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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4화 (105/141)

104화 - 죽을 때까지

오늘 일은 에버하르트와 이안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이가 안 좋던 두 사람이 오늘만큼을 힘을 합쳐 에스티아를 침대에 가둬 놓았다.

레이븐과 잘 만나고 온 스퀘일러와 에팅까지 에스티아의 침실로 찾아왔다. 한 번 더 아프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을 정도로 네 사람은 유난을 떨어댔다.

스퀘일러와 에팅은 몇 번이나 에스티아에게 괜찮냐고 묻고 난 후에야 상단으로 돌아갔다. 사실 에스티아로서는 각오했던 일이라 괜찮았지만 두 남자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 듯했다.

“열은 내렸죠?”

“네, 내린 거 같습니다.”

“‘같습니다’가 뭡니까. ‘내렸다’도 아니고.”

“언제 다시 오를지 모르니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제가 의원입니까?”

다시 사이가 좋아지는 듯싶었던 두 사람은 다시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대개 에버하르트가 이안을 갈구면 이안이 날카롭게 맞받아치는 형식이었다. 에스티아가 한숨을 내쉬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가 언제 이안에게 신경질을 냈냐는 듯 눈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죄송합니다. 어서 식사하세요. 아무리 입맛이 없으셔도 드셔야죠.”

에스티아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있다가 8시쯤에 겨우 눈을 떴다. 입맛이 없다 얘기했지만 에버하르트는 간단하게라도 드시는 게 좋다며 수프랑 부드러운 빵, 허브티를 가져왔다. 그것도 본인이 직접 은쟁반을 든 채 가져왔다.

“드시기 힘들면 제가 먹여 드릴까요?”

“뭘 먹여 드립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내가 남작의 친구입니까?”

또 시작이었다. 에스티아가 매섭게 두 사람을 노려보자 다시 두 입이 헙 하고 다물렸다.

“계속 싸울 거면 둘 다 나가요.”

“죄송합니다.”

두 남자는 동시에 같은 말을 내뱉었다. 에스티아가 다시 어색하게 왼손으로 수저를 들었다.

겨우 다시 입에 넣은 수프는 따뜻했다. 짜지도 않고 싱겁지도 않은 게 딱 입에 맞았다.

“빵은 드시기 편하게 잘라서 달라고 했습니다. 더 잘게 해 달라고 할까요?”

에버하르트가 침대 옆에 딱 몸을 붙인 채로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그걸 이안이 경계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웃겨 에스티아는 피식 웃었다.

“기분이 나아지신 거 같아 다행입니다.”

에버하르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왠지 저 미소만큼은 진심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스티아가 빵 한 조각을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빵은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맛있네요.”

“수프에 찍어서 드셔 보세요. 더 맛있을 겁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가 먹기 편하게 은쟁반 밑을 살짝 받쳐 주었다. 이안의 미간이 못마땅하다는 듯 찌푸려졌다.

에스티아가 그의 말대로 빵에 수프를 살짝 찍어 먹었다. 짭조름한 수프와 부드러운 빵의 질감이 섞여 무척 맛있었다. 에스티아는 빵을 삼킨 다음 허브티를 들이켰다.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당신 말대로 먹길 잘했네요. 기분이 한결 나아졌어요.”

“그렇죠? 입맛이 없더라도 뭔가를 먹으면 더 기운이 나니까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또 말씀해 주세요.”

에버하르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꼬리가 흔들리고 있는 거 같았다.

“……전하께서는 계속 여기에 계실 겁니까?”

이안이 팔짱을 낀 채 에버하르트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에버하르트가 이안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에스티아가 허락한다면요, 계속.”

‘계속’이라는 말이 마음을 간질였다. 이렇게 쉽게 흔들리나 싶어 어이가 없다가도 그런 말을 듣는 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으득. 에스티아의 귀에 이안이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이 상황에 익숙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투덕투덕하지만 평화로운 분위기가 오늘따라 유달리 크게 와 닿았다.

에스티아의 귓가에는 아직도 날카로운 총성이 선명하게 들렸다. 세월이 흘러도 누군가가,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가 딸이 탄 말에 총을 쏘게 했다는 걸 잊지 못할 거 같았다. 말에서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서조차 지극한 두려움이 들었다는 걸 에스티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그 기억을 한구석에 몰아넣고 식사를 마저 끝냈다. 이럴 때일수록 속을 든든하게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다 드셨네요. 차를 한 잔 더 드릴까요?”

에버하르트가 민첩한 동작으로 트레이 위에 있는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무려 대공작이라는 사람이 시중드는 게 무척 익숙해 보여서 신기했다.

“네, 주세요. 오늘은 커피보다 차가 더 끌리네요.”

“아플 때는 커피 마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오늘은 특히 다른 날보다 적게 드시니까요.”

