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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8화 (109/141)

108화 - 내가 잘못했어요

-정말이에요?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린다. 언제 들어도 희망을 갖게 하는, 힘든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는 목소리.

-그래. 네가 그렇게 한다면 내가 안심하고 널 받아 줄 수 있겠지.

그 음성을 가르고 그가 너무나도 듣기 싫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방에서 나는 소리일까?

싫었다. 이렇게 몰래 듣는 것은.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건 둘째 치고 그냥 행위 자체가 무척 치졸했다.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몰래 듣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로 날 받아 주는 거예요?

하지만 그녀의 음성이, 그 안에든 간절하면서도 신경 쓰이게 하는 단어가, 그를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두 가지 예측이 동시에 대립했다. 그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예상과, 혹시라도 그녀가…… 정말 그를 배신했다는 예상.

그래, 나중에 잘못을 빌더라도 얘기를 들어 보자. 정말 안 좋은 일이 생겨서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저 남자가 아닌 자신이 그녀를 도와줄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저 불안했던 것이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둘만 아는 비밀이 생겨 버릴까 봐 두려워서 그런 치졸한 짓을 했을 뿐이었다.

만약 그때 차라리 도망가 버렸으면 편했을까. 그랬다면 한순간에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더라도 어긋나지는 않았을까.

-그럼, 좋아요.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 방법이 확실하다면…… 내가…….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를…….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그녀를 끌고 나오고 싶었다. 그랬다면 그녀가 그런 말을.

-……게요.

하지 않았을 텐데.

마음속에서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이 상처는 어쩌면 평생을 살아도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았다. 그만큼 미치도록 사무치고 원망스러웠다. 그는 그때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것도 마음에 엄청난 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 그때 그 독을 버렸어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매정하게 굴고 수치심을 줘도 당신이 날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다. 그 결과, 그는 자신의 전부를 잃을 처지에 처했다. 차라리 당장 용서는 못 하더라도 상대의 마음을 시험하려고 들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여기에 다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빨리 일어나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다잡아야 했다.

불안했다. 혹시라도 일어났을 때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그녀가 사라져 버릴까 봐. 일어났을 때 차가운 공기만 있을까 봐 두려웠다.

에버하르트가 손을 뻗었다. 예상대로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손안에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이라도 뭔가를 부여잡기 위해 손을 움직였지만 차가운 공기만 스칠 뿐이었다.

손의 힘이 빠졌다. 차라리 이대로 어둠에 삼켜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르트.”

떨어지려는 손을 누군가가 붙잡았다. 작지만 따스한 손.

“에버하르트!”

번쩍. 에버하르트의 고개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정말 그가 원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을까 해서.

“괜찮아요? 의원이 내상을 좀 입었다고…….”

에버하르트의 입가가 덜덜 떨렸다. 말을 잇던 목소리가 뚝 멈췄다. 큰 손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잡아당긴 탓이었다.

에스티아의 몸이 에버하르트의 몸 위로 풀썩 엎어졌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에스티아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에버하르트가 그녀가 벗어나지 못하게 꽉 껴안았다.

“……안 다쳤어요?”

에스티아는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안은 건 예상했어서 그렇게 놀라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깨어나자마자 울 줄이야. 에스티아는 겨우 몸을 움직여 겨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더니 진짜 눈가에 눈물이 가득했다. 에스티아로서는 도저히 무슨 감정을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예전 일만 생각하면 단호하게 쳐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 준 것을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했다.

“아니, 일단 좀 놔 봐요. 내상 좀 있다고 했어요. 이렇게 사람 안고 있으면…….”

“괜찮은데…….”

우뚝. 에스티아가 벗어나려던 걸 멈추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난 그냥 괜찮아요. 좀 안 좋은 꿈을 꿔서 그런데 잠시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에스티아는 멍하니 그의 눈 옆에 난 흔적을 바라보았다. 눈물이라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닌데 이 남자가 흘리니 이상해 보였다. 안 어울리고 어색했다.

에스티아는 왼손을 들어 흔적을 만져 보았다. 작은 손가락에 눈물이 묻어 나왔다.

“에스티아.”

에버하르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불렀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해 움직였다.

“내가 미안해요.”

그의 눈에서 다시 슬픔이 또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하얗게 질린 입술과는 달리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에스티아, 내가 잘못했어요. 수십 번, 수백 번을 말했다고 해도 내가 잘못했어요.”

“…….”

당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전에도 사과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지금처럼 간절해 보이는 순간은 없었던 거 같다. 카페 다락방에서 무릎 꿇었을 때조차 지금에 비할 수는 없었다.

“도대체 뭔 꿈을 꿨는데 그래요.”

물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마냥 참는 것도 맞는 선택지 같진 않았다.

에버하르트는 침묵했다. 역시 이번에도 알려 주지 않는구나 싶을 때 창백한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2년 전에 당신이 날 버렸을 때요. 내가 당신을 애절하게 찾을 때, 당신은 오스카 후작하고 같이 있었습니다.”

듣기 싫은 이름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이 내가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했어요. 나한테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내가 오스카 후작을 선택했다고요?”

에스티아는 믿을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완전히 털어놓은 것도 아니고 애매하게 얘기했다는 걸 알았는데 거기서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당신과 난 그때…….”

에스티아는 물을 수 없었다. ‘버렸다’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둘의 관계는 명확하게 나온 것이었다. 거짓말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에스티아가 지난 2년 동안 미치도록 따라다닌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에스티아가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해서?’

갓 빙의했을 때라면 그녀는 그녀고 자신은 자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에스티아’에 동화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 일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쓰려.’

“에스티아.”

그의 목소리가 에스티아의 상념을 깨트렸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기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

“내가 당신을 배신할 리도 없고 외면할 리도 없으니까, 당신만 날 허락해 주면 되는데.”

그는 이제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생각하고 싶었다. 그가 그녀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떠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자꾸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마치 ‘네가 그럴 자격이 있냐고’ 묻듯이.

그 기억이 정말 날 수도 있는 걸까. 에스티아는 두려워졌다. 정말 그를 짓밟았다면 그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는 걸까.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에스티아가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나 기억 안 하고 싶어요. 안 할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었다. 일방적인 통보였다. 이기적이고 뻔뻔하다는 걸 알았지만, 에스티아는 최대한 진짜 에스티아와 자신을 분리하고 싶었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에버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반기고 싶은 일이었다.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러면서 에스티아와 눈을 맞췄다.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의 눈 속에 거부감이 있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오로지 혼돈과 연민이 있을 뿐이었다.

에버하르트는 안심하고 그녀를 꽉 안았다. 그러고는 에스티아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체향이 진통제처럼 마음속 통증을 달래 주었다.

그는 드디어 숨을 쉬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에스티아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어깨에 편하게 몸을 기댔다. 쓸데없는 감정싸움을 하기 싫어 그런 거 같았지만 그는 그마저도 좋았다. 이런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에버하르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이 푸른 반점이 그녀를 잡아먹을까 겁이 났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에스티아가 말을 걸어 왔다.

“괜찮아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쉽게 죽을 생각 없어요. 난 금방 나을 거예요. 그러니까…….”

나 대신 다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괜히 죄책감만 부추길 뿐이라고.

그런데 헌신적인 사랑은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오늘만 질까. 오늘만 져 버릴까.

“그러니까…… 어…… 나는…….”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에버하르트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안 다칠게요. 그러니까 우리 잠시만 이러고 있어요.”

에스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버하르트는 만족했다.

‘지금’이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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