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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2화 (103/141)

102화 - 징조

이번에도 상황을 종료시킨 건 에스티아였다. 이대로 가다간 탁 트인 벌판에서 홀딱 벗을 판이었다.

에스티아의 입술 위로 열띤 숨이 와 닿았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달래기 위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는 반대로 그 손짓은 애꿎은 마음에 더 불을 지피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심장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저히 심장이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마치 무언가를 털어 낸 것처럼 개운한 표정이었는데 그는 반대로 속에 무언가가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초조하기도 했다. 입술을 맞대고 몸을 맞댈수록 에스티아가 더 멀어지는 거 같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마음과는 반대로 몸을 일으켰다. 속에 있는 본능은 멈추지 말라고 하고 있었지만 순순히 그에 따를 순 없었다.

에버하르트가 여전히 뜨거운 숨을 뱉은 상태로 에스티아를 조심스레 일으켰다.

에스티아의 눈빛에는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아마 그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듯했다.

‘그랬으면 어떡하려고…….’

물론 억지로 밀어붙일 일은 없었지만 에버하르트는 새삼 아찔함을 느꼈다. 시험의 커트라인이 너무 높은 거 같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매번 기다리게 되고 갈망하게 되는 시험이었다.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을 거 같았다.

“이제 갈까요?”

“네.”

에스티아가 대답하자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상체를 뒤에서 바친 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그에 의지해서 일어나던 에스티아는 그가 떨어지자 순간 짙은 현기증을 느꼈다.

‘어……?’

기분이 이상했다. 정신이 흐려지면서 에스티아의 몸이 기우뚱 기울었다. 중심을 잡고 싶었지만 하필 오른쪽 팔을 다쳐서 몸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어지러워.’

결국 에스티아의 몸이 앞으로 쏠리는 걸 에버하르트가 민첩하게 받아 냈다.

“에스티아!”

에스티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심장이 아래로 쿵 떨어졌다.

또다. 황궁 복도에서 이랬던 게 불과 며칠 전이다. 역시 나오게 하는 게 아니었다. 에버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궁으로 가요, 당장.”

만약 진짜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그는 정말 미칠 거 같았다. 지난번에 에스티아가 말에 떨어졌을 때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뭐, 이런 걸 갖고 그래요.”

에스티아가 얇은 팔로 그를 밀어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시간 낭비였다.

“이런 거 갖고?”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에스티아는 그 눈빛에 움찔했다. 아무래도 또 예전 말투가 나올 기세였다. 에스티아가 해명하듯 그의 팔을 툭툭 쳤다.

“그냥 현기증이에요. 저혈압인가 보죠.”

“…….”

나름 짧은 시간 안에 생각해 낸 변명이었는데 역시 통하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하는 수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법을 택했다.

“하루 만에 나을 상태가 아니에요. 질질 끌 바에는 빨리 끝내고 가고 싶어서 그래요. 도와주세요.”

최근 들어 그에게 다정하게 말한 적이 없었다. 에스티아는 한껏 애처로워 보이는 듯한 눈빛을 하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면서도 자괴감이 들었지만 궁으로 끌려가지 않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 듯했다.

에스티아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의 입장에서도 그녀를 억지로 끌고 가기보다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푹 쉬게 하는 게 그녀한테도 좋고 그한테도 좋을 거 같았다.

“하…… 다만 오늘 내로 한 번 더 이러면 둘러업고 갈 겁니다. 아마 이안도 거들겠죠?”

에버하르트가 싱긋 웃었다. 에스티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화나기 직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알았어요.”

애써 떨리는 속내를 감추고 답했지만 에스티아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거부감이나 불쾌함은 들지 않았다. 둘 중 하나였다. 이미 ‘에스티아’와 깊이 동화가 되었거나 자신마저 그에게 흔들리고 있거나.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랐다. 그 뒤로 에버하르트가 가뿐하게 말 위로 올라탔다. 그녀의 등 뒤로 그가 몸을 바싹 붙어 왔다. 아무래도 키스 직후인지라 아까보다 더 긴장되었다.

에스티아는 애써 그 긴장감을 마음속에서 몰아냈다. 오늘 꼭 그 꽃을 찾고 싶었다. 자신을 옥죄어 오는 검은 손이 많다는 걸 안 이상 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날카로운 눈으로 앞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에버하르트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 * *

이안은 에스티아가 지나올 길만 바라보며 그녀를 오매불방 기다렸다. 그 흑심을 품은 오만한 대공이 아가씨한테 음산한 짓을 할까 봐 걱정되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멀리서 말 한 필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안은 허겁지겁 앞을 향해 달려갔다.

