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7화 (108/141)

107화 - 검은 기운

입과 입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가득 차던 방은 금세 조용해졌다. 에스티아가 자신은 열이 났으니 옮을 수 있다며 그를 밀어낸 탓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상관없었지만 에스티아의 몸이 안 좋아질까 해서 애써 물러났다.

그 이후 그는 에스티아가 밥을 먹고 약을 먹는 동안 내내 옆에 붙어 있었다. 혹시나 시녀가 에스티아에게 말을 걸려 하면 날카롭게 경계했다. 아무래도 그녀가 또 소문을 이용해 그를 밀어낼까 봐 겁이 났던 거 같다. 그 모습이 예민한 고양이 같아 에스티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곧 밤입니다. 자택에 안 가시나요?”

하는 수 없이 에스티아가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었다. 에버하르트의 눈꼬리가 아래로 축 처졌다.

“……꽃.”

“네?”

“혼자 꽃 보러 가시려고 하는 거죠.”

뜨끔. 원래 같았으면 무슨 소리냐고 할 일이었지만 진짜 그럴 생각이어서 뜨끔했다. 하여튼 눈치 참 빠르다 싶어 에스티아가 감탄하듯 살짝 입을 벌렸다. 그 모습이 겨우 가라앉은 누군가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도 모르고.

“쉬시느라 계속 보지 못하셨으니 가장 먼저 그걸 확인하고 싶으시겠죠. 혼자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실 거고요.”

침대 끄트머리에 앉은 에버하르트가 침대 시트를 만지작거렸다.

“근데요?”

어린아이 달래듯 에스티아가 몸을 숙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당신이 쓰러진 터라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역시 평범한 꽃이 아니었습니다. 위험한 기운이 있는 거 같았어요. 그걸 당신 혼자서 보게 할 순 없습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에스티아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에버하르트가 허겁지겁 그녀를 부축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에요. 많이 나아졌는걸요.”

“그 말도 이미 몇 번이나 들었습니다.”

에버하르트는 단호하게 그녀의 거절을 거절했다. 그는 에스티아가 일어나자마자 어깨에 널찍한 담요를 둘러 주었다.

“아직 열이 완전히 내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없을 때도 창문 열어 놓지 마시고, 또 먹을 때도…….”

그는 담요 끄트머리를 묶으면서 쉬지 않고 입을 움직였다. 새삼 참 수다스러운 사람이구나 싶어 에스티아는 그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 한 자락 얻어 내고 싶습니까?

에스티아는 여전히 그가 했던 말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차가운 표정과 붉은 입술에서 나오던 시린 말들이 지금도 선명했다.

-그냥 한 번 더 저를 보고 싶은 거라고 말하세요. 그럼 적어도 고민은 해 볼 테니까요.

에스티아가 탁 하고 에버하르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서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예상대로 그가 빳빳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입을 맞춰 놓고 당황하는 거 보니 자신보다 숙맥이었다.

이 모습이 다시 보고 싶었다. 가면이 부서지고 마음이 말랑해져 결국 자신에게 굴복하는 걸 보고 싶었다.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적이 되어 가는 상황에서 포근하게 감싸오는 마음이 간절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여기까지 오면서 많이 상처받고 외로웠나 보다.

“에스…….”

“가요, 얼른.”

마음을 감추기 위해 에스티아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왼쪽 팔로 무거운 문을 겨우 열고 에스티아는 거실로 나갔다.

거실에는 고급스러운 가구들이 깔려 있었고 주인 소파와 손님용 소파가 둘러싸고 있는 한 가운데, 나무 탁자가 있었다. 꽃은 그 위에 있었다.

에스티아는 거침없이 꽃을 향해 다가갔다. 그런 그녀 앞을 에버하르트가 황급하게 막아섰다.

“잠시, 잠시만요, 에스티아.”

큰 키는 꽃을 가려 버리기에 충분했다. 에버하르트가 살짝 꽃을 향해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몰라 주변에 보호 마법을 걸어 놓았습니다. 꽃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요.”

“그럼 풀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

에버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그녀가 쓰러질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옆에 있어 줄 거잖아요.”

그 모습에 왠지 마음이 약해진 에스티아가 그를 부드럽게 달랬다.

“피하기만 해서는 오스카 후작이 무슨 꿍꿍이인지 영원히 알지 못할 거예요.”

