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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1화 (102/141)

101화 - 얽혀 들다

이번 산행에는 오스카가 의뢰한 꽃뿐만 아니라 버지니아 약초도 찾는다는 명목이 추가되었다. 스퀘일러에게 오스카 후작이 어떤 꼼수를 부리고 있는지 다 털어놓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폴은 먼저 이안과 함께 리본느산으로 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티아와 에버하르트는 말 옆구리에 간략하게 짐 꾸러미를 달고 황궁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어깨는 괜찮아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말을 출발시키기 전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말 모는 건 당신이 하잖아요.”

“지금이라도 마차를…….”

부드럽게 달랬음에도 등 뒤에서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에스티아가 살짝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어서 은밀하게 다녀와야 한다고 했잖아요. 답지 않게 조마조마해하지 마세요.”

“당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마음이 진정이 안 돼요. 그런 거 보면 어렸을 때도 당신이 나보다 훨씬 어른스러웠죠.”

나지막한 음성이 에스티아 귓가에 가까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무척 다정해서 에스티아는 잠시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만 아니라면, 어긋나 버린 관계만 아니라면 과거의 에스티아는 어땠는지 더 듣고 싶었다.

“지금도 제가 더 성숙한 거 같네요.”

그래서 에스티아는 더 냉정하게 대처하기로 결심했다. 그를 이용하기로 했지, 받아 주기로 한 게 아니었으니까.

나름 차갑게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벌써 내성이 들었는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언제나 그랬죠. 보통은 아이가 어른을 더 필요로 하니까요.”

그 반대도 있다고 말하는 거 같아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기분을 기민하게 눈치채고 입을 닫았다. 언제 다시 부서질지 모르는, 슬프고도 위태로운 부위기 속에서 그가 말고삐를 꽉 잡았다.

그저 만족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그의 품 안에 작은 온기가 있었으니 이 삶을 버틸 수 있을 거 같았다.

홀로 외로이 피어 있던 꽃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 * *

처음 탔을 때와는 달리 말을 타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몸이 긴장감으로 바짝 굳는 게 느껴졌다. 며칠 전에 낙마해서 몸이 본능적으로 예민해진 듯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상태를 눈치채고 무척 조심스럽게 말을 몰았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놀란 기색을 보이면 바로 말의 속도를 늦추고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창백해지진 않았는지 열이 나진 않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조금이라도 그녀가 안 좋아 보이면 가끔씩 말을 멈춰 근처에서 쉬고 가기도 했다.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최대한 조심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에스티아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저 나무 밑이라면 괜찮을 거 같습니다.”

폭우까진 아니었지만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이끌고 큰 느티나무 아래로 향했다. 그는 에스티아에게 물이 담긴 물통을 쥐여 주고 나뭇가지에 말고삐를 묶었다.

“폴과 이안이 기다릴 텐데 괜찮을까요?”

벌써 세 번째 쉬는 거였기 때문에 그들이 많이 기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당신이 이렇게 다쳤는데 조금 늦는다고 벼르고 있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한 명은 당신의 추종자인 데다가, 다른 한 명은 당신을 ‘지극히’ 아끼는 호위 기사이지 않습니까.”

에버하르트가 특정 단어에 강세를 두며 말했다. 에스티아가 물통을 쥔 채로 쭈그려 앉으며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저한테요? 저에 대해서요?”

그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에스티아가 그 눈빛을 외면하며 반쯤 열려 있는 물 뚜껑을 열었다.

“이안하고는 언제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거예요? 우리 사이가 나빠지기 전부터 서로 그렇게 으르렁거린 거예요?”

밝았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지는 게 보였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씁쓸하지만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서.

“고해성사를 하자면 엄밀히 말해 저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가 툭하면 시비를 걸었거든요.”

에스티아가 ‘왠지 그럴 거 같았다’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에버하르트가 멋쩍다는 듯 시선을 피하며 에스티아가 들고 있는 물통의 뚜껑을 닫아 주었다. 찰나 스친 온기에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때는 하면서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당신을 좋아해서 그랬던 거였더라고요. 열네 살 때였으니 알 법도 한데, 그런 부분에서는 저도 참 바보 같았죠.”

