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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98화 (99/141)

98화 - 무릎 꿇고

방에 들어온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에게 딱 한 가지를 물어보았다. 로셸이 에스티아를 심하게 학대했는지, 그는 그걸 알고 있었는지.

에버하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에스티아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쉽게 할 수 없는 이야기인 만큼 그는 열심히 해야 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에스티아에게 따뜻한 차가 담긴 컵을 건넨 에버하르트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작 부인께서는 마법사셨죠. 당신을 낳고 나서는 그만두셨지만 길드 쪽에서 자주 자문을 구해 집을 비우실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공작에게는 그때가 기회였겠죠.”

그의 눈이 짙은 증오로 어두워졌다.

“공작 부인은 바로 눈치를 채셨지만 막상 증거가 없었죠. 하지만 어느 날 제가 공작 부인께 말씀드렸죠. 에스티아가 공작한테 학대를 당하고 있는 거 같다고. 그때 제가 14살 때였습니다. 공작 부인과 손을 잡아 현장을 잡았고 그렇게 학대는 잠시 멈추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가 편찮아지시자 그때 다시 시작된 거죠?”

“당신한테는 미안할 뿐이에요. 자주 공작가를 방문하긴 했고 공작한테 경고도 했지만, 분명 틈을 타서 당신한테 그런 짓을 했을 테니.”

에스티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손안에 차의 온기가 느껴졌지만 마음은 서늘했다.

“지난 2년 동안에는…… 그것도 전부 제 탓입니다. 만약 그때 당신이 학대를 당했다면, 내가 당신을 용서하고 데리고 나왔더라면 당신이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겠죠.”

“당신이 어떻게 그걸 다 막을 수 있겠어요. 자식을 그렇게 고문한 사람이 잘못한 거죠.”

에스티아가 천천히 차를 들이마셨다. 그녀가 좋아하는 차였다.

“……우연히 당신을 마주치게 되면 남작의 표정부터 살폈습니다. 그 사람의 표정이 안 좋으면 공작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거든요. 그럴 때면, 외부에 일을 만들어 공작이 저택을 비우게 만들었죠.”

“사람답게 살려면 친아버지부터 이겨 내야 하는 상황이었군요.”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자조했다. 그 미소가 너무 아파 보여서 그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뺨에 손을 올렸다. 짧아진 머리가 그의 손목을 간질였다.

“태후 폐하께서 공작이 어머니의 시신을 숨겼다고 들었어요. 저, 어머니도 찾고 싶어요. 이상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그래야…… 될 거 같아요.”

“그래요, 도울게요. 당신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 많으니까 말만 해요.”

에스티아의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항상 모진 말만 내뱉던 남자의 입에서 저렇게 다정한 말이 나오니 이상했다.

“내가 물리쳐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 같아요.”

“전쟁을 할 때는 장수가 필요하죠. 그러니까 날 써요, 에스티아.”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에스티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전하는 여전히, 2년 전에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할 생각이 없고요?”

에스티아가 나지막하게 묻자 에버하르트가 떨리는 눈빛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어느 정도 다 끝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오늘은…… 내일 꽃을 찾으러 가야 하니까 푹 쉬고요.”

“네, 그래야죠. 알렌이 보여 준 자료만 정리하고요.”

에스티아가 찻잔을 내려놓고 노트와 펜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알렌……?”

알렌은 로빈스 경의 이름이었다. 에버하르트의 억양이 묘하게 변했지만 에스티아는 눈치채지 못하고 작은 노트와 펜을 가져왔다.

“자료를 확인해 보니 실종자 병사 중 무려 30%가 노베이 영지의 남성이었어요. 꽃을 찾고 나서 잠시 노베이 영지에 가면 좋…….”

“알렌…….”

“……? 전하?”

한창 머릿속에 있던 기록들을 옮겨 적던 에스티아가 그제야 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또 뭐에 꽂혔는지 물어보려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설마 말을 편하게 하기로 한 건 아니죠?”

“아뇨, 편하게 하기로 했는데.”

에스티아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반문했다. 아예 편하게 말을 놓은 건 아니지만 나이도 같아 서로 이름을 부르기로 하였다. 상대 쪽에서 그래도 되냐고 수줍게 물어보는데 딱히 거절하기가 뭐했기 때문이다.

“…….”

에버하르트는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여자의 사교성은 기억을 잃어서도 변함이 없구나 싶어 그는 왠지 착잡해졌다. 그도 그럴 게 해사하게 웃으며 영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면, 정말 심할 때는 글레멘드 공작가에 들어오는 청혼서가 수십 장이었다.

그의 속이 절로 부글부글 끓었다.

“……오늘 갓 만났는데 이름을 부르는 건 좀 빠르지 않습니까?”

노골적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말이었지만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예전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녀가 다른 남자의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게 정말 싫었다.

“오래 알아도 이름으로 안 부르게 되는 관계도 있는데, 그 반대도 있을 수 있지 않나요?”

에스티아가 노트에 병사들의 기록을 적으며 태연하게 맞받아쳤다. 그 말에 에버하르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는 겸손한 사람이 좋거든요. 그런 사람과는 꼭 ‘이름’을 부르며 친구하고 싶더라고요.”

