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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0화 (101/141)

100화 - 이름 불러 주세요

사실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원작의 그녀보다 훨씬 더 흑막 같은 그 후작이 그녀가 궁으로 들어간 뒤 가만히 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스퀘일러는 그런 에스티아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에스티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스퀘일러의 손을 잡았다. 왠지 스퀘일러와 에팅이라면 말해도 괜찮을 거 같았다.

“스퀘일러. 제가 보기엔 저한테 위험한 사람은 대공 전하보다 오스카 후작인 거 같아요.”

“예?”

스퀘일러 옆에 앉아 있던 에팅이 깜짝 놀라더니 눈을 깜빡였다.

“그저 귀족 신사 분처럼 보였는데 위험하신 분인가요?”

에팅이 미심쩍은 기색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에팅에게는 대공 쪽이 더 흑막으로 보인 듯했다. 그 마음이 왠지 이해가 가서 에스티아가 잠시 피식 웃었다.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생각보다 조심해야 하는 분인 건 맞아요. 그 사람이 뭐라던가요?”

머릿속에 저절로 서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미소를 짓고 있음에도 가면을 보는 거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가 속을 드러낼 때는 에버하르트에게 미련이 남은 것처럼 말을 할 때뿐이었다. 에스티아는 그 속에서 지독한 집착을 보았다.

“별말씀은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가씨의 소식을 들었는데 괜찮은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어디에 계시는지 아느냐고도 물어봤고요.”

스퀘일러도 좋은 인상을 받진 못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저희도 현재 더 들은 소식이 없다고 하니 알겠다고 하고 가시더라고요. 그게 다였습니다.”

“그렇군요…….”

굳이 상단까지 찾아와서 겨우 몇 가지만 묻고 갔다라. 보나 마나 뻔했다.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되어서 찾아온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 자신이 맴돌고 있다는 걸 티 내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오스카 후작을 생각할수록 기분이 안 좋아졌다.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그 오만한 태도도, 누군가의 마음을 함부로 조종하려는 수작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에서 찾아뵈면 바로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괜찮은 건가요, 아가씨?”

“아마 상단주님이 정확하게 보신 걸 거예요. 상단주님과 에팅도 부디 조심하세요.”

에스티아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스퀘일러가 에스티아의 손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가씨가 그렇게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겠죠. 저희는 걱정하지 마시고, 아가씨 건강만 챙기세요.”

“혹시…… 글레멘드 공작이 찾아왔나요?”

“…….”

에스티아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남자 얘기는 가급적이면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꼭 물어봐야 할 거 같았다.

“아가씨.”

스퀘일러가 에스티아의 손등을 톡톡 쳤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달래듯 다정한 손길이었다.

“그분께서 저희를 어떻게 하시진 못할 겁니다. 무려 폐하께서 지켜 주고 계신 상단이 아닙니까. 다 아가씨 덕분이지요.”

“그게…….”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게 어떻게 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미안해요, 스퀘일러. 공작이 상단에 끼친 해는…….”

“아이구, 아가씨.”

스퀘일러가 상냥한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다독였다.

“90년을 살아왔습니다. 그 정도 일은 아무렇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아가씨를 숨겨 놓았냐는 협박 아닌 협박만 살짝 당했을 뿐이지요. 그깟 속물은 저한테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는 아버지라는 이유로 좋게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걸 그가 이제 알아차린 듯했다. 에스티아가 충혈된 눈을 겨우 들어 보였다.

“고마워요, 스퀘일러. 이제 폐하를 뵈러 가시지요?”

“예, 아가씨 덕분에 살아생전 황제 폐하를 다 만나 보네요.”

스퀘일러가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에스티아의 표정도 사르르 풀어졌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막상 심하게 걱정하고 나면 걱정했던 만큼 큰일이 아닌 경우가 많답니다.”

“맞아요, 아가씨. 상단주님이 말씀하시면 다 그렇게 되더라고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에팅도 다정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에스티아는 불안하던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걸 느꼈다. 이들과 함께한 지는 불과 몇 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왠지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했다. 에스티아가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껴안았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던 스퀘일러와 에팅도 에스티아를 마주 안았다.

