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6화 (107/141)

106화 - 이 순간조차

에버하르트는 피를 믿지 않았다. 만약 성품이 피로 전이되는 것이라면 에스티아도 그의 아버지를 따라 악마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피를 믿게 되는 순간이 있었는데 바로 에스티아를 연못으로 민 범인을 떠올린 순간이었다. 에스티아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악함이 어쩌면 유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칼 셰린포드는 2년 전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후 유유자적하며 지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뭘 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확실한 건 그는 로셸 글레멘드와 마찬가지로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가 만약 정말 ‘좋은 아버지’였다면 메르헨이 미쳐 가는 걸 막았을 것이다. 그녀가 하는 행동을 수치스러워하고 다그쳤을 것이다. 들키지만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용건부터 말씀하시죠.”

그러니 에스티아를 놔두고 이자와 오래 있고 싶을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인 가면을 뒤집어쓸 정도로 자신이 사교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메르헨에게 작별을 고한 참이었다. 이미 자신이 구구절절하게 에스티아에게 매달리고 있다는 게 소문으로 퍼졌을 테니 칼 셰린포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제는 빌어먹을 연극을 하지 않을 거라는걸.

“왜 이리 차갑게 말씀하십니까. 미래에 가족이 될 사이인데.”

에버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속이 뒤틀려 토기가 쏠리는 기분이었다. 누가 누구랑 가족이 돼?

“요즘 자주 찾아오시지 않으니 섭섭합니다. 전하가 오시지 않으니 저택에 더 황량한 느낌입니다.”

훈련 내내 유지해 오던 포커페이스가 무너지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이 지긋지긋한 대화를 더 이끌고 가기 싫어졌다. 핵심을 꺼낼 시간이었다.

“각설하고, 메르헨 셰린포드와 끝났습니다. 애초에 시작도 안 한 사이였죠. 즉, 경과 이렇게 사적으로 얘기할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는 그 사람 이름을 입에 담는 것도 끔찍했다. 2년 동안 얼마나 그 이름을 많이 불렀어야 했는가. 무척 끔찍한 세월이었다.

“이런, 전하.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셔야죠. 거의 파탄 나기 직전의 영애와 선량한 성품으로 호평받는 영애 중, 세상이 누굴 고를 거 같습니까?”

“선량한 성품?”

에버하르트가 비소를 지으며 그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결국 에버하르트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예의를 걷어차 버렸다. 그러나 칼은 오히려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 설마 글레멘드 양을 선택하시려는 건 아니죠?”

“…….”

칼 셰린포드는 바로 그의 취약점을 파고들었다.

“보아 하니 글레멘드 양은 우리 메르헨과 전하의 약혼을 지지하는 거 같던데요. 글레멘드 양도 전하의 마음을 받아 주신 건가요? 아니면 전하 혼자만의 외사랑인가요?”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에버하르트의 마음에 꽂혔다. 칼 셰린포드가 얘기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에스티아에게 듣는 거 같았다.

“들어 보니 글레멘드 양이 메르헨과 전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복한다고 하던데요. 아닌가요?”

분하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 소문 자체도 에스티아가 퍼트린 거였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걸.

“역시 글레멘드 양과 합의된 건 아니군요.”

칼이 역시나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에버하르트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자, 생각해 보세요, 전하. 글레멘드 가문은 망하기 직전에, 글레멘드 양도 썩…… 소문이 좋지가 않죠.”

“입 다무세요.”

“게다가.”

칼이 에버하르트의 말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가신들의 의견을 무시하실 겁니까? 기억하세요. 바일 가문의 전하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셰린포드 공작.”

“모든 사람은 다 우리 메르헨의 손을 들어 주고 있어요. 그리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건 전하께서 그토록 아끼시는 글레멘드 양이 만든 거라는 것을요.”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에버하르트가 주먹을 꽉 쥐었다. 왜 지금 그 말이 생각나는 건지 모르겠다.

“잘 생각하세요. 전하가 지금 이렇게 미련하게 구시는 게 정말 전하께서 ‘아끼시는 분’을 위한 건지.”

칼 셰린포드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진작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메르헨 셰린포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걸. 그는 상관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딸이 대공비만 될 수 있다면, 남편의 진실한 사랑을 받든 말든 상관없는 것이다.

에버하르트는 절망스러웠다. 마치 쓰러져 있는 와중에도 그녀가 자신을 버리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경은 경의 딸이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정녕 모르는 겁니까?”

“세상은 비밀을 잘 지켜 주더군요. 굳이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아, 아니면 전하께서 뭐라도 밝히시려고요?”

