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5화 (106/141)

105화 - 일어나세요

잘 때만 해도 분명 기분이 괜찮았다. 누군가의 온기 속에서 자 본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간만에 꿈도 안 꾸고 푹 잤다. 이제 아침 일찍 일어나서 꽃을 살펴보고 오스카 후작저로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머리가 무거웠다. 눈조차 떠지지 않았다. 여름인데도 방에 한기가 맴도는지 몸이 덜덜 떨렸다. 눈꺼풀이 떠지지 않고 온몸이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팠다.

“에스티아.”

그런 그녀를 발견한 건 당연히 옆에 누워 있던 에버하르트였다.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품에 안겨서 자고 있던 에스티아가 점점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전쟁했을 적, 선잠을 자는 게 익숙했던 에버하르트는 바로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렸다.

뜨거웠다. 너무 뜨거워서 자신의 몸이 차가워서 그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에버하르트는 그 즉시 이안과 황궁 의원을 불러왔다. 이안은 혹시나 했던 일이 일어났다며 얼굴이 창백해졌다. 에버하르트는 그 옆에서 딱딱하게 굳은 채 의원이 진찰하는 걸 지켜보았다.

의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일어났다. 그 옆으로 에버하르트와 이안이 바싹 다가왔다.

“원인이 뭡니까? 역시 과로입니까? 아가씨가 몸이 약합니다. 원인이 도대체 뭡니까.”

평소에 침착 그 자체이던 이안이 품위를 벗어던지며 물었다.

“그게…… 원인을 모르겠습니다.”

의원이 자신이 생각해도 무안한지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이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원인을 모른다니요. 의원님이 그걸 모르시면 누가 알겠습니까.”

대놓고 ‘황궁 의원이 할 소리냐’는 거였다. 그러나 의원은 그 말에 동요하지 않은 채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도 답답하지만 정말 그렇게밖에 답해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히 열이 난 거라면 과로라고 볼 수 있겠죠. 그런데 아가씨 목덜미에 푸른 반점이 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반점이라뇨.”

심상치 않은 말에 이번에 에버하르트가 의원의 말을 잘랐다. 그냥 아픈 거라고. 조금 힘들어서 그런 거라는 말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의원은 그가 가장 원하지 않는 말을 들려주었다.

“여태까지 보고 된 병명 중에 ‘푸른 반점’이 증상이 병은 없습니다. 병명이 뭔지를 모르니 원인을 알 수 없지요. 죄송합니다, 전하.”

“……증상이 심합니까?”

왜 눈치를 못 챘을까. 에버하르트는 자신이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어쩌면 그녀의 마음을 시험하는 그 시간 동안 심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의 말대로 쓸모없는 감정싸움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훨씬 빨리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은 반점이 옅어서 심하진 않습니다만, 고열이 반점 때문인 건 확실합니다. 아무래도 이렇게 간단히 진료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럼 만약에 반점이 더 짙어지면?

에버하르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뭔가가 잘못된 게 분명했다. 온몸이 차갑게 내려앉는 것과는 달리 심장은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

의원이 눈앞에 있었지만 도저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거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 조이 옆에서 울던 에스티아가, 그 이후 열병에 앓던 에스티아가 떠올랐다.

“전하.”

이안이 에버하르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러다가 사람 하나 더 쓰러지겠다 싶었다.

에버하르트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초점 없는 눈으로 누워 있는 에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이안은 일단 알겠다고 답하며 의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은 그랬다. 거의 소드마스터 경지에 올라 황실 기사단장까지 되었으면서도 사람 관계에서는 유달리 약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에스티아 앞에서는 12살 소년처럼 어수룩했다. 나중에는 거의 집착하는 수준으로 에스티아 주변을 맴돌았는데, 에스티아가 연못에 빠졌던 사건 때문에 시작된 증상이었다.

그때 에버하르트는 이런 말을 했었다.

-그 아이가 그런 게 맞다면, 꼭 나중에 내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누가 그랬는지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연못 사건으로부터 10년이 흘렀다.

소녀는 변했다. 하지만 소년은 변하지 않았다.

“에스티아.”

그가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죄인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것처럼 비굴하면서도 간절한 자세였다.