“그때 제가 에팅을 그렇게 얘기한 건…….”

“네, 저한테 상처 주고 싶어서 그랬겠죠.”

그는 입술 끝을 물었다. 맞는 말이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녀의 친구를 그렇게 얘기한 건 그가 잘못한 게 맞았다.

그녀한테 그런 상처를 준 것도 마음이 미어졌지만, 더 괴로운 건 그녀가 그때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다는 거였다. 마치 더는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는 것처럼.

“미안…….”

“이렇게 괴로울 거면 왜 그런 말들을 했어요.”

사과하려던 에버하르트가 말을 뚝 멈췄다. 그의 뺨에 닿은 손이 너무 따스했다.

“저 그때 정말 상처받았어요. 에팅은 저한테 정말 좋은 친구예요. 에팅을 모욕하는 건 저를 모욕하는 거예요.”

“미안해요. 당신에게도, 에티안에게도.”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온기를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부러웠습니다. 당신과 마주 보며 웃는데, 그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으로 보이더라고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서 얼마나 그 미소를 봐 왔을지 샘이 나서…….”

본인이 생각해도 민망한지 그의 얼굴이 벌게졌다.

“오늘도 미소가 얼마나 예쁠까 싶어서, 당신이 기록실에 오래 있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도 얹었다. 작은 손이 큰 손에 완전히 가려졌다.

“……계속 이름을 부르실 겁니까? ‘알렌’이라고…….”

그가 촉촉한 눈으로 에스티아를 올려다보았다.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윽’ 하고 신음을 내뱉을 뻔했다. 아무래도 이 영악한 남자가 그녀가 어느 부분에서 약한지 기민하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마음을 다잡았다. 넘어가 버리면 그걸로 끝이다. 이 작자는 한참은 더 고생을 해야 한다.

“네, 알렌에게 밥도 사기로 했…….”

태연하게 말하려던 에스티아가 말을 뚝 멈췄다.

펜던트 눈빛이 또 나왔다. 저렇게 독점욕이 들끓는 눈을 어떻게 못 알아봤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위험할 거 같아 에스티아가 손을 빼려는데 그가 고개를 틀더니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에스티아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자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흔적이 몸에 남는 게 싫다고 하셨었지요.”

“네……?”

이 작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동시에 간질거리는 느낌도 들었다.

“밥만 같이 드시는 것이지요.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저를 조금 안심시켜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뭘요.”

당황해서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의 입술이 에스티아의 손바닥에서 손목으로, 손목에서 다시 팔까지 움직였다.

“혹시라도 닿을까 불안한 곳에 다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요. 그럼 다른 이에게 보여 주시지 않을 듯하여.”

아무래도 이 남자가 미쳤나 보다. 더욱 큰 문제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우위에 있는 거 같다는 것이다. 그게 새삼 분해진 에스티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화를 내려는데 돌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거기에 에스티아가 놀라기도 잠시, 그 이후에 일어난 상황에 그녀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에스티아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남자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

“화가 나신 거 같아서요. 이 관계에서는 당신이 철저하게 제 주인이시라는 걸 보여 드리려고요.”

이게 또 무슨 말인가 싶어 에스티아가 황망하게 있는데, 그가 돌연 그녀의 발에서 신발을 벗겼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였다.

“전하!”

아.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발등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 그는 그녀의 반대쪽 발에도 진한 흔적을 남겼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대공작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한편, 에스티아는 그가 지금 발악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런다고 안 풀려요. 당신 용서할 생각도 없어요.”

분하게도 황홀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을 모욕하던 남자를 발아래 두었다는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동시에 슬픈 마음이 들었다. 설령 그렇다고 한들 이 순간은 잠깐뿐이며 결국에는 그를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알렌하고 밥도 먹을 거고, 결혼을 하게 된다면 당신 말고 다른 남자랑 할 거예요. 지금은 그저 당신이 ‘필요’한 것뿐이에요.”

“안 돼요, 에스티아.”

그녀의 발에 입 맞추고 있던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가 드레스 끝을 손가락에 얹고 천천히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그녀와 시선을 맞춰 왔다.

“싫어요, 에스티아. 싫습니다.”

“싫으면 어쩔 거예요. 당신은 날 못 놓고, 난 당신을 받아 줄 생각이 없는데. 싫으면 지금이라도 떠나가시던지요. 이벤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니까.”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알고 한 말이었다. 그의 손이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녀를 애타게 잡는 것처럼.

“당신을 놓을 생각도 없고, 당신이 날 놓지도 못하게 할 거예요.”

그가 드레스를 홱 젖혔다. 찬 공기가 에스티아의 다리를 덮었다.

“억지 부리시네요, 전하.”

에스티아가 일부러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기폭제처럼 그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알렌, 알렌, 이래 놓고.

에팅, 에팅이라고 불러 놓고.

그가 혀로 그녀의 안쪽을 핥았다. 간지러운 느낌에 에스티아가 다리를 모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다리를 완강하게 좌우로 벌렸다.

핵심에는 닿지 않은 처절한 발악이었음에도 에스티아는 숨이 가빠져 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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