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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09화 (110/141)

109화 - 시작된 기다림

다행히 에버하르트의 내상은 심하지 않았다. 의원의 말로는 워낙 튼튼한 몸이어서 그나마 빨리 회복하고 있었다고 한다. 에스티아는 안심했지만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가 그녀에게만 털어놓은 바로는 그의 속을 헤집어 놓은 게 흑마법 같다고 말했으니까.

게다가 황실 기사단장이었던 탓에 에버하르트는 일을 쉴 수 없었다. 워낙 중요한 직책인 데다 이미 며칠 쉬었기에 더는 일하는 걸 미룰 수 없었다.

“이안하고 같이 갔다 올게요.”

에스티아가 문가에 서 있는 에버하르트에게 말했다. 그의 표정이 무척 어두웠다.

“같이는 가도 남작이 같이 얘기를 나누진 않을 거 아닙니까. 당신 혼자 그 작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건데, 전 그게 도저히 용납이 되질 않습니다.”

에버하르트의 표정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일그러졌다. 이상하게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건 에스티아였는데,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당신을 데려갈 순 없잖아요. 나 혼자 가는 게 더 많이 캐낼 수 있을 거예요. 이안이 바로 문밖에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

에버하르트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 모습이 말 안 듣는 어린아이를 보는 거 같아 에스티아가 옅은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 어떡해요. 그러면서 나한테는 왜 그렇게 모질게 대했대?”

에스티아가 왼손을 뻗어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빙의 후 처음으로 이 손을 제대로 보았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검을 휘둘렀을 테니까.

“몇 번이나 날 구해 주고…….”

에스티아가 잡은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사과하고…… 여러 의미로 지금 나에게 당신이 필요한 거 같아요.”

“……정말요?”

에버하르트가 옅은 녹색 눈을 들어 보았다. 에스티아가 엄지로 그의 거친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당신을 용서한 건 아니에요. 난 아직도 당신을 경계하고 온전히 믿질 못해요. 하지만…….”

-기억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당신을 싫어하진 않아요. 미워하지.”

축 처져 있던 에버하르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닫고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 마차 안에서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스쳐 갔다.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미워했죠.

-그 두 개가 뭐가 다른가요?

-마음이 없는 존재를 미워하진 않죠. 보통 그런 건 싫어한다고 표현하죠. 비가 오는 날씨를 싫다고 표현하지, 미워한다고 표현하진 않잖아요.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을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작은 몸이 그의 품으로 쏙 들어왔다.

“당신은 지금 내게 빚지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당신이 지금 날 구해 주고 있는 거야. 날 지켜 주고 있는 거고.”

그가 에스티아의 등을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에스티아는 가만히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신은 기억 못 하겠지만 나 지난 2년 동안에도, 당신한테 참 못되게 굴었어요. 그런 거 생각하면 당신은 참 자비로운 사람입니다.”

에버하르트의 입술이 에스티아의 머리에 닿았다. 그의 뜨거운 숨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내 인생에 당신이 없다는 건, 모든 빛이 사라진다는 거와 같아요. 당신이 내 삶의 이유입니다. 당신이 없으면 나도 없는 거예요.”

에버하르트는 다시 애원하고 있었다. 떠나지 말아 달라는 말과 함께 부디 다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외면하고 그저 기대고 싶게 만드는 말이었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단단했지만 지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말하고 싶었다. 사실 꽃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을 때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고.

에스티아의 입술이 잠시 달싹였지만 결국 말을 뱉어 내지 못했다. 지금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기보다 다독여 주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보다 위태로워진 마음을 보듬어 주고 싶었다.

이제는 이 마음이 ‘진짜 에스티아’에게서 오는 것인지, 온전히 자신의 것인지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의 헌신적인 사랑이 위로가 된다는 사실만이 중요하게 다가왔다.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살짝 떼어 내고는 살짝 방으로 끌어당겼다.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에 에스티아는 살포시 입술을 갖다 댔다. 그가 본능적으로 눈을 감자 에스티아가 그 위로 살짝 입을 맞추었다.

워낙 키 차이가 나서 쉽진 않았지만 그가 살짝 몸을 숙여 준 덕에 어떻게 성공하긴 했다. 에버하르트의 눈에 당혹감이 맴돌았다. 에스티아는 옅게 웃었다.

“처음, 기억을 잃은 후 당신을 보았을 때 눈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어요. 저렇게 예쁜 눈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고 생각한 거 같아.”

그가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이 바보 같으면서도 웃겨서 에스티아는 조금 안심이 됐다. 왠지 조금 더 용기를 갖고 오스카 저택으로 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당신하고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당신이 나한테 좋은 사람이었었다는 건 알겠어요.”