“리본느산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스퀘일러가 포옹을 풀며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폴이 동행할 겁니다. 눈치가 있는 자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스티아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으로 에팅의 얼굴이 벌게진 게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에스티아의 머릿속에는 빨리 그 빌어먹을 후작을 캐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 * *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 먹은 에스티아는 남자 의복으로 갈아입었다. 검은색 바지에 하얀 리넨 와이셔츠를 걸친 차림새였다. 묶은 머리 위로는 빵 모자를 썼다.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비춰 보니 영락없는 소년 차림새였다.

드레스 차림보다 훨씬 편했다. 전생 때는 이것보다 더 대충 입고 다녔던지라 이 정도 행색도 꽤 깔끔해 보였다. 에스티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거울로 바싹 얼굴을 들이밀었다. 창백하던 얼굴은 열이 내리면서 혈색이 돌고 있었다.

똑똑.

슬슬 나가려고 하던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예상한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답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전과 다르게 조심스러운 발소리.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이 시간에 그녀를 찾아올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그가 적정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에스티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네, 전하는요?”

“저도 먹었습니다. 설레서 잘 넘어가진 않았지만요.”

그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쓸었다. 그 모습이 사뭇 낯설어서 에스티아는 괜히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그의 차림새를 보기엔 충분했다. 마치 사전에 맞춘 것처럼 그도 검은색 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그 위에 같은 색의 겉옷을 걸쳤다. 거의 비슷한 옷임에도 느낌이 다른 게 새삼 키가 참 크다 싶었다.

“팔은 괜찮으십니까? 열이 나진 않으시고요? 기분은 괜찮으십니까?”

언제 수줍었냐는 듯이 그는 그녀를 마주 보자마자 질문을 퍼부었다. 에스티아는 정신이 없었지만 차근차근 대답했다.

“네, 덕분에요. 아침에 스퀘일러와 에팅을 만났어요. 확실히 좋아하는 사람들 만나니까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아, 스퀘일러와 ‘에티안’이요.”

다정하게 웃던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한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스티아가 곧 그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에팅의 이름이 에티안이라는 건 언제 아셨어요?”

“……그냥 알았습니다.”

에버하르트가 꿍얼거리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어린애 같아 에스티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겨우 이 정도로 티가 많이 나시네요. 자기는 아주 우리 메르헨, 우리 메르헨 노래를 불렀으면서.”

“그건!”

에버하르트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다 연기였습니다. 그래도 당신한테 상처 줘서 미안해요. 저한테 이름을 부르고 싶은 사람은 오직 당신뿐입니다.”

그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래요? 전 이름 부르기 싫은 유일한 사람이 당신인데요.”

나긋하게 뱉은 그녀의 음성이 에버하르트의 마음을 깊숙이 찔렀다.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가끔씩이라도 불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가 손끝에서 조금씩 손을 움직여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그럼 몇 번이고 무릎 꿇고…….”

“알았어요!”

민망할 말이 나올 거 같자 에스티아가 펄쩍 뛰며 말을 막았다.

“이름 불러 주세요.”

그가 다시 은근하게 요청해 왔다. 도대체 이런 끼는 어떻게 숨겼는지 모르겠다.

에스티아는 이 남자의 뻔뻔함에 매번 동요하는 것이 속에 있는 ‘에스티아’의 흔적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정말 피곤해서인지 궁금했다.

정말 자신이 진짜 에스티아와 동화되고 있는 건지 알기 위해서라도 이 남자가 현재 꼭 필요할 거 같았다.

* * *

손톱 끝은 거의 너덜너덜해졌다. 아직 덜 뜯긴 영혼이었건만 벌써 망가져 가는 게 눈에 보였다. 빅터는 창밖을 바라보며 손톱을 뜯는 메르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이 어찌 저리 다를 수 있을까. 에스티아가 벼랑 끝까지 내몰렸을 때도, 손과 발이 묶인 채 절벽 아래로 떨어질 때조차 그녀의 영혼은 ‘저것’처럼 망가지지 않았다. 아무리 깨졌을지언정 투명하고 맑은 영혼은 변하지 않았다.

“황궁으로 가야 해요.”

“간다 해도 에스티아를 볼 순 없을 겁니다.”

“그럼 어떡해요? 지금쯤 에버와 에스티아가 같이 있을 텐데! 두 사람이 거기서 뭘 할 줄 알고요?”

핏줄이 튀어나올 듯이 메르헨이 부릅 눈을 떴다. 광인의 눈동자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메르헨.”

이미 두 사람은 죽어 가고 있을 거라니까요.

빅터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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