에버하르트가 적당한 곳에서 말을 멈추고 먼저 말에서 내렸다. 그가 에스티아를 내려 주려고 손 뻗는 걸 옆으로 쳐내고 이안이 에스티아를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홱 하고 에버하르트를 노려보았다. 눈빛이 마치 ‘어딜!’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

에버하르트가 누구 들으라는 듯이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

예상대로 난감한 상황이 찾아왔다. 에스티아는 둘 사이에 선 채로 왼쪽 손을 열심히 허공에 휘저었다. 두 남자는 그제야 서로를 향한 눈빛을 거뒀다.

에스티아가 먼저 산 초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로 에버하르트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다시 시비를 거나 싶어 이안이 그를 바라보자 에버하르트가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말했다.

에스티아가 아파요.

이안이 걸음을 뚝 멈췄다. 그의 눈빛이 그런데도 에스티아를 여기로 데리고 왔냐고 매섭게 묻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그 눈빛을 무시한 채 에스티아를 쫓아갔다. 하지만 내심 그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후회가 가득 차고 있었다.

“에스티아.”

초조한 음성에 에스티아가 고개를 틀었다.

“차라리 저한테 맡기고 남작하고 밑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에스티아의 안색은 아까보다 훨씬 나아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에버하르트는 불안했다.

“안 돼요. 그 꽃은 제가 찾아야 해요. 오스카 후작이 저한테만 특별히 요구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무엇보다…… 그 꽃은 저 아니면 찾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말하며 열심히 비탈길을 올랐다. 혹시라도 넘어지기라도 할까 에버하르트는 조마조마했다.

“손 잡을까요?”

“네?”

생뚱맞은 소리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가 잡아 드리겠습니다. 안 그래도 크게 다치셨는데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음. 에스티아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의 모습을 보면 손을 잡아 주겠다는 사람이 아니라 손을 잡아 달라는 어린애 같았다.

“자, 잡아 주세요.”

시간을 지체하기 싫은 에스티아가 그의 오른편에 서서 왼손을 뻗었다. 에버하르트가 바로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 왔다. 큰 손이 자그마한 손을 넉넉하게 덮었다.

“저게 뭔…….”

그걸 뒤에서 본 이안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버하르트는 그걸 무시한 채 에스티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당겼다.

“돌이 많습니다. 조심하세요.”

에스티아가 보기엔 아파 보여도 그가 더 아파 보였다. 에스티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피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걸어 왔다.

“그나저나 오스카 후작은 이 산에 핑크스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걸 하필 당신한테 의뢰한 것도 불안합니다. 평범한 꽃이 아니라면 더더욱 마법사가 아닌 당신한테 부탁할 일이 아니에요.”

꽤 마음이 불안한 모양인지 에버하르트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역시 안색이 안 좋아 보인 게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제가 먼저 거래를 제안했으니까요. 다만 제가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내야죠.”

에스티아가 점점 걸음이 느려지고 있는 그의 손을 살짝 당겼다.

“자꾸 징징거리면 버려두고 갈 거예요.”

끄응. 에버하르트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에스티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 말이 사실인가 봐요. 제가 더 어른스러웠다는 게.”

“……이상하게 당신 앞에서는 아이 같아졌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가 민망한 듯 괜히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던 에스티아가 자신의 손을 잡은 커다란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이는 솔직하죠. 당신이 오스카 후작의 말을 듣고 솔직하게 얘기했다면 우리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다급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에스티아를 잡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설령 당신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남았다고 해도 제가 당신 마음을 어떻게 완전히 믿겠어요. 이렇게 말하니까 되게 비련의 주인공 같네요.”

에스티아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글레멘드 공작 저택에서 그한테 도움을 받은 이후 잠시 그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만약 진실이 원작과는 다르다면 이 사람과도 다른 결말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 낙관적인 생각에 기댈 수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원작에서 이 남자는 그녀를 죽였었다. 연기라고 해도 매섭게 내뱉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었다. 메르헨에게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랬다고 해도, 그렇게 연기하기 전에 솔직하게 진실을 털어놓고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었다.

“사실 지금도 불안해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이 연기일 수도 있잖아요.”

에스티아는 예민해진 상태였다. 솔직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동안 비수를 꽂아 온 남자를 쉽게 믿기는 어려웠다. ‘진짜 에스티아’의 마음이 잔뜩 미련을 드러내도 잘라 내고 싶은 이유였다.

에스티아의 왼손이 허전해졌다. 에스티아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틀었다.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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