칼이 비웃으며 식은 차를 마셨다.

“글레멘드 양은 안 그래도 힘든 일이 많을 텐데, 굳이…….”

칼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같았으면 따라 일어나야 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전하 부디 현명한 판단 내리시길 바랍니다. 며칠 후에 메르헨이 작은 사교회를 개최할 예정이니 참석해 주시면 더욱 좋고요.”

공손하게 말하는 척했지만 결국 분수를 파악하라는 거였다.

칼 셰린포드는 예의를 갖춰 에버하르트에게 인사를 한 뒤 응접실에서 나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굴욕적이었다.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이 순간조차 함부로 얘기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에스티아에게 불똥이 튈까, 그녀가 그를 나무랄까 봐,

에버하르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에스티아가 눈을 떴을 때는 거의 오후 5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잤나 싶어 허탈함이 들면서도 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조금 자고 나니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물론 아직도 머리가 지끈지끈거리긴 했지만.

배가 고프긴 했지만 움직이기가 싫었다.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나른했다.

에스티아는 이불을 꼭 끌어안고 침대 천장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특히 여러 일들이 많이 일어나서 이렇게 쉬어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가만히 누워 있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중심에 있는 인물은 역시 그 멍청한 남자였다. 혼자 꾸역꾸역 진실을 끌어안고, 그러면서도 진실을 외면한 탓에 지독한 미움을 받아 버린 남자가.

‘도대체 뭘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기억이 나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기억하는 게 두려웠다. 안 그래도 몸에 났다던 푸른 반점이 계속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에스티아가 천장을 향해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그때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에스티아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듣고 바로 누구인지 알아챘다.

방문객이 천천히 그녀의 침대로 다가왔다. 에스티아는 다가오는 상대를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연히 그녀가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방문객은 화들짝 놀랐다.

“깨…… 깨셨…….”

놀란 거 같던 방문객의 표정이 순식간에 울상이 되었다. 이건 또 뭔가 싶어 에스티아가 묻기도 전에 그의 몸이 맥없이 부서졌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더니 돌연 그녀를 껴안았다. 잠시 당황하던 에스티아는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뭔데요.”

보나 마나 아파서 놀란 거라고 생각한 에스티아는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칼 셰린포드가 찾아왔었습니다. 제 마음을 전하니 이 모든 게 영애가 원하던 건데 무슨 문제냐고 물었습니다.”

“…….”

예상치 못한 소식에 에스티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에버하르트가 더 힘을 주어 에스티아를 안았다.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함부로 얼토당토 않는 말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에스티아의 뜻을 반하는 걸까 봐 무서웠다. 동시에 두려웠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전 제가 당신을 밀어낸 건 잘했다고 생각해요. 다만 상대가 흑마법 쓰는 사람인 걸 알았다면 그 상대하고 엮진 않았을 거예요.”

그래, 마음에 걸리는 건 그거였다. 메르헨이 그녀를 없애기 위해 흑마법에 손을 댔다면 이 남자도 완전히 무사한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뭘 괜찮아요. 흑마법 증거도 못 잡았다면서요.”

“…….”

맞는 말이라 그는 잠자코 그녀를 안고 있었다.

“기다려요.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예쁜 영애를…….”

“하지 마세요.”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 마세요, 제발. 싫습니다. 싫어요. 싫어.”

그가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저었다. 에스티아가 얼마나 치밀하게 이 모든 판을 짰는지 제대로 경험하고 온 참이었다.

에스티아는 허 하고 숨을 뱉었다. 전에 보여 줬던 고고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나 싶었다.

“왜 끝까지 안 들어요.”

“무슨 말씀인지 뻔하니까요. 보나 마나 다른 영애와 절 엮으려고 하시는 거 같은데 싫습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솔직했으면 좋았잖아요.”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지만 몇 번이나 더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럼 어쩌면 나도…… 새로운 운명을 써 내려갈 수 있다고 믿었을 텐데.”

마음속에 씁쓸함이 퍼져 나갔다.

“쓸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쓸 수 있어요.”

에스티아를 껴안은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품속으로 파고든 탓에 그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꼬이기 시작했다. 에스티아는 헝클어진 옅은 은발을 쓰다듬었다.

궁금했다. 어떤 느낌일지.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 것처럼 안심이 될지, 아니면 모든 안식이 사라진 것처럼 두려워질지.

절대적인 헌신은 달면서도 더 속을 쓰게 만들었다. 영원에 다다를 마음인지 의심을 품게 했으니까.

결국 답은 없었다. 사는 한 안식과 두려움은 한 번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에버하르트가 고개를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 에버하르트가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숙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