“……그거 알아요? 당신의 몸에도 조금의 마나가 있어요. 잘만 활용하면 고위 마법사까진 아니어도 수련 마법사 정도는 될 수 있을 거예요.”

“아…….”

이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잠시 마음이 급해졌던 에스티아가 금방 차분해졌다.

“그래서 당신도 마법을 조금이나마 배우고 싶어 했어요. 하지만 공작 부인께서 말리셨죠. 마법에는 힘이 너무나도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신 건강이 더 안 좋아질 수 있다고요. 안 그래도 몸이 약했던 사람이니까.”

에버하르트가 짧아진 에스티아의 머리카락 끝을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졌다.

“조심해 줘요, 에스티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물러나는 거예요, 알겠죠?”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 목소리를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티아’라고 부르던 목소리와 사뭇 닮아 있었다. 그만큼 다정하고 온화했다.

“……사실 조금 무섭긴 해요. 웬트한테도, 메리나 카린한테도, 아무한테도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으니까.”

오스카 후작 일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이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확인한 뒤에 말하고 싶었지만, 정작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자 말을 할 수가 없어졌다. 기억을 잃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에 오스카 후작이 연관되어 있었으니까. 결국 혼자 견뎌 오던 버릇은 이곳에서까지 이어졌다.

“슬프게도 털어놓을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요.”

에스티아가 머리카락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그러니까 내가 원할 때까지 옆에 있어요. 어디 가지 말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눈이 그녀의 말에 확 커졌다. 그러더니 깊은 안도감이 눈빛에 맴돌았다.

“당연하죠. 언제까지나.”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나더니 꽃을 둘러싸고 있던 보호 마법을 풀었다.

아무렇지 않을 거라는 안일한 예상과는 달리, 에스티아는 보호 마법이 풀리자마자 몸을 움찔했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리는 거 같기도 했다.

꽃은 뚜껑이 열려 있는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두통이 점점 더 심해졌다.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펄 브릴리안트’를 봤을 때보다 기이한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소매를 꼬옥 잡았다. 그를 의지한 채로 에스티아는 꽃 앞에 섰다.

“지금부터 꽃 안에 뭐가 들었는지 자세히 확인할 겁니다. 제 뒤에 서세요.”

에스티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에버하르트 뒤로 물러났다. 꽃은 고요한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곁에 오라고 말하고 있는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가 한 손은 에스티아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꽃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가만히 그 기운을 흡수하던 거 같은 꽃은 돌연 빛을 발하더니 에버하르트의 마법을 뱉어 냈다.

에스티아를 좀 더 뒤로 물린 채 다시 시도하려던 에버하르트는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꽃에서 그의 마법만 나오고 있는 게 아니었다. 까맣고 깊은 저 기운은 분명…….

“에스티아!”

그리고 순간적인 직감이 많다면 검은 기운은 에스티아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에버하르트는 바로 뒤를 돌아 에스티아를 감쌌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상황이 심각한 걸 알아챈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밀치려고 했지만 에버하르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기운이 자신에게 흡수될 때까지 움직여서는 안 됐다.

“에버하르트!”

이름을 불러도 보았지만 에버하트는 오히려 에스티아를 더 힘주어 안을 뿐이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고통스러워서 절로 신음이 나올 거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이대로 무너진다면 저 끔찍한 기운이 그녀를 덮칠 게 뻔했다.

말해 줘야 했다. 꽃에 무슨 봉인이 걸려 있었고, 자신이 마법을 불어넣은 게 오히려 어두운 기운이 나올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 준 거 같다고.

그러니 이건 내 실책이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녀를 저 기운으로부터 지키는 게 먼저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날카롭게 그를 찌르던 움직임이 멈췄다.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게 봉인이 다시 그 기운을 안에 가둔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는 그제야 에스티아를 살짝 떼어 냈다. 에스티아의 안색은 창백하긴 했지만 기운 때문이 아닌 놀라서 그런 거 같았다. 에버하르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

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해 줄 얘기가 많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에……버하르트?”

에스티아가 이름을 불러 준다. 에버하르트는 몸이 꺾이는 와중에도 그 사실에 기뻤다.

더 다치면 안 되니, 어디에 머리를 찍히는 한이 있더라도 에스티아가 없는 방향으로 쓰러져야 했다.

“에버하르트!”

그녀가 또 이름을 부른 거 같다. 정말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미 그는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 버렸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