“그니까 지금 이안을 질투했다고 말씀하시는 거네요. 전에 들려주셨던 것처럼.”

에스티아가 두 무릎 위에 양팔을 올린 채 물었다.

“그렇죠. 제가 생각해도 유치했습니다. 틈만 나면 대련하자 그러고, 말꼬투리 잡고, 가끔 발도 걸고. 항상 당신 옆에 있고, 나보다 더 당신을 오래 봐 왔다는 게 화가 났습니다. 게다가 한때 황실 기사단장이었던 칼라일 백작이 그를 양자로 들이고 싶어 했죠.”

그의 눈동자가 소나기 너머 과거를 헤매고 있었다.

“허점투성이인 저에 비해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거 같았어요. 사람들하고도 두루두루 친해서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남작을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저는 숫기도 없고 낯을 많이 가렸죠. 주변 어른들이 어린애가 속을 알 수 없다고 혀를 찼을 정도니까요.”

마지막 말에 에스티아의 마음이 따끔거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날카로운 칼날 같다는 걸 에스티아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남작과 함께 웃고 있을 때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던 거 같습니다. 나하고 함께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웃는 거 아닐까, 더 행복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치기 어린 마음이었어요. 남작은 정말 피해자입니다.”

정말 신부 앞에서 고백하는 죄인처럼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제가 속이 넓은 사람은 아닌지 계속 질투가 나서……. 남작이 절 싫어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아마 지금도 당신이 저와 함께 오는 걸 적잖이 못마땅해 하고 있을 겁니다.”

그건 맞지. 에스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은 사람이에요. 만약 당신 곁에 남작마저 없었다면 저는 대외적인 시선이고 나발이고 당신을 제 저택으로 끌고 와서 가둬 놨을 겁니다.”

“네?”

이건 또 뭔소리야.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에버하르트의 짙은 눈빛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당신 옆에 메리와 카린이라는 좋은 하…… 아니, 친구가 있지만 검과 총에 능통한 남작이 있었기에 당신이 그 사람한테서 그나마 안전할 수 있었죠. 그가 아니었다면 글레멘드 공작이 당신을 진작 망쳐 놨을 겁니다.”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에스티아의 얼굴이 ‘글레멘드’라는 이름이 나오자 싸늘해졌다. 에버하르트가 그런 그녀의 뺨에 조심스레 손을 갖다 댔다.

“그런 면에서 남작이 보는 눈이 있었죠. 겨우 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4살 영애를 주군으로 삼기로 결정했으니. 남작은 총명하니 위선만 가득한 공작보다 당신을 따르고 싶었던 겁니다.”

“…….”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듯이.”

에스티아는 시선을 홱 돌렸다. 따스한 말을 들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지극히 외로웠던 전생 때, 이런 말을 들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다행이네요. 저는 제가 외롭게 산 줄만 알았어요. 온 세상이 절 싫어하길래.”

에스티아는 그가 상처받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죄책감 어린 표정을 짓더니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던 에스티아가 움직임을 멈췄다. 서늘한 날씨에 그의 품이 따뜻하기도 했지만 거부하면 괜히 또 쓸데없는 감정 실랑이를 하게 될 거 같아 가만히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변명인 걸까.’

에스티아가 그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언제나 듣기 좋은 소리였다. 그전에는 누군가와 이렇게 안고, 누군가의 심장 소리를 들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옅은 녹색 눈동자가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폭풍이 깃들어 있던 눈동자에는 이제는 소나기를 기다리는 꽃봉오리만 있을 뿐이었다.

에스티아는 문득 제대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진짜 에스티아’의 속삭임이나 어떤 감정적 동요 없이 먼저 자신이 그에게 다가갔을 때, 조금이라도 이 속에 불쾌함이나 거부감이 일어나지 않는지.

‘에스티아’와 동화되고 있는 것이 단순히 그녀의 몸에 들어왔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바보처럼 이 남자에게 흔들렸기 때문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의 겉옷 칼라를 살짝 잡아당겼다. 작은 입술이 붉은 입술 위에 살포시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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