에버하르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에스티아가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난 여전히 당신과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내가 한 잘못을 당신이 조금씩 용서를 한다면…… 조금은 다른 미래를 그리고 싶긴 해요.”

에버하르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주저앉을 거 같았다. 그만큼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다시 말하지만 용서했다는 건 아니에요. 다만, 내가 무사히 갔다가 당신 옆으로 돌아오겠다는 소리예요.”

“네, 에스티아.”

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참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싶어 에스티아가 작은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오스카 후작은 아직 찾고 있는 꽃이 더 남았을 거예요. 절대 이 시점에서 날 당장 어떻게 하진 못해요.”

에스티아가 그의 하얀 뺨 위로 손을 갖다 댔다.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는다면, 쳐들어갈지도 모릅니다.”

“…….”

“당신이 다쳐서 온다면, 난 그자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릴 거예요.”

“……에버하르트.”

“빨리 돌아와야 해요, 에스티아.”

에스티아는 그의 눈 속에서 간절함과 광기를 동시에 보았다. 빙의 후 처음 이 눈을 보았을 때도 폭풍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속에는 지금과 같은 것이 들어 있었구나.

“알았어요. 할 일 하면서 열심히 기다리고 있어요.”

“네.”

그 대답과 동시에 말캉한 것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생각해 보니 서로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닌, 누가 누군가를 아래로 둔 게 아닌, 순수하게 하는 입맞춤은 이번이 처음인 듯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의 목에 왼손을 둘렀다. 자비를 베풀 듯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 사이로 그의 것이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다독이듯 그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혀와 혀가 복잡한 인연의 끈처럼 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온기에 빠져들었다.

* * *

마차를 탄 에스티아 옆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맞은편에는 이안이 불안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오스카 후작저로 가는 길이었다. 긴장되었지만 에스티아는 이안을 향해 간간이 웃어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스티아는 곧 잡념에 빠져들었다. 핑크스가 ‘들려주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정확히는 꽃이 알려 준 기억이었다.

* * *

그 기억 속에서 에스티아는 울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는데 무언가가 찢기고 터지는 소리가 반복되었다. 이따금 절로 떠진 눈 사이로 처참하게 찢긴 사람들의 몸이 보이기도 했다.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게 환상이고 환청이라는 것을. 로셸이 마법사들을 시켜 그녀를 심리적으로 고문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너무 생생해서 에스티아는 점점 눈앞의 현상들이 현실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에스티아는 울었다. 비명을 질렀다. 이제 그녀를 지켜 줄 어머니도, 그녀를 아껴 주는 연인도 없었다.

‘보고 싶어…….’

누구를 향한 외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껍데기만 남는 인형이 되기 전에 실컷 그리워하고 싶었다. 에스티아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이안!

에스티아가 눈을 깜빡였다. 이것도 환청인가 싶었다.

-맞냐고요! 여기!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방 밖에서 들리고 있었다.

-여기밖에 안 남았…….

익숙한 목소리가 뚝 멈췄다. 아직 이성의 끝이 남아 있다면 저 음성은 이안의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 이안과 에버가 구하러 온 걸까?

그럴 리가 없지.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구하러 올 일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에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비켜. 내가 부숴 볼 테니까.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방문이 부서질 듯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에버가 자신을 죽이러 온 걸까.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런 끔찍한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것보다 나을 거 같았다.

이내 엄청난 소음이 들려왔다. 육중한 나무 문이 아예 가루가 되면서 박살이 났다. 그와 동시에 끔찍하게 이어지던 환상과 환청도 사라졌다.

에스티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이제는 에버가 정말 자신을 죽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가 이 끔찍한 고문 속에서 자신을 꺼내 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이…… 으…… 흐…….

에스티아는 눈을 뜨고 싶었다. 이 울음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누구든 괜찮다고 다독여 주고 싶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로셸, 이 개새끼가.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그녀의 추측이 맞다면 이 목소리는 에버의 목소리였는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녀 앞에서 심한 욕설을 내뱉은 적이 없었다.

에스티아의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지독한 수마가 그녀를 덮쳤다.

그걸 눈치챈 큰 손이 그녀의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에스티아 글레멘드! 눈 떠. 눈 뜨란 말이야!

졸렸다. 너무 졸렸다.

에스티아가 거의 마지막 숨을 토해 낼 때쯤 그녀의 몸 안으로 어떤 기운이 흘러들어왔다.

-죽지 마. 누구 마음대로 죽어. 넌 죽을 자격도 없어. 평생 내 곁에 있어야 해.

그 말을 끝으로 과거 속 에스티아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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