에스티아는 눈을 꼭 감은 채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왼손을 꼭 잡았다. 살짝 머리카락을 들어 목덜미를 보니 의원의 말대로 푸른 반점이 있었다. 이안이 에버하르트 옆으로 다가갔다. 이안은 그 반점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에버하르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훈련에 나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보내려고 한 게 아닌,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한 말이었다. 어찌 되었든 에스티아가 무사히 로셸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으니까.

“예, 오늘은 나가야 합니다. 계속 쉬는 것도 에스티아에게 폐를 끼치는 거니까요.”

이안도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했다. 에스티아가 걱정되어서 미치겠는 한편 그녀의 세상이었던 에버하르트가 무너질까 봐 염려스러웠다.

‘이렇게 한 사람밖에 모르는 사람이 왜 그랬던 걸까.’

이안은 둘의 사이가 왜 틀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도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그가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안은 주군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알고 싶어졌다. 왠지 이 모든 일이 ‘그 일’에서 시작된 거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전하. 혹시 예전에 아가씨가 물에 빠졌었을 때 범인이 누구인지…….”

“이안.”

에버하르트가 그의 질문을 가로막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 지금 그 얘기를 꺼내면 불안해 미쳐 버릴지도 모릅니다. 나, 나는…….”

에버하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안은 하는 수 없이 묻는 걸 포기하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막을 수 있었다면 지난 2년 동안 전하를 쫓아다니시는 것도 막았겠죠. 그러니까 제 말은…….”

이안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냥 달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해 준 말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천천히 눈을 뜨더니 이안을 바라보았다.

“……남작도 내가 에스티아의 인생에서 사라졌으면 좋겠습니까?”

올려다보는 눈빛에는 짙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이안은 그 눈을 마주한 채로 대답했다.

“아가씨의 삶인데, 제가 함부로 답할 수 있겠습니까. 저한테 묻지 마시고 아가씨한테 물으십시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안에게는 에스티아의 행복이 제일 중요했다. 그녀가 원하면 원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게다가 제가 사라지라고 한다 해서 전하가 사라지실 분입니까? 아가씨가 몇 번이나 차도 이러고 계시면서?”

그 말에 그제야 에버하르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가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원에게는 다시 제대로 진찰받게 할 겁니다. 훈련 끝마치면 바로 오겠습니다.”

“안 오셔도…….”

“금방 올게요,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이안의 말을 무시하고 에스티아의 뺨에 손을 올렸다. 이안이 다시 발끈하기도 전에 에버하르트는 방을 나섰다. 찰나 본 옆모습에는 깊은 괴로움이 묻어 있었다.

이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에스티아가 색색 숨을 쉬고 있었다.

“일어나세요, 아가씨.”

웃으려고 했지만 미소가 자꾸 일그러졌다. 이안은 에스티아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얼른 일어나셔야죠.”

아가씨가 눈을 뜨지 못하면,

인생 망가지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에요.

이안은 그렇게 한참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슬픔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쏟아졌다.

* * *

황실 기사단의 기강을 바로잡아라. 그게 황제 레이븐의 명령이었다. 에스티아 덕에 약초 부족 현상은 면했지만 생각보다 길어지는 장마에 기사들도 혼란스러워했기 때문이다.

“다들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그대들의 등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 의연해야 했다. 기사단의 기가 상하지 않도록 그 자신의 품위를 지켜야 했다. 기사단장이 며칠 나오지 않아 걱정하던 기사들은 그의 한마디에 다시 씩씩하게 훈련을 시작했다.

에버하르트는 그들의 자세를 고쳐 주고 움직임을 잡아 주었다. 기사들은 기사단장이 변하지 않았다는 거에 적잖이 안심했다.

에버하르트의 표정은 평소처럼 딱딱했다. 감정이 없었고 평온했다. 기사들이 평소에 보아 오던 표정이었다.

하지만 에버하르트의 속은 새까맣게 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스티아가 아팠다. 어쩌면 또 악몽을 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평소에 포커페이스 훈련을 해놔서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왜 저러냐고 다들 혀를 내둘렀을 테니.

훈련은 저녁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는 담담히 해산을 외치고 기사들이 자신을 보지 못하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사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속도를 높이려던 찰나였다. 시종 한 명이 에버하르트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갑자기 이리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전하.”

“무슨 일인가.”

에버하르트가 겨우 분노를 누르고 대답했다. 그러자 시종이 입을 열었다.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시종은 분명,

칼 셰린포드가 그를 찾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