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매달리다
억지일 뿐이다. 그가 지금 이러는 것은. 그럼에도 에스티아는 이 남자를 완전히 밀어낼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실컷 음미해.
얼마 가지 못할 테니.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 ‘에스티아’가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그가 드레스 안에 그녀를 감싸고 있던 마지막 천을 벗겼다. 허한 느낌에 온몸이 서늘해지는 듯했지만 속은 반대로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에스티아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그녀의 다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전하…….”
본능이 에스티아를 부추기고 있었지만 다행히 이성 한 자락은 남아 있었다. 에스티아가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하지만 건장한 몸이 그 작은 손에 밀려날 리가 없었다. 그가 더욱 몸을 깊숙이 숙였다. 그러자 절대 닿으리라 생각하지 못한 곳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부탁이에요.
에스티아가 몸을 떨었다. 지금 이 감각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만큼 생소하고 이상해서 에스티아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의 입술이 상체에 다른 곳에 닿았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욱 강렬한 느낌이 에스티아의 온몸을 꿰뚫었다.
“아…… 으…… 전하…….”
에스티아의 손가락이 에버하르트의 머리카락 속을 파고들었다. 에스티아는 직감적으로 이러다가 무슨 사달이 나겠다는 걸 눈치챘다.
빨리 끝내야 했다. 그래서 마지막 인내심을 발휘해 밀어내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욱 완강하게 굴었다.
이름을 불러 주세요.
순간 에버하르트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점점 길어지고 있는 이 움직임을 멈출 방법.
“하아…… 에버하르트…….”
에스티아는 점점 밀려오는 쾌감을 억누른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이에 에스티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했다.
“아흑!”
이름을 불러 주라며! 불러 줬더니 그는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방금보다 빠른 속도로 몰아쳐 왔다. 에스티아는 점점 정신을 지배하는 쾌락에 정신이 없었다.
의자가 계속 끼긱하며 뒤로 밀려났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곳이 밀착될수록 에스티아의 신음은 짙어졌다.
야릇한 소리는 절박한 움직임을 더욱 재촉시켰다.
곧 에스티아가 마지막 소리를 토해 내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에스티아…….”
그가 그녀의 머리를 뒤로 넘겨주며 그녀를 불렀다.
“괜찮습니까?”
그가 그녀의 손바닥에 쪽쪽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렇게 해놓고 괜찮냐니. 에스티아는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은…… 정말 지치지도 않나 봐요.”
에스티아는 방금 일을 얘기한 거였지만 그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어떻게 지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을 붙잡을 수 있다면 전 죽음도 무섭지 않습니다.”
“굉장히 상투적인 말이네요.”
에스티아가 차갑게 맞받아쳤다. 하지만 속은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기쁨과 불안함이 동시에 술렁이고 있었다.
“로맨스 소설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 않습니까? 저는 몇 번 읽어 본 적 없지만요.”
달콤하지만 씁쓸한 미소였다. 에스티아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지만 애써 그 마음을 참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닦을 걸 가져오겠습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된 김에 씻어야겠어요. 전…… 당신도 들어가서 쉬어요.”
‘전하’라고 부르려다가 에스티아가 호칭을 바꿨다. 괜히 또 버튼 눌릴까 봐 그런 건데 그는 그마저도 기쁜 듯했다.
“안아 드릴까요? 다리가 떨리실 텐데. 곧 근육통도 찾아올 거고…….”
화악. 이성이 돌아온 에스티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다행인 건, 다시 보니 그의 얼굴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에스티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며 그에게 두 팔을 뻗었다.
“네, 부탁드려요.”
그래 그렇다면 조금 더 이 남자를 장기말로 이용해도 되겠지. 오만한 생각인 걸 알지만 에스티아는 그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처를 보상받고 싶었다.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을 달래 주고 싶었다.
에버하르트가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마치 가벼운 짐을 들듯 가뿐한 몸짓이었다.
에스티아는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쿵쿵. 심장 소리가 또 다른 심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 *
그날의 행위 덕분에 에스티아는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선 아까 그와 나눴던 대화가 다시 펼쳐졌다.
“그나저나 로맨스 소설은 왜 읽은 거예요?”
“네?”
씻고 나온 에스티아의 머리를 털어 주던 에버하르트가 흠칫 놀랐다.
“아니,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보통 남자들도 안 읽는데 당신이 읽었다니 느낌이 좀 이상해서…….”
“아.”
그가 뻘쭘한 듯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에스티아가 마구 헤집은 탓에 깔끔하게 넘긴 머리가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마음 터놓는 친구나 지인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통 영식들이나 가주들이 일삼는 음담패설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방법이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여자의 마음을 잘 알 수 있는 방법이요.”
민망한 듯 그가 에스티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을 본 에스티아가 픽 웃었다.
“그래서 이것저것 읽다 보니 자연스레 습득한 거고요? 너무 능숙하길래 경험이 많나 보다 했죠.”
“그럴 리가요.”
그가 화들짝 놀라며 재빨리 그 말을 부정했다. 놀리려고 한 말이었는데 당황해서 눈치도 못 챈 거 같았다.
“당신 볼 시간도 빠듯했는걸요. 당신이 보고 싶기도 했고 그 빌어먹을 공작…….”
헙. 다다 얘기하던 에버하르트는 자신이 한 말에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머리를 털어 주던 걸 멈추고 슬금슬금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에스티아가 그를 올려다보며 괜찮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알아요. 못된 사람이죠.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은.”
에스티아의 눈빛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늘은 부디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 꿈은 꾸지 말고, 행복한 꿈만 꿔요, 에스티아. 이왕이면 내 꿈이면 더 좋고.”
그 말 덕분일까. 과거의 꿈이긴 했지만 에스티아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 꿈에는 어머니 조이와 멍청한 에버하르트가 나왔다. 조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눈빛이 마음이 아릴 정도로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에버.”
“예, 공작 부인.”
조이가 자신의 무릎에 누운 에스티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에스티아를 지켜 달라는, 부담스러운 부탁은 하지 않을게요. 그저 언젠가 에스티아가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해도 옆에서 지지해 줬으면 좋겠어요.”
“공작 부인.”
에버하르트가 미소를 지으며 조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에스티아는 제가 못 놓거든요.”
그의 눈이 자동으로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조이는 거기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발견했다.
“든든하네요. 난 언제나 티아와 에버를 응원할 거예요.”
내가 당신들을 수호해 줄 거예요.
단잠에 빠져 있는 어린 에스티아의 귓가에 어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다.
행복한 꿈이었다. 좋은 꿈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깨어났을 땐 에스티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 * *
스퀘일러는 평소의 차림대로 황궁을 방문했다. 그와 함께 온 에팅은 잔뜩 힘을 주고 왔는데 몸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래도 그 와중에 에스티아가 걱정되긴 했는지 연신 그녀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스퀘일러의 표정도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 분 표정이 왜 그래요. 오늘 좋은 날인데.”
오늘은 버지니아 약초를 재배하는 부서를 만들기 위해 황실에서 스퀘일러 상단에게 자문을 구하는 날이었다. 스퀘일러와 에팅은 황제를 알현하기 전 급하게 에스티아를 만나러 왔다.
“심하지 않아서 천만다행입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 늙은이의 심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젊은이의 심장도 같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에팅이 그 옆에서 울먹거리며 거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에팅에게 한소리를 했을 스퀘일러는 그저 에스티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가씨, 안 그래도 아가씨한테 꼭 전할 말이 있습니다.”
스퀘일러의 목소리가 사뭇 비장하여 에스티아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상단에, 오스카 후작이 찾아왔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