 것처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티아가 멀끔하게 넘긴 그의 머리를 허락하듯 쓰다듬자 그는 더 격렬하게 혀를 움직였다.
“아흑.”
그가 체리를 베어 물듯 여백 위 붉은 곳을 깨물자 에스티아가 신음을 내뱉었다. 에스티아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보나 마나 방금 일에 대한 보복인 게 분명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에스티아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오른손으로는 부드럽게 그녀를 어루만졌다.
그저 괴롭히고자 한 것인데, 이러면 후에 남을 미련을 지울 수 있을까 싶어서 한 것인데, 어느새 에스티아는 이 열기에 휩쓸리고 있었다.
“살살…… 아…… 살살해요.”
에스티아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그를 나무랐다. 그가 다시 올라와 혀로 그녀의 윗입술을 쓸며 씨익 웃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요. 오늘 빨리 오면 무릎 꿇고 해 줄 수도 있는데.”
에스티아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이 남자는 때때로 지금처럼 그녀를 당혹스럽게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에스티아는 깊은 분함을 느끼면서도 왜 ‘진짜 에스티아’가 이 남자에게 빠졌는지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제복을 차려입었지만 묘하게 흐트러진 모습, 거기에 순종적인 눈빛이면서도 기만하는 듯한 미소가 주체할 수 없이 배덕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여전히 입술과 손을 열심히 움직인 채로 왼손으로 허리춤에 걸린 회중시계를 들었다. 입술이 맞부딪히는 소리, 두 남녀의 짙은 숨소리 사이로 ‘딸깍’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12시…… 40분이에요. 5분만, 5분만 더 해도 될까요?”
“…….”
그렇게 해 줘요. 당신이 날 상처 줬던 만큼.
그녀가 삼킨 말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다시 몸을 숙였다. 그의 얼굴이 에스티아의 목 아래로 향했다.
“으응…….”
그녀의 입에서 절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혀가 살을 스치는 소리, 사탕을 빨듯 단 순간을 한껏 머금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울렸다.
마치 그녀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 * *
오전의 일로 인해 에스티아는 레이첼에게 열이 나는 거 같다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어야만 했다. 그만큼 자신의 얼굴이 빨개졌나 싶어 에스티아는 민망해졌다. 하는 수 없이 살짝 미열이 있는 거 같다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레이첼의 걱정 속에 점심을 마친 에스티아는 레이첼에게 혹시 남자 옷을 구해다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퀸 오브 핑크스’를 찾으러 갈 때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입고 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산으로 꽃을 찾으러 가는데 귀족 남성의 옷을 입고 가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안 그래도 꽃을 찾은 후에 글레멘드 영지에 몰래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눈에 띄지 않는 남자의 옷이 꼭 필요했다.
“조이의 딸에게는 얼마든지.”
레이첼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금방 옷을 구해다 주겠다고 말했다. 에스티아는 자신의 방에 옷이 도착하기 전까지 로빈스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레이첼에게 자신의 일정을 알리자 레이첼은 에스티아가 못내 걱정스러운 듯 타일렀다.
“어휴! 멋진 하극상을 펼치려는 건 좋지만 몸 챙겨야지!”
에스티아에게 다른 일이 있다는 걸 눈치챈 듯했지만 레이첼은 더 묻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오스카 후작과 관련된 일이 해결되면 레이첼에게도 들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레이첼하고 헤어진 에스티아는 곧바로 기록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길을 외워서 동행 없이 혼자 갔다. 굳이 안내가 필요 없기도 했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 남자를 계속 괴롭히는 게, ‘에스티아’가 남긴 미련 때문임을 안다. 현재 로셸한테 대적하기 위해서라도 에버하르트 바일은 꽤 쓸모 있는 패다. 하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그저 그를 곁에 두기 위한 변명처럼 느껴졌다.
‘오늘 빨리 오면 무릎 꿇고 해 줄 수도 있는데’
대놓고 유혹하듯이 말하던 그 목소리가 다시 생각났다. 에스티아는 걸음을 멈추고 벽에 자신의 이마를 쿵쿵 내리쳤다.
“넘어가면 안 돼, 넘어가지 말자. 넘어가지 말자.”
에스티아는 애써 그가 전에 오스카 후작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이 자신이 흑마법을 써서 시간을 되돌렸고 그 부작용으로 영애가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 했습니다.’
줄곧 그게 마음에 걸렸다. ‘시간을 되돌렸다.’ 이상하게 그 말만 생각하면 머리의 회전이 뚝 멈추는 기분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걸 막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평안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계속 그녀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다.
“에버하르트…….”
에스티아는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불안감이 그 남자와 관련 있다고 확신했다.
에스티아가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쿵쿵쿵쿵. 아직도 심장이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 얼른 돌아가 그와 함께 있는 순간을 한껏 머금으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에스티아가 좌우로 고개를 홱홱 저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쫙 하는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울렸다.
