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110화 (111/141)

110화 - 소문

꽃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꽃이 들려준 이야기에서 그는, 눈에 보이는 기사들을 가뿐히 처리했다. 애초에 기사들은 함부로 대공작에게 손댈 수 없었다. 그는 그 점을 이용하여 더 빠른 속도로 기사들을 옆으로 치웠다. 에스티아의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로셸이 에스티아가 거의 죽을 정도로 정신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마치 그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견딜 수 있는 선을 넘어서 행하고 있었다. 죽으면 어쩔 수 없고, 견디면 계속 장기말로 사용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어쩌면 내가 올 거라는 걸 예상했는지도 몰라.’

에버하르트가 쓴 입맛을 다셨다. 에스티아와의 관계는 진작에 끝난 지 오래였지만 그는 그녀를 잘라 내지 못했다. 로셸은 어쩌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모든 상황을 수를 쓰는 아버지 앞에서 에스티아는, 소중한 사람들을 잃었다. 평생 사랑해 오던 여자였고 이제 그 여자 곁에는 항상 따스히 바라봐 주던 어머니도, 방패처럼 든든하게 지켜 주는 정인도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그녀를 버렸다. 왜냐하면 그녀가 먼저 그를 버렸으니까.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선택한 건 그녀였다. 그리고 아주 처참히 그를 짓밟았다.

그렇게 해서 저버릴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포기하지 못하고 그녀 주변에 소식통을 심어 놓고 그녀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바로 달려갔다. 바로 지금처럼.

에버하르트가 그녀를 껴안은 채로 별채로 달려갔다. 이안이 앞장서서 자신이 머물고 있는 별채로 안내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에버하르트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집 주변에 보호 마법을 걸었다.

이안이 근처에 있는 손님방 방문을 열었다. 에버하르트가 그 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에스티아를 뉘였다.

“아가씨는요? 치유 마법이 효과 있는 거 맞습니까?”

에버하르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 아까 하던 치유 마법을 다시 걸었다.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 효과를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뿐이었다. 마법이 통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걸 환자가 거부한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에버하르트의 아래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쿵쿵 뛰면서 손이 벌벌 떨렸다. 화가 났다.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줘 놓고 무책임하게 떠난다니. 그럼 죽어서라도 그녀를 쫓아가서 복수할 거 같았다.

“일어나.”

에버하르트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네가 이런다고 내가 용서라도 할 줄 알고? 어림도 없어. 난 너 평생 괴롭고, 외롭게 만들 거야.”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얘기하고 있었지만 속은 새까맣게 썩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잦아들 때마다 그의 심장도 멎는 기분이었다. 지옥 밑에 또 다른 지옥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지는 몰랐다.

“눈 뜨라고…… 눈 뜨란 말이야…….”

에버하르트의 입가가 달달 떨렸다. 점점 이성의 끈이 얇아지는 걸 느꼈다. 결국 에버하르트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어 내기 시작했다.

“네가 이렇게 죽으면 난 더 행복하게 살 거야. 너 보란 듯이 딴 여자를 배필로 삼아 자식들도 낳고 가문도 번성시킬 거야. 너 같은 건 생각도 안 하겠지. 네가 그걸 원한다면 이대로 죽어도 좋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애초에 처음부터 이 여자 말고는 다른 여자와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뿌리 깊은 증오로 누구와도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 이 여자 곁을 맴돌게 될지도 모른다.

가신들이 반발할 것이다. 그중에서는 차기 가주 자리를 노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대로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그는 벼랑 끝에 몰려 있어서 다른 걸 여유롭게 생각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언제나 가장 최우선은 그녀였으니까.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에스티아.’

치유 마법은 마나 소모가 컸다. 오랜 시간 지속되면 마법을 쓰는 자도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에버하르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같이 죽는 거면, 상관없겠지.’

그가 염려하는 최악의 상황은 그‘만’ 사는 것이었다. 그 외에 상황은 그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꿈틀. 에스티아의 눈꺼풀이 움찔했다. 심장 소리도, 호흡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에버하르트는 정신이 흐려지는 걸 느꼈지만 계속 기운을 불어넣었다. 이대로 그가 죽을 수도 있었지만 에스티아가 그걸 보며 후회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았다.

에스티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제야 에버하르트는 마법을 멈추었다. 고위 마법을 오래 써서 몸이 덜덜 떨렸다. 서 있는 것은 물론 정신을 차리는 것도 어려웠다.

“에……버……?”

그녀가 배신한 후부터 이름을 허락한 적 없지만 지금은 제재하고 싶지 않았다. 그럴 힘조차 없었다.

“정신이 드나 보네. 뻔뻔하게 죽을 생각을 했어?”