그가 신중한 동작으로 천천히 찻잔에 차를 따랐다. 혹시라도 그녀의 손이 델까 뜨겁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안은 이 상황이 적잖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동생 같은 주군 옆에 외간 남자가, 그것도 저 재수 없는 대공이 있다는 게 신경에 거슬렸다.

“이제 아가씨 식사도 끝났으니 전하께서는 그만 일어나시죠.”

결국 참다못한 이안이 에스티아 대신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빛이 다시 첨예하게 대립했다.

에스티아는 잠시 고민했다. 오늘은 왠지 혼자 있기 싫었다. 꽃을 통해 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계속 따끔거렸다.

-평생 널 돌아볼 일 없을 거야. 어디 한번 죽을 때까지 내 곁을 맴돌아 봐봐.

에스티아가 저도 모르게 이불을 꽉 쥐었다. 그러자 아직 낫지 않은 오른쪽 손목이 욱신거렸다.

“에스티아.”

그 손을 에버하르트가 다급하게 붙잡아 왔다.

“왜 그래요. 기분이 다시 안 좋아요?”

에스티아는 눈이 천천히 그를 향해 움직였다. 걱정이 가득한 얼굴. 혹시라도 바스러질까 봐 두려워하는 얼굴. 저 얼굴을 조금 더 빨리 보았더라면 지금 이 두려움이 금방 사라졌을까?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이안이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눈치챘는지 조용히 방에서 물러났다. 에스티아는 새삼 이안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에스티아.”

“나한테…….”

에스티아가 애써 물기 어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평생 날 돌아볼 일 없을 거라고 했어요?”

이게 진짜 자신의 마음인지 아닌지는 더는 생각하기 싫었다. 어찌 되었든 이 괴로운 마음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진심이었으니까.

에버하르트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어디 한번 죽을 때까지 당신 곁에 맴돌아 보라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질책하려고 물은 건 아니었다. 그저 그 기억을 혼자 껴안고 있으려니 너무 답답해서 말한 거였다.

에버하르트가 의자에서 내려와 침대 옆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에스티아의 손등에 이마를 갖다 댔다.

“……기억하신 겁니까?”

연약한 마음에 두려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꿈을 꿨어요.”

차마 꽃을 찾았을 때 들었다고는 할 순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꽃을 찾고 나서 쓰러지기까지 했는데 기억까지 났다고 하면 더 극성을 부릴 거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 여자에게, 어떻게 청혼을 하냐고 그랬어요. 당신이.”

그런 꿈을 꾸고 보니 자신이 정말 큰 잘못을 했구나 싶었다. 그래서 진실을 털어놓으면 더 사이가 불편해질까 봐, 저 바보 같은 남자가 말하지 못하고 있는 거구나.

기억이 나지 않는데도 에스티아의 마음이 고통스럽게 움츠러들었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뺨을 대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그땐, 그냥 제가 속이 좁아서 그랬습니다. 내가 그때 당신을 보듬어 줬다면 당신이 그렇게 망가졌을 일도 없었어요. 진작 그 위험한 후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후회하지 마요. 이미 일어난 일이잖아요.”

에스티아가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받아들여야 했다.

그래도 조금은 무서웠다. 언젠가 다 기억하게 되면, 그렇게 ‘진짜 에스티아’가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에버하르트.”

그때도 누군가가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낯선 이 세계에서 절대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들었다.

“저…… 기억이 나니까 좀 무서운데…… 당신이 지금 있어 줘야 할 거 같아요.”

버려졌을 때 마음이 갓 생긴 흉터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하필 당신과 관련된 기억이 떠올랐잖아요.”

그렇다고 마냥 있어 달라고 하기엔 민망해서 변명을 덧붙였다. 괜히 말했나 후회가 되려던 찰나 그가 침대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은쟁반을 트레이 위에 올려놓고 에스티아의 옆에 자리 잡았다.

“밤새 옆에 있어 줄게요. 당신, 많이 힘든 날에는 꼭 악몽을 꾸잖아요. 그래서 잠이 잘 드는 향초도 사 놓는 거고.”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눕히며 그도 그녀를 향해 돌아누웠다.

“오늘은 향초가 필요 없을 거예요. 아마 앞으로도 필요 없을 거고. 내가 계속, 당신이 버려도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에버하르트가 짧아진 그녀의 머리를 넘겨주었다. 에스티아가 옅은 녹색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상품 취급하고, 겨우 친구가 되나 싶었던 사람은 그녀를 없애고 싶어 하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는 그녀를 망치려고 한다.

“당신 진짜 나 좋아하나 봐요.”

차마 그 단어를 입에 담을 순 없어서 다르게 표현했다. 에버하르트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 자신보다 당신을…… 더 아껴요. 내가 죽어도, 당신만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면 죽음 이후의 삶도 완벽하다고 생각할 만큼.”

진짜 이상한 남자네. 에스티아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품속에서 은은한 밤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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