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 진통제
아무렇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금방 끝날 관계라는 걸 알았기에 그 순간이 예상보다 좀 빨리 왔나 싶었을 뿐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이미 상처를 많이 주고받은 관계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지금 끝이 난다면 그것대로 꽤 평화로운 결말일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가정은 다 해놓았던 거 같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한 방어 기제였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그녀가 생각한 경우의 수에 들어 있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입을 떡 벌린 채 에버하르트에게로 다가갔다.
“지, 지금 우는 거예요?”
“…….”
에스티아가 눈치를 보며 에버하르트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이안과 폴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스티아가 이안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주고는 나무 뒤쪽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는 정말 아이라도 되는 것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아까까지 그녀를 풀밭에 뉘인 채 실컷 탐하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애 같은 모습이었다.
옅은 녹색 눈에서 눈물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에스티아가 당황한 채로 소매를 당겨 눈물을 닦아 주었다.
“진짜 전에도 이런 말 했던 거 같지만 진짜 어이없는 거 알아요? 자기는 아주 별의별 말을 다 했으면서.”
“그게 아니라…….”
에버하르트가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으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계속 당신을 힘들게 했나 싶어서요. 당신 말대로 솔직하게 말했으면 당신한테 신뢰를 줄 수 있었겠죠. 그랬다면 당신도 마음이 편했을 거고.”
“…….”
“믿지 않아도 돼요, 에스티아. 계속 날 경계해도 좋아요. 당신을 믿게 하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니까 당신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요. 내가 뒤를 지켜 줄 테니까.”
그가 에스티아의 새끼손가락을 살포시 붙잡았다. 아무래도 지독한 습관 같았다. 불안할 때마다 그녀의 손가락을 잡는 것.
“어차피 당신을 버릴 만큼 전 여유가 없어요.”
에스티아가 떨리는 눈을 한 에버하르트에게 솔직하게 고백했다.
“게다가…… 당신을 버리는 것보다 곁에 두는 게 내 안위에도, 내 마음에도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에버하르트의 떨림이 좀 잦아들었다. ‘지금은’ 버리지 않겠다는 말이었지만, 그마저도 그에게 진통제 같았다.
“좀 진정이 돼요?”
“네, 고마워요.”
그가 여전히 촉촉한 눈을 깜빡였다. 그게 꼭 마음속 무언가를 간지럽게 자극해서 에스티아는 잠시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그녀 앞에서 청초하게 운 적이 있었을까. 그럴 때마다 ‘에스티아’는 뭐라고 했을까.
그렇지만 그게 기억이 날 리가 만무했다. 에스티아는 다정한 말을 건네는 대신 다시 왼손을 내밀었다.
“부축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가 눈을 깜빡이는 걸 멈추더니 바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환청이 들렸다. 그가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를 버릴 준비를 하라고.
에스티아의 마음이 다시 술렁였지만 그 환청에 동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에버하르트와 가까이 있을수록 ‘에스티아’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걸.
* * *
시간이 갈수록 폴과 이안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맴돌았다. 비에서 살아남은 버지니아 약초를 몇 개 구했지만 에스티아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스티아는 아직 시간 여유가 있다는 핑계를 대며 더 돌아다녔다.
에버하르트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그녀 옆에 바싹 붙은 채로 에스티아를 쫓아다녔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불안하지 않았다. 왠지 오늘 그 꽃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에스티아.
에스티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펄 브릴리안트 때 들었던 목소리였다. 꽃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자극했다.
‘역시.’
에스티아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스티아, 보고 싶었어, 에스티아.
다정한 목소리. 하지만 기묘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 보았던 거 같은데 어디서 들어 봤더라?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손을 놓고 뛰기 시작했다.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저 멀리서 분홍빛 빛이 에스티아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프러포즈는 없어. 영원히 할 일 없을 거야.
에스티아가 꽃 앞에 멈춰 섰다. 아름다운 꽃잎이 방향을 가리지 않고 뻗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여자한테 어떻게 청혼을 할 수 있겠어.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난…….
에스티아는 천천히 꽃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잠시 미쳤었나 봐.
슬프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는 그 목소리가 자신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였구나, 진짜였어.
그리고 이 목소리는…….
-네가 끔찍해.
“에스티아!”
-네가 끔찍해, 에스티아.