에스티아는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계속 기록실로 걸어갔다.
기록실은 깔끔했다. 그리고 그 안을 지키고 있는 로빈스는 아이비의 말처럼 선한 인상을 가진 기사였다. 나이는 에스티아와 동갑이었지만 그녀보다 훨씬 앳된 인상이었다.
생각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로빈스는 미리 준비해 둔 자료를 에스티아에게 건네며 조용히 물러났다. 그 전에 에스티아가 좋아할 법한 차와 과자를 갖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의자에 앉아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일반 병사의 자료는 겨우 한 장뿐이었다. 그것도 글씨가 희미해져 잘 보이지 않는. 그나마 이름, 키, 체중, 거주지가 적혀 있었는데, 가장 중요할 법한 주소지가 지워져 있었다.
평민에, 일반 병사라는 이유로 대충 적은 게 분명했다. 에스티아는 꾸깃꾸깃한 종이를 조용히 어루만졌다.
인신매매인데 이렇듯 서류가 있다는 건 둘 중 하나였다.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팔아 치운 거거나, 끌려오고 거짓된 정보로 적혀 있는 거거나.
에스티아가 병사의 인적 사항을 작게 읊조렸다.
“루썸, 178cm, 54kg…….”
세상에. 키 178에 몸무게가 54면 보통 마른 게 아니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게 살았으면 성인 남자가 그 키에 이 정도 몸무게밖에 안 나갈까.
종이 한 장 뒤에 감춰져 있을 수많은 고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이름이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찾아볼 수 있을 거 같았다.
기록실은 자료를 대여할 수 없어 에스티아는 몇 안 되는 인적 사항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외웠다. 아쉬웠다. 거주지 주소도 적혀 있었으면 정말 좋았을…….
잠깐 적혀 있었다고?
순간 섬광이 내리치듯 에스티아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에스티아는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곧 그녀의 눈에 연필이 눈에 걸렸다. 에스티아는 왼손으로 연필을 쥔 채 거주지가 쓰여 있었을 곳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서서히 글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에스티아의 눈에 거주지 중 한 단어가 눈에 밟혔다.
‘노베이’
글레멘드 영지의 이름이었다.
* * *
에스티아가 터덜터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대공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로빈스와 이상한 일은 조금도 없었다. 애초에 그를 약 올리기 위해 그렇게 반응한 거였으니.
아까까지만 해도 나아졌던 기분이 다시 축 가라앉았다. 루썸 외에도 사망한 병사들의 거주지를 ‘연필’로 확인한 결과, 무려 그중 30%가 노베이 영지에 사는 평민 남성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절반 정도가 16-18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에스티아’의 아버지, 아니 자신의 아버지가 정말 상상 그 이상의 괴물이구나 싶어 에스티아는 기분이 울적해졌다.
어느새 방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복도에 접어들었다. 에스티아는 얼마 전에 봤던 로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깔끔하게 면도한 턱, 옅은 갈색 머리. 쌍꺼풀 진한 눈에 무정한 눈동자.
딸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니 다른 사람은 어떤 취급을 했을지 눈에 선했다.
전생에서도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건 ‘에스티아’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갑자기 속에서 슬픔이 울컥 솟아 나왔다. 에스티아는 왼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방문 앞에 섰다. 아니, 정확히는 방문이라고 생각했다.
에스티아의 이마에 부드러운 천이 닿았다. 그녀의 머리가 탄탄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아프진 않았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스티아는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에스티아?”
고개를 들자 어리둥절한 표정의 그가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니 에스티아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픈 어머니, 무정한 아버지. 삭막한 ‘에스티아’의 삶에 이 남자가 얼마나 빛이었을까. 그리고 그 남자가 그녀를 버렸을 때는 얼마나 지독한 어둠이 그녀를 찾아왔을까.
“에스티아,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눈에 그녀의 눈물이 뺨을 적시는 게 들어왔으니까.
그가 두 손을 들어 엄지로 조심스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왜 그래. 왜 그래, 티아. 기록실에서 뭔가를 본 거야?”
티아. 그러고 보니 꿈속에서는 그가 그녀를 그렇게 불렀었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에버하르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다시 매달려야 하나 고민하려는 찰나 에스티아가 그의 품으로 와락 안겨 들었다.
“……!”
에스티아가 왼팔로 그를 꽉 껴안았다.
“이번에는…….”
에스티아의 물기 어린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가 그녀를 마주 안았다. 품어주듯이 아주 꽉.
에스티아가 그의 가슴에 뺨을 갖다 댔다. 그의 심장 소리가 에스티아의 마음을 다독였다. 에스티아는 그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버릴 거예요. 그렇게 알아요.”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딱딱하게 굳은 거 같은 그는 곧 힘을 빼더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렇게 될 거예요. 내가 당신이 버릴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찌르는 아픈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