‘나를 놔두고?’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에스티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꿈이네. 꿈인가 보다……. 에버가 내 옆에 있는 걸 보니.”

에스티아는 아직 정신이 몽롱한 듯했다. 에버하르트가 침대 옆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다시 또 네 삶을 포기하기만 해 봐. 그때는…… 그때는…….”

어떻게 하지?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너무 지쳐서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터져 나올 거 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그냥 죽나 싶었는데, 마지막으로 에버는 보고 가나 보네.”

“죽긴 누가 죽어. 넌 못 죽어.”

에버하르트가 바로 고개를 들고 발끈했다. 그녀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또 와 줘, 에버. 꿈에서라도 자주 보고 싶어.”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단잠에 빠져들었다. 이안은 그런 그녀의 상태를 잠시 살피더니 조용히 방을 나갔다.

고요한 방 안에 작은 숨소리가 색색거리며 들려왔다.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 그는 소리를 죽여 울었다.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그럼에도 그녀를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아마 그녀가 죽어서도 자신의 곁을 맴돌 걸 알아서 그런 걸까.

에버하르트가 떨리는 몸을 일으켜 그녀의 이마, 코, 입 순으로 입을 맞췄다. 입에서는 조금 더 오래 머물렀던 것도 같다.

그는 그렇게 한동안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댄 채 앉아 있었다.

훗날 그녀가 그걸 기억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 * *

덜컹. 에스티아의 의식이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핑크스가 들려준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무슨 일인가?”

이안이 마차 천장을 두드리며 마부에게 물었다.

“아, 나리. 아무래도 바퀴가 길에 빠진 거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기다리게. 나도 곧 나갈 테니.”

마부가 정신없는 목소리로 얘기하자 이안이 바로 마차 문을 열었다.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괜찮겠어? 사람을 더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금방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이안이 그녀를 달래고는 밖으로 나갔다. 마차 문이 닫히면서 불안한 고요가 찾아왔다.

-죽긴 누가 죽어. 넌 못 죽어.

그러자 저절로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핑크스의 이야기에 담긴 기억. 그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는 결코 경멸하거나 혐오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향한 짙은 소유욕과 집착이 묻어 있었다.

‘학대당할 때마다 지켜 줬다는 게 진짜였어.’

에스티아가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상하게 그의 진심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녀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하려는 듯 비가 더욱 세차게 쏟아졌다. 이안이 문을 벌컥 열었다.

“아가씨, 아무래도 오늘은 더는 이동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인근 마을에서 잠시 쉬었다 가시는 건 어떤가요? 마차를 빼낼 사람들도 불러오고요.”

“응, 알았어.”

에스티아는 군말하지 않고 로브를 둘러썼다.

마차에서 내리니 가히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에스티아가 눈살을 찌푸리자 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 왔다.

“제 손만 꼭 잡고 따라오세요, 아가씨.”

따뜻하고 듬직한 손이었다. 에스티아는 그의 말대로 손을 꼭 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앞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무섭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셋은 마을 초입에 다다랐다. 낡은 집이 몇 개가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안, 이 마을 이름이 뭐야?”

“리몬 마을입니다. 오스카 후작저 바로 근처에 있는 마을이죠.”

“오스카 후작저 근처에 있는 마을…….”

에스티아가 특정 글자를 가만히 혀 위로 굴려 보았다. 역시 혀가 바로 까끌까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아직 오스카 후작 영지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다행히 이안과 에스티아는 한 노부인의 저택에 머물 수 있었다. 마부에게는 돈을 넉넉하게 쥐여 주고 사람을 구해 마차를 이곳으로 끌고 와 달라고 부탁했다. 노부인에게는 가짜 신분을 대고 남은 여분의 돈을 주었다.

“그럼 마부가 있는 곳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쉬고 계세요, 아가씨.”

“응, 조심히 다녀와.”

에스티아가 이안이 방을 나가는 모습을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렇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까 생각하기를 수 분, 노부인 엘라가 노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날이 춥습니다, 드십시오, 아씨.”

“감사합니다.”

에스티아가 이가 나간 컵을 조심스레 받아 들었다.

“저 근데 부인…….”

“예, 아씨.”

엘라가 낡은 안경을 떨리는 손으로 위로 올렸다.

“이 마을 바로 더 가면 오스카 후작 영지가 있는 건 아시죠?”

“그럼요. 이 마을에 모르는 사람은 없죠.”

“아, 그럼…….”

에스티아가 컵을 만지작거리며 은근슬쩍 엘라에게 물었다. 짐짓 태연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그러고 보니 이 근방에 소문이 하나 돌고 있다면서요?”

0