에스티아가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꽃은 기다렸다는 듯이 에스티아의 손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조심스럽게 꽃을 들어 올렸다. 꽃은 스스로 뿌리를 말며 에스티아의 손으로 파고들었다. 아름다운 꽃임에도 이질적인 느낌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에스티아, 괜찮아요?”
-평생 널 돌아볼 일 없을 거야. 어디 한번 죽을 때까지 내 곁을 맴돌아 봐봐.
어지러웠다. 누구의 말에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더 선명한 목소리에 대답해야 하는 건 알았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이 미어졌다. 처참하게 찢긴 마음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 나는 정말 그러려던 게…….
에스티아가 목을 부여잡았다. 이상하게 숨이 찼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헉헉…….”
숨이 턱 막혔다. 에스티아는 앞으로 몸을 숙였다. 그 와중에도 꽃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에스티아! 제발, 또 왜 그러는 거예요!”
에버하르트가 경악하며 에스티아 옆으로 한쪽 무릎 꿇고 앉았다. 그런 다음 에스티아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무서웠다. 공포가 에스티아의 마음을 덮쳤다. 에스티아가 동아줄을 붙잡듯 에버하르트의 팔을 꼭 잡았다.
“에버…… 에버하르트…….”
“네, 네. 저 여기 있어요.”
에스티아가 따뜻한 온기에 기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행히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꽃…… 꽃 찾았어요.”
“지금 꽃이 문제입니까?”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꽉 껴안았다. 마치 읽을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내가 말했죠? 한 번 더 이러면 당장 데려가겠다고.”
마음 같아서는 꽃도 내려놓으라고 하고 싶었지만 뺏으려고 하면 에스티아가 다시 상태가 안 좋아졌다.
젠장, 젠장. 아무래도 그 빌어먹을 후작이 무슨 꼼수를 쓴 게 분명했다. 더 끔찍한 건 어쩌면 이런 상황을 에스티아가 예상을 하고 왔을 거라는 거였다. 거기에 자신은 멍청하게 따라오기만 했고.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품에 안은 채 일어섰다. 에스티아는 꽃을 손에 꼭 쥔 채로 그의 품에 폭 안겼다.
작은 몸이 힘없이 들릴 때, 에버하르트는 속으로 다짐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면 바로 그 후작을 아작을 내놓겠다고.
또다시 그 후작한테 그녀를 뺏길 수는 없으니까.
* * *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도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가 자신을 한시도 떼어놓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억 속에서 매정한 목소리를 들어서 그런가 에스티아는 이 온기를 놓칠까 봐 두려워졌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계속 에버하르트의 옷자락을 꽉 잡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궁으로 오는 내내 그 손을 단 한 번도 떼지 않았다.
어떻게 왔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저 지금은 침대에 있고 자신이 여전히 넓은 품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때때로 꽃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괜찮다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고. 지금은 다 한 때라고.
익숙한 음성이었는데 도저히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가 더 희미해져서 에스티아는 더욱더 눈앞에 있는 온기에 집착했다. 그럼 온기의 주인은 그녀를 토닥이며 꼬옥 안아 주었다.
-오늘도 악몽을 꿨지, 티아.
미성의 소년이 자상하게 그녀를 달랬다.
-공작 부인께서 오늘 저택을 비우셔서 나보고 있어 달라고 했어. 오늘은 또 무슨 꿈을 꿨어.
“꿈…….”
에스티아가 온기를 움켜쥔 채 웅얼거렸다.
“네가 떠나는 꿈을 꿨어…….”
에스티아의 눈에서 눈물이 똑똑 흘러내렸다. 그러자 온기가 다가와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에스티아는 넓은 손바닥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그럴 리 없다고 했잖아. 내가 널 떠날 리는 없다고.
응? 그랬었나? 에스티아가 기억을 더듬어 보였다.
-내가 당신이 버릴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도.
잠깐.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이 생생한 온기가 꿈이 아니라면?
에스티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위로 주황색 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눈앞만큼은 깜깜했다.
“일어났어요?”
위에서 익숙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제야 에스티아는 눈앞이 어두운 이유가 누군가의 가슴팍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에버하르트?”
“……불안해 미치겠는데 와중에 이름 불러 주니까 행복하네요. 당신 말대로 난 아직 철부지 애인가 봐요.”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